소설리스트

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131화 (131/254)

131화-새로운 카테고리(9)

여기까지 자연스럽게 오는건 성공했지만 가장 우려하던건 그들과 접촉하고 에리시움에 한번 데리고 가달라 회유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이제 겨우 그들과 만날 기회정도를 얻었을 뿐이니까. 물론 이브는 필요하다면 연맹의 연구원 피레스 같은 꼭두각시를 하나 더 늘릴 각오도 하고 있었다.

"...좋아. 어려울 것 없지."

그렇기에 먼저 다가와준, 심지어 에리시움에 데려가 달라는 부탁을 흔쾌히 들어준 이자벨의 선택은 우리에겐 불필요한 과정을 단숨에 건너뛸 수 있는 좋은 선택지였다.

거기다 분명 그녀는 지난번 전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기사를 보고 우리를 찾아온 것이라 했다. 그렇다는건 우리가 그동안 쌓아 놓은 이름값이 헛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바로 가자 크리스."

"나 참."

우리 속내를 모르는지 그녀는 크리스를 재촉했다. 혀를 찬 크리스가 모는 차량은 곧바로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다치지 않게 조심해. 수호자 연합에게 빌미를 주긴 싫으니까."

"그럼요. 안 다치게 조심하죠."

정작 서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우리와는 달리 중간에 끼게 된 크리스는 혹시나 우리 신변에 문제가 생겨 수호자 연합과 트러블이 생길까 걱정이 태산 같아 보였다.

'내가 보기엔 강해보이는데.'

'단순한 형상력의 보유량을 강함에 직결시킬 순 없어.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쉽지는 않을 것 같긴 해.'

대체 어느정도기에 크리스가 우리가 다칠까 저리 걱정하나 싶었지만 놀랍게도 이브도 그녀의 수준을 인정할 정도였다.

'내 직감이지만 인간의 몸으로는 아직 애매할지도.'

어느정도였냐면, 이브가 자신의 패배를 계산에 포함하기까지 했다.

"한때는 난 내가 제일 강한 줄 알았어. 검성이라 불리던 남자도, 마도사라 불리던 여자도 이길 수 있을거라고. 하지만 아니더라. 세상은 넓고, 심지어 그런 세상이 한두개가 아니니까."

우리가 도착한 곳은 큼직한 지하벙커에 마련된 일종의 연무장이었다. 이곳에서, 이자벨은 자신의 무기를 들었다.

그녀의 가녀린 몸과 전혀 안어울리는, 큼직한 날이 번득이는 언월도였다.

"빈둥거린다고 말했지만, 사실 강해지는걸 포기한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럼. 난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있어. 나 때문에 엮여든 이들이야. 난 나를 믿어주는 그들을 반드시 지켜야 해."

슬며시 떠보듯 시도해본 내 질문에 그녀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그 질문을 통해 그녀가 관계자 중 플레이어임을 직감했다. 에리시움의 성녀 이자벨, 그녀는 분명 지구에 자신의 유닛을 둔 플레이어다.

얼추 이해가 갔다. 그녀와 함께 온 이들은 그녀와 사이가 별로 안좋아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집단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들 중 일부는 유닛일게 뻔했다. 그것도 그쪽 세상을 평정하고 새로운 곳으로 눈돌린.

어찌보면 지금의 우리와 똑같았다. 어째 유닛들이 챕터를 진행해 나가며 슬슬 외부 세상으로 손길을 뻗치기 시작하니 일이 가면 갈수록 더 커진다.

당장 그들 세상의 플레이어가 지구에만 유닛을 두고 있는게 아닐텐데.

"하지만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지킬 수 없어."

"맞는 말입니다."

"너희, 페어로 싸운다며. 한번 보여줘, 너희의 협동심. 너희는 지키고 싶은걸 지킬 수 있을까?"

슬며시 웃은 그녀가 한 손에 든 그 커다란 언월도로 우리를 가리켰다. 나도, 이브도 검을 빼들었다.

'빠르게 끝내고 싶지만 그렇다고 질수도 없어.'

군체의식을 통해 울리는 말에서 이브의 감정이 느껴졌다.

효율을 위해서라면 적당히 상대하다 끝내는게 맞지만, 지거나 남에게 얻어 맞는걸 지독히 싫어하는 이브가 그걸 용납할리 없으니까.

"가자."

우리 둘이 동시에 굉음을 내며 땅을 박찼다.

나도, 이브도 몸놀림이 전과는 조금 달랐다.

시간이 조금이라도 비면 이브는 항상 나를 데리고 그쪽으로 넘어가 함께 싸우며 경험을 쌓았다.

지금은 출력이 그 반도 안 되는 인간의 몸이지만, 쌓은 경험을 뿜어내는데 방해될 건 없었다.

"대단해."

단숨에 근접해서, 검이 동시에 휘둘러지는 순간, 감탄한 이자벨이 자신의 힘을 터트렸다.

"신성기ㆍ강림(降臨)."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찬란한 황금빛이 터져나왔다.

나도 이브도 놀라 굳어버렸다. 우리가 지금껏 단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형상력이 그대로 우리를 향해 폭사했다.

'저 빛이, 우리가 가진 힘의 성질을 강제로 변화시키고 그로인해 힘이 꼬이고 있어. 마치 정화하듯이 말이야. 저 여자를 감염시키는건 더 힘들겠어.'

'...저 힘의 근원은 믿음, 즉 신앙인가?'

우리는 주르륵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브가 단숨에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그녀가 가진 형상력의 근원을 유추했다.

"데이터를 얻는건 나쁘지 않아."

이브는 오히려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동의했다. 앞으로 저런 형태의 힘을 쓰는 자들을 만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다시 가."

이브가 검을 고쳐 쥐었다. 다시금 땅을 박차고 전신에 황금빛 빛을 두르고 있는 이자벨에게 덤벼들었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한번 휘두른 언월도에서, 빛으로 된 거대한 참격이 뿜어져 나왔다.

'부술 수 있어.'

나와 이브가 동시에 검을 들어 휘둘렀다.

함께 싸우기 위해 개발한 공명법은 그 어떤 힘이라도 서로 결합시켜 극대화할 수 있다.

분석이 끝난 이자벨의 신성력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휘두른 참격이 그녀의 힘과 정면에서 부딪히며 동시에 그녀의 힘을 잡아먹고 하나로 동화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마침내 이자벨의 신성력이 부숴졌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이브가 땅을 박차곤 망설임 없이 그녀를 향해 검을 집어던졌다.

*

'가능성. 그리고,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살의. 저게 정말로 십대의 소녀인가?'

이자벨은 자신의 가슴을 향해 날아든 검붉은 섬광을 가까스로 쳐냈다. 찡 하고 울리는 손의 감각에 하마터면 창을 놓칠 뻔 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선 다른 것 보다도 자신이 쏘아낸 신성력이 역으로 먹혔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여기까지 할까? 이 이상 진심으로 싸웠다간 누구 하나 다칠 것 같으니까."

이브가 눈앞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전의를 거두었다. 그리고선 황당하다는 이브의 표정을 무시하고 창을 내려놓았다.

"그럼 만족하신건가요?"

"그래. 충분히. 아주...색다른 경험이었고. 역시 식견을 넓히는게 중요해."

다가와서 여전히 올라가 있던 이브의 손을 잡아내린 신우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약속을 지켜. 지금 당장 우릴 에리시움으로 데려가."

"너 의외로 말버릇이 없구나?"

제멋대로 대련을 중단한게 못마땅했던 이브가 씩씩거렸으나 싱긋 웃은 이자벨은 눈 하나 깜짝 안했다.

"물론 약속은 지킬거야. 하지만 약속과는 별개로, 내 부탁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

"...부탁이라니요?"

"지금껏 여러 사람들과 대련을 해봤지만 다들 거기서 거기였지. 상태창 헌터들의 이능은 내가 배울 수 없고, 무투파라는 헌터들은 솔직히 대다수가 초짜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너희는 달랐어. 둘이서 하나인 것 같은 그 움직임, 경험, 위력까지."

그녀가 눈을 반짝였다. 그들이 가진 경험과 수련이 스러져간 수많은 이들의 수련법과 전투로 다져진 것이라고는 모르는 상태였으니까.

"혹시 나도 그 힘을 배울 수 있을까?"

그래서 그녀는 신우와 이브 둘이 함께 사용한 공명법에 욕심을 보였다. 본인도 더 강해져야만 했으니까. 그래야만 그들을, 자신의 유닛들을 지킬 수 있으니까.

그녀는 자신의 신성력을 잡아먹고 역공한 그 힘에서 가능성을 본 것이었다.

"싫어."

당연하게도, 코웃음을 친 이브는 단칼에 거절했지만.

"...그래? 마치 네가 그것을 만든 것 처럼 구는구나 이브."

정작 이자벨은 그 태도를 보고 눈치빠르게 감을 잡았다. 자신이 당했다는 생각에 움찔한 이브가 이를 갈았다.

"뭐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당분간 오래 볼 것 같으니까 생각은 계속 해봐. 일단 지금은 내가 한 약속을 지킬게, 이리로 와."

"정말 괜찮은겁니까?"

"구경 시켜주는 것 정도야. 어차피 그들은 이제 내게 신경도 안써요 크리스."

그녀는 크리스와 함께 시설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에리시움과 연결된 게이트는 딱 두군데 있었다.

에볼루션이 미 정부와 협력하여 철저히 관리되고 있는 그 게이트들 중 하나가, 이곳에 존재했다.

"잠깐. 그 뒤에 두명은 누굽니까?!"

"수호자 연합의 사람들. 빨리 비켜주시기나 하시죠?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검은 정장을 입은 미국측 요원들이 놀라서는 다급히 몰려와 이자벨의 앞을 가로막았으나, 그녀는 웃으며 강압적으로 그들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요원들은 어쩌지 못하고 길을 열어주었다. 애초에 게이트의 소유권이 있는 것도, 그녀가 직접적으로 협력하는 것도 그들이 아니었으니까.

지금 이 세상의 주도권과 권력이 어디로 이동했는지 그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귀찮게 안구는건 마음에 드네.'

그 과감함은 크리스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젓고, 이브가 인정할 정도.

그렇게 두터운 문들과 검문을 프리패스로 십수번 이상 통과하고 나자, 철통 같이 지켜지고 있는 방 안에 있는 게이트가 보였다.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싸우는 전사들에게, 언제나 라텔님의 빛이 비추는 아름다운 이 땅이 마음의 위안이 된다면 좋겠어. 비록, 그 아름다움을 결국 우리 손으로 짓밟아 버렸지만."

이자벨이 그 공간의 균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브가 습득한 게이트와는 또 다른 형태의 게이트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