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새로운 카테고리(8)
"플레이어 혹은 유닛이 모종의 수단을 써 기존에 속해있던 집단을 움직인다면, 굳이 우주전함이 아니더라도 다른 이들이 분명 나타날 수도 있겠죠."
지창현은 그들의 존재에 대해 언질해주며 또다른 세력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대중들에게는 마계처럼 그저 또다른 세상의 일부라고만 알려져 있는 에리시움.
사실 그곳에는 지구나, 연맹처럼 또다른 인류가 살고 있었다.
"또 인간이야?"
"이상할건 없지 뭐. 당장 마계에만 수많은 유닛들이 서로 경쟁하는데."
나는 옆자리에서 투덜거리는 이브의 말에 웃었다. 어째 외부에서 찾아오는 이들은 전부 인간이지만 그냥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다.
당장 우리가 만난 유닛 중 인간이 아닌 이들도 많았으니까.
"그래도 스스로 여길 찾아올 정도면 둘 중 하나라는거네? 우리처럼 게이트를 열고 오거나, 연맹처럼 워프해오거나."
"아마 게이트 비슷한 수단으로 왔을거야."
선택지를 두개로 좁힌 이브의 말이 맞는 것 같지만 솔직히 나도 잘 몰랐다.
그들의 정보는 아직도 기밀로 취급 받고 있다. 이미 알 사람들은 다 아는데도.
"피레스에게 물어봐 이브. 연맹은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
"연맹은 자체 인공지능을 이용해 지구의 모든 통신을 도청하고 분석해. 당연히 알고 있지만, 그것 뿐인 것 같아. 그들이 연맹과의 협력은 거절했대."
군체의식을 통해 감염시킨 우리의 첩자, 피레스가 알고 있던 정보를 말해주었다.
다만 그 연맹마저도 그들에겐 중요치 않은 듯, 접근할 기회마저 날려버린 상태였다.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는 상관 없어. 일단 그곳에 가서, 표본을 얻어야 해."
물론 이브 역시 그들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보다는, 당장 목표로 한 표본을 얻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슬슬 비행기가 고도를 내리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그리 멀지 않아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오신 강신우, 그리고 이브님?"
전과 마찬가지로 수호자연합에서 온 간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그런데 그 옆에, 내가 예상 못한 사람이 한명 더 있었다.
이브를 소환한 그날 이후 사실상 볼 기회가 없었던 크리스, 그가 날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이분은 저희 수호자 연합의 일원입니다."
"그건 맞지만, 그 이전에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이기도 하지. 친구랑 얘기좀 하겠다는데 막을 셈인가?"
선글라스를 끼고 있던 크리스가 눈썹을 까딱거렸다. 아담한 키의 젊은 여성이던 수호자 연합의 간부도 지지 않고 그와 기싸움을 벌였다.
"괜찮습니다. 친분이 있는건 사실이니까."
나는 일단 크리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어째 내가 홀랑 그쪽으로 넘어가버릴까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제 소속은 바뀔 일 없으니 걱정 마시길."
"그렇다면...알겠습니다."
물론 그녀가 상관이긴 해도 소속된 지부도 다른, 파견나온 내 사생활까지 막을 권리는 없었다. 결국 자신을 애니라고 소개한 그녀는 기다리겠다 말하곤 먼저 돌아갔다.
"귀찮게 구는구만."
"협력관계 아니었습니까? 분위기 살벌하네요."
"적어도 이곳 북미에서는, 충돌이 좀 있었거든."
내 말을 들은 크리스가 피식 웃었다. 그러나 나는 마음 편히 그를 볼 수가 없었다.
그의 플레이어가 연맹의 힘을 끌어오기 위해 자신의 유닛들을 어떻게 다뤘는지 이제는 아니까.
"이쪽이 이브? 반갑다. 난 크리스 베이커."
그 뒤엔 크리스와 이브가 처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인사라기 보다는, 그냥 가만히 뚫어져라 쳐다보는 이브의 눈에 손을 내밀었던 크리스가 멋쩍게 슬며시 손을 내렸을 뿐이지만.
'스트링.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유닛이었네.'
이브는 그 사이 크리스가 가진 스트링을 알아보았다.
사실 지금까지 알아본 유닛들이 없는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릴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내가 이브와 하나가 된 이후, 우리는 스트링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하나가 되었는데 연결이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이건 굉장한 강점이었다.
'그리고 저 여자도 게임의 관계자야.'
이브의 눈이 크리스의 뒷편에서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던 여자로 향했다.
이브의 시선을 느꼈는지, 모자 속 에메랄드 빛 눈이 반짝였다.
"충돌이 있었다고요. 그게 뭐죠?"
"어...그게 내가 너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온 이유기도 하지. 얘기 좀 할까?"
나도 그녀를 살피며 이야기를 꺼냈다. 크리스가 살짝 당황했는지 뒷쪽을 가리키며 조용한 곳으로 가자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이 애들, 감이 좋은 것 같은데."
그녀가 마스크를 벗고 앞으로 나선게 그때였다. 외견은 그냥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그녀가 품고 있는 형상력의 일부가 보였다. 이 여자, 상당한 강자였다.게다가 내가 줄줄 외우고 있는 헌터들 얼굴에도 없는 얼굴이었다.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전 이자벨이라고 하는데 일단 크리스의 말대로, 대화하기 편한 곳으로 갈까요?"
그녀가 크리스의 말을 받았다. 결국 우리는 공항 한쪽에 마련된 차량에 다 같이 올라탔다.
잠시 어색하기 짝이 없는 적막함이 흘렀다.
"일단 설명부터 하지."
결국 헛기침을 하던 크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쪽은 어쩌면 너도 알긴 할지도 모르겠는데, 지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온 인간이다. 연맹은 아니야."
"혹시 에리시움이라고 들어보셨는지."
그리고 그렇게 소개 받은 그녀의 정보는 분명 우리가 먼저 원하고 바라던 것이었다. 한가지 경계되는 것은 이 여자가 플레이어냐 유닛이냐는 것.
"오해하진 말고 잘 들어. 이 여자가, 너희랑 한번 붙어보고 싶다더군."
"...대체 어째서?"
이어서 한숨을 내쉰 크리스가 꽤 충격적인 발언을 내뱉었다. 당연히 나는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
"지구로 가자고? 확실히, 들은 내용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흥미로운 상황에 처해있군."
"이 상황에서 내가 왜 굳이 거짓말을 왜 하지?"
"그것도 그렇고."
피식 웃은 그가 몸을 돌렸다. 동시에 바닥에 흥건한 피가 찰팍거렸다. 반파된 거대한 지붕이 일부분 붕괴하여 그 참혹한 현장을 달빛이 비추고 있었다.
그녀, 이자벨은 그 모습을 보고 작게 탄식했다.
사방에 시체 뿐이었다. 한때 이 땅에서 가장 강성했던 제국의 황성은 이렇게 피로 얼룩져 멸망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유닛들을 죽이고 이 세상의 대표 유닛이 되었다고 하셨지. 그리고 우리는 영광스러운 자격을 얻었다고 하셨다."
"...자격?"
"다른 세상의 유닛들을 죽여 없애도 되는 자격을 말이다. 멍청한 계집, 아무렴 고작 이것이 이 위대한 성전의 끝이겠느냐."
그가 눈을 번득였다. 말단 성기사가 낼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자벨 본인은 게임의 영향력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말단 성기사가 선택 받은 성녀인 자신을 넘볼 정도로 강해진다? 심지어 그런 성기사들이 수백, 수천이 넘어간다? 게임의 도움을 받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역시 내가 알려 준 좌표를 타고 그 지구로 가서, 다른 유닛들을 죽일거고?"
"당연하다. 이는 우리가 모시는 신, 라텔님의 뜻 아닌가"
그가 히죽 웃었다. 도저히 말릴 수 없는 광기가 엿보이는 얼굴이었다.
'이런 머저리.'
이자벨은 그런 그를 보며 속으로 욕을 했다.
본인이 플레이어이기에 잘 안다. 플레이어는 플레이어일 뿐. 그 정체가 누군지는 알 수 없다.
당장 본인부터가 자신의 유닛들에겐 자신을 여신 라텔의 이름을 빌려 소개했으니까.
하지만 그를 포함한, 경쟁의 승자가 된 최후의 유닛들은 자신들의 플레이어가 이전부터 신실히 믿어 왔던 여신 라텔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하긴 애초에 그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그들은 분명 그 정체 모를 플레이어의 지원을 받아 강해졌고, 성국의 원로원은 그것에 넘어가 신탁을 받은 성녀인 그녀를 버리고 그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분명 엘빈에게 다른 세상으로 넘어갈 방법이 있다고 했지."
그가 중얼거리자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미간을 찌푸렸다.
엘빈은 자신과 같은, 또다른 플레이어. 하지만 평범한 사제였던 엘빈은 이자벨처럼 힘과 지위를 가지지 못했다. 물론 그들은 굳이 엘빈을 죽이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가만히 두지도 않았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이 되어 숨만 붙어있는 그 상태를 떠올린 그녀는 치미는 구역질과 욕설을 가까스로 삼켰다.
"당연하지만 조건이 있어."
"당신의 그 허접한 지구인 유닛들을 해치지 말아 달라는건가? 뭐 좋다. 어차피 다른 사냥감들이 많아 보이니까."
그녀의 말에 그가 대놓고 비웃었다. 그녀는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어쨌든 그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정보를 판것도 맞았고, 자신의 능력부족으로 성국을 장악당한 것도 맞았으니.
"당돌한 사람들이더군. 하지만 쉽지는 않아보이는데."
그렇게 세상의 벽을 넘어 온 그들은 수호자 연합, 에볼루션등의 현지 세력과 접하게 되었다.
그당시 이자벨과 처음 만난 크리스는 수호자 연합의 제안을 받아들인 그들이 마계의 마족들과 싸우게 된 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최종 승자가 되어 오만해졌던 그들은 예상보다 강한 신세계의 상대들에 고전하는 중이었다.
"아무튼, 나는 딱히 그들을 돕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그래서 그냥 빈둥거리며 시간이나 보내고 있어요."
다시 현재로 돌아온 이자벨은 이유를 묻는 신우에게 쓰게 웃며 답해주었다. 실제로 지구로 넘어와서도 그녀는 이렇다 할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새로운 세상의 문물을 탐방하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는 것. 그것들이 그나마 제가 찾은 여가생활이죠."
"...너희가 하는 일이 더 중요해. 굳이 이 여자가 하자는 대로 할 필요는 없어."
고개를 저은 크리스가 소신 발언을 시도했다. 그녀가 째려봤지만 그는 뜻을 굽히진 않았다.
"오히려 잘 된거네.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
그러나 그때, 이브가 그들과 만나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깜짝 놀란 크리스와 이자벨의 눈이 커졌다.
"상대해주는 대가로, 한번 그곳에 데려가줘."
이브는 굳이 질질 끌지도 돌려 말하지도 않았다. 단도직입적인 그 발언에 안그래도 커졌던 이자벨의 눈이 더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