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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128화 (128/254)

128화-새로운 카테고리(6)

"그래. 이브 네가 생각한 계획은 뭔데?"

"남이 기회를 줄 때까지 기다렸다 잡아채는건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기회는 우리가 직접 만들어야지."

이브의 마인드가 바뀌었다고 우리 계획이 드라마틱하게 바뀐건 아니었다.

이브는 우리 신분을 여전히 유지하기로 결정했고 인간의 몸도 계속 가져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기존의 질서에 그대로 편입해서 차근차근 밟아가자는 내 계획은 부정하고 그 대신 자신이 직접 그 질서를 조작하겠다 밝혔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다 듣고 마음을 놓았다.

나라면 하지 않을 과격한 방법이지만, 동시에 막힌 혈을 뚫어줄 수도 있는 결단일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여기는 에이글! 응답 바람! 본대! 응답..."

맹렬하게 황야를 가로지르는 차량 안에서 통신기를 붙잡은 통신병이 연락이 끊긴 본대와 필사적으로 연결을 시도했다.

어찌보면 우리는 지금 적의 노림수에 당해 기적적으로 생환중이니 기뻐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적의 노림수가 우리에서 끝날리는 없으니까.

본대가 습격당했다면 그건 그거대로 큰 위기였다.

"아...이런 제길."

그리고 그렇게 본대가 점령하기로 미리 계획한 곳에 가까워질때, 쌍안경을 들고 전방을 보고 있던 한 헌터가 탄식했다.

나랑 이브는 굳이 볼 필요 없었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강화한 우리 청각에 총성과 비명, 그리고 괴물들이 내지르는 괴성이 점차 선명히 들려오고 있었다.

"이미 한번 큰 위기를 넘긴 여러분께 할 소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다시 싸울겁니다. 이전 전투에서 있었던 빚도 갚아야 하니."

무전기에서 살짝 갈라지는 제이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트롤과의 전투에서 예상치 못한 일격을 맞고 부상당했던 그는 분함을 억누르며 본인은 다시 한번 싸우겠다고 밝혔다.

"주어진 임무는 끝났으니 지금부터는 제 독단입니다. 함께할 분들만 오십시오. 저는 반드시 저 괴물놈들을 두고볼 수 없습니다."

"나도 갈거야."

그의 비장한 선언에 제일 먼저 답한건 이브였다.

다들 놀라서 술렁거리는게 보였다. 그야 지금 이브는 부상도 심하고, 멘탈도 불안할거라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이브가 눈을 번득이며 그들을 바라본 순간 적어도 부상을 핑계로 말릴 수는 없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이슨은 자원해서 다시 한번 싸우겠다는 이들에게 길게 말하지는 않았다.

이제 현장에 완전히 근접했다. 본대를 습격한건, 역시 우두귀가 아니었다.

트롤들이 본대의 방어라인을 뭉개버리고 마구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역시 우릴 습격한 놈이 특별한 놈인듯 보였다. 전부 그놈보다는 작은 놈들이었으니까.

'가자. 우선은, 저 끔찍한 괴물놈들을 전부 죽이고 나서야 우리 계획이 시작돼.'

차가 정차한 순간 이브가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이가 다 나간 검을 들고 뛰었다.

그리고 검붉게 타오르는 그 검을 옆에서 들이친 우릴 보고 당황한 트롤들을 향해 휘둘렀다.

*

"굉장해...이건 충분한 데이터가 될 수 있겠어."

다급히 지원 나온 전투기의 미사일 폭격등을 힘입어 전투가 거의 끝나갔다.

트롤이 주축이 된 적들의 주력은 현재 거의 궤멸, 물론 아군도 큰 피해를 입어 이 이상의 작전 진행은 불가능하다.

"괜...찮으신겁니까?"

"그럼요. 물론이죠."

홀로그램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연맹의 파견 연구원 피레스는 걱정스레 묻는 지구측 보좌관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있는 이 차량은 후열에 위치해 전투에 직접적으로 휘말리지는 않았지만, 트롤들이 주술로 불러낸 흙인형들이 바로 근처까지 오는 등 위기의 순간이 없던건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사전 예측과는 전혀 달리 갑자기 트롤들이 튀어나와서 영락없이 밀리는 줄 알았는데."

"고작 몇명이 합류했다고 전장의 판세가 바뀌었죠."

가슴을 쓸어내리는 보좌관의 말을 한귀로 흘린 피레스의 시선은 여전히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화면엔 자신도 얼굴과 이름을 알고 있는, 마지막 남은 트롤의 전신을 얼려버리고 그대로 부숴버리는 총대장 제이슨의 모습이 보였다.

물론 일대를 통째로 얼려버린 제이슨만 활약한건 아니었다.

한번 본 기억이 있는, 지금은 부상을 입었었는지 팔과 다리등에 붕대를 감고 있는 흑발의 소녀부터 그 소녀와 페어를 이룬 흑발의 남자 등등.

난입한 헌터들은 각종 해괴한 술법으로 군의 화력을 무력화시키던 트롤들을 하나 둘 처리해나갔다.

"헌터들...지금은 저들이 없으면 전쟁이 성립되지 않는 지경까지 왔습니다."

"사실 저희 상부에서도 가장 관심있는 것은 저들이거든요. 수습이 끝나거든 자리를 마련해 주시겠습니까? 저야 일개 연구원 신분이지만, 저희 측에서도 그들의 공을 축하하고 싶습니다!"

중얼거린 보좌관의 말에 반응한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의도야 뻔했지만 연맹은 연합군에게 중요한 동맹으로 급부상했다.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인채 잠시 방에서 자리를 비웠다.

"지구인들은 통신이 끊겼다며 난리더군. 아무렴 그런 유물 수준 장비들이 제대로 굴러가겠나?"

"애초에 그들 입장에선 그게 최선일 테니까요."

홀로 남은 피레스가 통신기를 들었다. 연결이 되자마자, 그의 상관은 보고받는 내용을 검토하며 피식거렸다.

지구의 통신장비는 지금도 적들의 방해로 장애를 겪고있지만 그들의 장비는 그 피해를 벗어난 상태였다.

"보낸 영상은 전부 확인했다. 허가가 떨어졌으니, 점찍은 이들에게 은밀히 접촉해 보도록. 일개 연구원이 할만한 임무는 아니지만, 자네는 엄선한 우수한 인력이니까...그렇지?"

"알겠습니다."

상부는 피레스가 실시간으로 보내고 분석한 현장의 자료를 통해 방침을 정했다.

내려진 명령은 다름 아닌 '접촉'명령.

사실 피레스에게만 내려진 명령은 아니었다. 다른 곳에 파견된 이들에게도 이와 같은 동일한 명령이 내려진지 오래였다.

"아직 절대 긴장을 풀어선 안 되지만 적어도 조금은 쉴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예상과 전혀 다른 전투, 그로 인한 손실은 막대했다.

하지만 연합군은 기어코 목표로 정했던 거점을 점령했다. 덕분에 손실만 입고 얻는 것도 없는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

남은건 지원이 와서 이 거점을 보다 단단히 만드는 것 뿐. 그때까지는 부상을 돌보고 피해를 수습하는 것만 남았다.

'저기 있군.'

자리에 참석한 피레스는 전사자들의 추모와, 슬픔을 지우기 위한 전공자들의 소개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상부에서도 허가한 타깃으로 잡은 몇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접근했다. 연맹의 사절인 그는 연합군 내부에서도 주시하고 있는 중요인물. 자연스럽게 많은 시선들이 그에게 따라붙었다.

"총대장께선 저희가 제공한 키트를 이용해 부상을 치료중이시죠. 듣기로 이브 양도 부상을 입으셨다 들었는데."

"연맹의 연구원 피레스."

"그, 그렇습니다.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여유롭게 접근했던 피레스는 자신을 보는 이브의 눈을 보고 순간 굳어 움찔했다. 전에 악수를 나누며 스쳐가듯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의 눈처럼, 한쌍의 붉은 눈이 그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리 큰 부상은 아니거든요. 혹시 이브에게 볼일이 있으신지."

"그럼요. 두분 모두에게 볼일이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따로 이야기 가능하실지."

끼어든 신우덕에 겨우 정신을 붙잡은 피레스가 애써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에게는 다행히도 두사람은 별다른 의심 없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러려니 저러려니 해도 결국 일개 지구인일 뿐. 우리가 줄 수 있는게 뭔지 알면 숙이고 올 수밖에 없겠지.'

자신감을 살짝 되찾은 그는 다른 이들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고 두 사람을 데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들을 안내한 곳은 당연히 자신의 장비들이 놓여진 트레일러 안이었다.

"실은 여러분이 싸우는 모습을 모두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 보는 헌터 여러분들의 싸움에 저 역시 감탄했고, 너무나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제 상부도 마찬가지였고요. 제 제안을 들으시면 분명 흥미로우실 겁니다."

그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한쌍의 남녀에게 자신 있게 자신의 목적을 설명했다.

"그거 참 다행이네. 우리도, 널 만나고 싶었어. 이렇게 은밀한 곳에서."

"...예?"

그때 이브가 입을 열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놀란 그가 무의식적으로 돌아본 순간, 억센 손들이 대처할 수 없는 속도로 그를 향해 덮쳐들었다.

"크으읍!"

피레스는 자신을 덮친 신우와 이브의 손에서 벗어나려 미친듯이 발버둥쳤지만, 이 어둑한 저녁에 모든 신경이 철저한 외부 경계에 향하고 있는 진지 한구석에서 초인들의 손에 붙잡힌 그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확실히 나노머신이라 부를만해. 거슬리네, 하지만 결국 그뿐이지.'

히죽인 이브는 변형시킨 손을 신우에게 붙잡힌 피레스의 복부에 찔러넣고 자신의 세포를 아낌 없이 그 안에 퍼부었다. 피는 단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체내로 침투한 군단의 감염균이 혈관에 가득한 나노머신들과 전쟁을 벌였다.

나노머신들은 자신들이 격퇴한 바 있는 이 외부의 세균체들을 상대로 분전했으나, 지금은 혈관에 조금만 침투했던 과거와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혈관뿐 아니라 피부조직을 비롯한 신체 전체가 감염균의 양분이 되어 사방에서 몰아쳤다.

무엇보다 상대의 성분을 기억하고 있는건 이브도 마찬가지였다.

"꺼억..."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피레스의 전신에 검은 핏줄이 번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전신에 깔렸었던 나노머신들이 모조리 사멸하고, 그 자리를 군단의 감염균들이 대체했을 때.

그는 믿을 수 없단 눈으로 주르륵 주저 앉았다.

'네게 기회를 주지. 진정한 영광을 얻을 기회를. 지금까진 모두가 좋아했거든.'

신경계와 감각기관을 포함 그의 몸 전체를 지배하게 된 이브의 의지가 마찬가지로 장악당한 그의 뇌리에 때려박혔다. 굳이 이런 방식을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브 본인이, 피레스를 잡아먹고 완벽히 연기할 자신은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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