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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127화 (127/254)

127화-새로운 카테고리(5)

지팡이, 하지만 사실상 묵직한 돌기둥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커다랗고 무거운 무기였다.

그것이 전력으로 휘둘러진 그 위력은 묵직한 트럭에 전력으로 치이는 것과 마찬가지.

그리고 지금 그 지팡이가, 헌터들을 향해 땅을 쓸듯이 날아들었다.

'죽는다.'

미처 피하지 못한 이들은 죽음을 직감했다.

믿고 있었던 S급 헌터 제이슨이 마계 정령이라는 불의의 일격을 맞아 나가떨어진 이상 어지간한 고위마족 이상인 저 트롤을 상대할 방법이 없다는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으아악!"

"커흑..."

그리고 터져나온 거센 충격파가 그들을 휩쓸었다.

그들은 땅을 굴렀고 당연히 자신들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살았다?!'

맥스도 그중 한명이었다.

하지만 찡 하고 울리는 이명과 함께 바닥을 구른 그는 슬며시 눈을 떴다. 몸이 욱신거리긴 했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럴수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맥스는 몸을 뒤집었다. 흐릿하게 보이는 것은 휘둘러진 지팡이를 단신으로 막아낸 누군가.

일단 그덕분에 자신들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트롤의 지팡이에 비하면 이쑤시개 수준인 검 한자루 들고 이브는 끝끝내 버티고 섰다.

새하얗던 와이셔츠가 터져나온 피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디딘 땅도 깊게 부숴져 파여버렸다.

전력을 끌어올렸지만 이브도 아직 인간의 몸으로는 수련이 부족했다.

"하아..."

그럼에도 이브는 버티고 있었다. 물론 그 내면이 순수한 분노로 차올랐다는 것을, 지팡이를 막아선 그 행위는 사실 자신을 무시한 트롤에게 지고 싶지 않아서라는 것을 뒷모습만 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알길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신우가 트롤을 마무리 지었다.

계속해서 덤벼들던 흙인형들이 우수수 무너져 내리고 사태를 파악한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브!"

그러나 그 순간, 마찬가지로 환호성을 지르며 슬쩍 몸을 일으켰던 맥스는 신우의 고함소리에 숨을 들이키곤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날렸다. 지금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 중 이브와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은 자신이었으니까.

'...못 버틴다.'

시야가 흐릿하던 이브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마력포를 보고 직감했다. 아직 적응도 덜하고 수련도 덜된 인간의 몸으로는 이미 지금 한계를 맞이한 상태였다.

그 찰나의 때에 몇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 패배감, 분노 등등.

물론 이 몸이 산산히 부숴진다 한들 이브는 죽지 않는다. 세포 하나만 살아있어도 다시 부활할 수 있는 초생물이 그 근본이니까.

하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건 여기서 이 육신이 파괴되면, 신우가 계획한 일들이 전부 무산된다는 것.

이브는 입술을 깨물었다. 감정이 앞서 앞으로 벌어질 일을 계산하지 못한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예상한 부작용이었지만 어째 매번 뼈아픈 결과만 돌아왔다.

"윽.."

그러나 그 순간, 누군가가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를 거칠게 밀쳐버렸다.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을 구른 이브가 휘둥그레 뜬 눈으로 서둘러 삐걱이는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 자신을 뒤에서 공격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어째서..."

그리고 그 광경을 보고서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허탈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녀를 밀쳐버린 대가로 마계 정령이 쏘아낸 마력포를 정통으로 맞은 맥스가 반쯤 타버린 몸으로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 거대한 뇌를 갖고 있으면서도, 이브는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그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쪽은...앞으로 더욱 발전할...인류의 희망..."

맥스는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겨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이브는 오히려 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논리적인 생각은 커녕 지금 마구잡이로 튀는 감정을 다스리는 것도 버거웠다.

인간에게 구해졌다는 것도 충격이었고, 맥스가 자신을 인류의 희망이라 하는 것도 의문이었다.

무엇보다 대체 왜 맥스가 자신을 위해 그런 선택을 내렸는지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이브는 인간들이 말하는 희생이 무엇인지 모르며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으니까.

"살아남아...사람들을...나의..."

그는 잘 움직이지 않는 손을 겨우 움직여 다가온 그녀의 신발에 가져다 대었다.

인간이 허락도 없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대었으나 지금 스턴 상태인 이브는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네가 특전사들을 보면서 이해가지 않는다고 했지. 왜 두려워 하면서도 스스로 선택했느냐고. 나는 네가 인간의 강점으로 꼽은 다양성이 그 이유라고 생각해. 어떤 이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라도 누군가를 지키려하지. 두려워도 하는거야. 설령 질게 뻔해도 몸을 던지고 적과 싸워.'

군체의식에 마계정령을 처리한 신우의 무거운 목소리가 울렸다.

이브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충격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그나마 정신을 차린 몇몇 사람들이 외친 퇴각 명령이 그녀의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

"잘 돌봐주세요. 진짜 강하고, 잘 싸우지만 아직 어리잖아요. 충격이 클거에요."

"...충격이 크긴 크죠. 감사합니다."

의무병이 이브의 팔다리에 붕대를 감아주었다.

나도 이브도 내상이나 치명상은 빠르게 회복했지만 의심을 피하기 위해 모든 상처를 지우지는 않았다.

평소라면 으르렁거렸을 이브는 지금 멍한 얼굴로 내게 기대있었다.

충격이 크단건 다른 사람들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단지 그 충격의 종류는 그들의 예상과는 좀 달랐다.

"인간에게 구해진게 그렇게 충격이야? 그래도 이제 알았을거라 생각할게. 그들은 우리와 함께할 가치가 있다는걸."

결국 나는 조금 직설적으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에게 구해진게 화가 난다는건 맞는 말이지만, 가장 중요한건 그런게 아니야."

시신을 급히 수습하고 퇴각 준비를 서두르는 사람들을 보며 이브는 예상과 달리 조용한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이브는 감정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즉 지금이 진심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지금 이브의 감정에 큰 영향을 받는 군체의식도 굉장히 차분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동안 내가 어리석었어."

"어리석었다니?"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차분하게 이야기하니까 더더욱. 내가 아는 이브라면 지금 분노해서 길길이 날뛰어도 모자를 판인데 말이다.

"과거의 나는 너와 하나가 되면, 사실 그것으로 다 끝일줄 알았어. 그저 모든 것을 함께 하는 것만으로 행복하고 모든 일이 잘 풀릴 줄 알았지. 나의 아버지, 나의 신님, 그리고 군단의 또 다른 주인. 하지만 우리는 가장 큰 것을 놓치고 있었던거야.

우리는 더 빠르고 과격하게 움직여야해. 이제 우리 목표는 하나가 되는게 아니라 더욱더 성장하여 감히 우릴 공격한 놈들을 씹어 삼키는거니까."

"...이브?"

"지금까지의 난 철부지 어린애에 불과했어. 그리고 사랑에 빠진 암컷에 불과했지. 날 이렇게 만든건 다, 당신이 한 짓이야."

순간 소름이 돋았다. 말도 안 나오고 손가락 하나 눈썹 한올 움직이지 않았다.

이브는 지금 내 품에 안겼지만, 남들이 보기엔 내가 이브를 안아주고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지금 나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제 내가 주도해. 지금까지 당신의 의지대로 움직였으니까 이번에는 내 뜻에 따라. 우리는 인간이 아니야. 우리는 군단,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존재지. 그러니 우리의 위장도 지금부터는 조금 달라질거야.'

머릿속에 때려박히는 거대한 의지는 협박이나 다름 없었다.

서열이 동등하다 한들 어차피 군체의식을 컨트롤 할 수 없는 나는 이브의 협력이 없으면 여전히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니까. 나는 놀라서 할말도 전부 잊어버렸다.

내 가슴에 머리를 대었던 이브가 천천히 내 몸을 풀어주었다. 동시에 내 몸의 통제권도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언제나, 지금처럼 있어줄거지?"

"그래, 그러니 걱정하진 마."

"기뻐. 당신이 날 싫어하게 될 줄 알았어."

이브가 안심했다는 듯 활짝 웃었다. 순수한 웃음이었으나, 이제 더 이상 전처럼 천진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예측 범위 내인가?]

그리고 이브의 얼굴 너머 떠오른 글자가 아른거렸다.

알아챌까 내색은 안했지만 맞는 말이었다. 오히려 예측한 상황보다 더 좋다고 할수도 있다.

오직 나에 대한 호감 하나로 움직여주는 이브가 언젠가 주도권을 쥐려 하는건 당연한 것.

내 목표는 그 전까지 최대한 많은 영향력을 심어놓는 것이었다. 나를 제외한 주변 환경에서도.

어머니도 실패하고 강도연도 실패하고, 그동안 우리가 접한 모든 인간들이 실패했다.

하지만 바로 직전 그것을 만난지 며칠도 안된 생판 남이었던 평범한 헌터, 맥스가 해냈다. 그것도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인정하지도 않을거고, 애초에 이해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브의 내면에 분명 오늘 일은 아주 큰 흔적을 남겼다]

내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 보는 관조자가 이브의 생각을 모를리가 없다 생각한다.

거기서 그가 이렇게 인증해 주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이브가 설령 자신의 본성대로 거칠게 움직인다 한들 적어도 내가 걱정하던 최악의 상황만큼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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