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새로운 카테고리(4)
"우리의 가장 큰 장점은 다양한 무기를 갖고 있다는 것. 그 장점을 썩힐 이유가 전혀 없다."
현재 봉인당한 마족들을 깨워내어 강력한 현지 세력을 복구하고, 유닛들과 플레이어들을 끌여들여 마계 연합을 결성한 주축인 전대 마왕 칼타스.
그는 지금도 수십곳에서 벌어지는 전세계적인 전쟁에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
"힘들다는걸 잘 알고 있을 텐데? 라고 하시는군. 우리는 근본적으로 뭉칠 수 없소."
치렁치렁한 장식과 갑주를 걸친 보라색 피부의 오크 하나가 콧김을 뿜었다. 과거였다면 일개 오크가 그와 마주본다는 것 조차 불가능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랐다.
플레이어를 등에 업은 유닛은 마족의 지배력에서 자유로웠으니까.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으나, 나무만 보고 숲은 못보는 것이다. 적을 눈앞에 두고 내분만 일으킬 셈인가? 하지만 그래, 정 서로 힘을 합치는게 싫다면 약간의 변화를 주도록하지."
물론 신경도 쓰지 않은 칼타스는 눈앞에 둥둥 떠 있는 넓직한 나무판을 내려다 보았다.
나무판에 각종 말들이 가득했다. 어디에 어떤 이들이 배치되었는지, 상대하는 적들은 어떤지 등등, 이것은 마계 전체의 상황을 담은 일종의 지도.
용사라는 변수가 등장하기 전까진, 그리고 용사를 감당할 무력을 가진 이에게 마왕자리를 양도하기 전까진 전략만으로 현지인들을 몰아붙이고 정복한게 그였다.
"작은 승리 한번으로 오만해졌군."
실시간으로 제공 받는 정보를 바탕으로 그는 전 지역을 동시에 지휘했다.
전선 한곳에서 날아든 사소한 패전 소식도 그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인간놈들은 결국 다 거기서 거기인 것에 비해 우리는 다르지. 조금만 변화를 줘도, 그들을 흔드는게 가능하지 않느냐."
그는 현재 처한 상황에서 갖게 된 자신들의 장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따로 지시를 내린 것이다.
말 몇개를 바꾸고 재배치한 그 자리는 현재 지구연합군이 최근 승리를 한번 거두고 신을 내서 다음 작전을 진행하려는 바로 그곳이었다.
*
"이럴 수가...트롤?!"
나는 놀랄 새도 없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먼저 놈을 발견한 한 헌터가 경악했다.
기척도 없이 스르륵 나타난 적은 7m에 가까운 커다란 몸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감각까지 피하고 위장하고 있을 수 있던건 분명 저 손가락에 차고 있는 역장 발생기 덕분.
놈들과 엮인 또다른 우주세력, 반군연합의 지원 물품인 그 물건을 이용해 모습도 기척도 지우고 있던 놈이 손에 들고 있던 큼직한 지팡이로 땅을 내리찍었다.
"모두 피해!"
모두가 뒤로 달리기 시작했으나, 지팡이 끝에서부터 퍼져나온 강력한 지진파가 땅을 뒤흔들며 사람들을 바닥에 구르게 만들었다.
"우두귀가 적 아니었어?"
"놈들이 우리 움직임을 알고 무슨 수작을 부렸나봐. 하긴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지. 놈들은 상상 이상으로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으니까."
차분한 이브의 물음에 나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트롤은 멍청해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무시할 수 없는 괴물들이었다. 그 피지컬은 물론, 유닛이 아님에도 마계연합을 통해 유닛들의 힘을 빌려 와 무장하면 그 강력함은 배가 된다.
심지어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난 트롤은 덩치로 보아 보통 트롤도 아니었다.
"이런..."
"모두 자리 잡아!"
단순한 지진파가 끝이 아니었다. 저 엄청난 떡대를 가졌으면서 트롤은 전사가 아니었다.
쩍쩍 비틀리고 갈라진 땅이 흔들리더니 그곳에서 흙과 돌로 이루어진 소환물들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쏴! 쏴!"
"으아아아!"
군인들의 총이 불을 뿜고 몇몇 헌터들은 이능을 쏘아내었다.
하지만 근본이 주술로 움직이는 흙인형에 불과하다.
난사되는 총탄에 마구잡이로 터져나가도 흙인형들은 손에 뾰족한 돌칼을 든채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했다.
"역으로 우리 발을 묶으려는 셈입니다!"
"그럼 놈을 공격해!"
다급한 싸움의 한복판. 나도 이브도 우리에게 달려드는 흙인형들을 검으로 베고 발로 차 부쉈다.
흙인형들의 전투력은 형편없다. 그 목적은 오직 우리 발을 묶어두려는 것 뿐.
그래서 그 답을 찾기 위해, 마침 근처에 있던 총대장 제이슨이 자신의 이능을 터트리며 급한대로 트롤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능력은 얼음. S급 헌터 답게, 그가 뿜어낸 거대한 얼음 기둥은 트롤의 몸보다도 컸다.
원래라면 A급 하위에 속하는 트롤 하나쯤 순살하는건 그에게 어려울 것도 없다.
하지만 지금은 무려 일개 고블린도 불덩이를 던지거나, 탈취한 총기를 난사하는 시대.
더 이상 과거의 기준으로 적을 판단해선 안 된다.
제이슨의 얼음이 산산히 부숴지고 그는 트롤의 주먹에 맞아 곁에 있던 목조 구조물에 쳐박혀 버렸다.
"...트롤 뿐만이 아니었다."
미간을 찌푸린 나는 그것을 보고 탄식했다.
"저거, 마계 정령이지?"
"그래. 그들이 마력이라 부르는 형상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력의 화신."
이브가 트롤의 곁을 떠다니는 반투명한 형체를 가리켰다.
최근에서야 발견된 저 미지의 정령들은 분명 원래는 없던 놈들이었다. 나는 저놈들이 확실히 이 게임의 영향을 받은 누군가의 조작에 의해 탄생한 놈들이라 확신했다.
"우리가 나설때야. 전공을 세워야지."
"...맞아."
이브가 트롤을 가리켰다. 숨겨둔 한수로 자신보다 강한게 뻔한 제이슨을 제압해서 그런지 놈은 어딘가 신나보이는 얼굴로 흩어져 저항하는 헌터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트롤과 다소 떨어져 있던 후방지역에 있던 우리는 놈에게 접근하기 위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위, 위험합니다!"
"...저놈을 막지 않으면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너집니다."
곁에 있던 특전사 한명이 떠나려는 우릴 만류했다. 그 사람 뿐만이 아니다. 다른 이들도 흔들리는 눈으로 우릴 붙잡고 있었다. 분명 굳센 각오를 하고 자원해 왔을 그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가야함을 설명했다.
"한심해."
"그런 소리 하지마 이브. 그럼 저희는 갈테니 최대한 버텨주시길."
나는 그들이 품은 두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브를 끌고 앞으로 내달렸다.
'한심한건 사실이야. 스스로 전장에 뛰어들었으면서 두려움에 빠져 효율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다니.'
'너처럼 쓸모 없는 감정은 가차없이 버려버리는 능력 따윈 없으니까. 하지만 난 그점이 나쁘다곤 생각 안해.'
우리는 흙인형들을 단칼에 베고 부수며 앞으로 돌진했다. 트롤도 우리를 봤다.
나는 그 곁에 있던 검푸른 정령이, 우릴 향해 손을 뻗는걸 보고 땅을 박찼다.
젠장, 역시 몸이 무겁다. 한번 체험해본 상위종의 몸에 비하면 덩치도 작고 꼬리도 없는데도 몸이 무거운 것 같았다.
'베었다.'
정령이 뿜어낸 마력포가 내 머리를 아슬히 스친 사이, 그 옆에서 허공으로 날아오른 이브가 찰나의 순간 참격을 뿜어내 정령을 반으로 베어버렸다.
물리력에 면역인 정령체도 역시 형상력을 직접 칼날의 형태로 뿜어내는 일격엔 저항하지 못한다.
"모, 모두 돌격! 틈이 생겼다!"
맥스를 비롯한 헌터들이 정령이 소멸한 틈을 타 나와 함께 달렸다.
당황한 트롤이 지팡이를 창처럼 휘둘렀다. 위에서 내려찍히는 강력한 공격, 미처 피하지 못한 누군가가 막아보려던 검째로 으깨져버렸다.
"이런 미친...뭐가 이렇게 질겨."
놈의 큰 키덕뿐에 접근하는데 성공해도 눈앞에 보이는게 큼직한 발과 두꺼운 다리 뿐이었다.
내가 놈의 다리를 검으로 길게 베었지만 생채기 수준이었다.
'잡것들 다 치워..! 방해야!'
다급한건 이브도 마찬가지였다.
이브는 내가 놈의 공격을 피하고 다리 사이로 파고든 사이 휘둘러진 지팡이를 박차고 뛰어올라 공중제비를 돌더니 놈의 어깨에 검붉은 기운이 타오르는 검을 끝까지 박아넣었다.
섬광이 터지며 트롤의 어깨 일부분이 펑 하고 터져나갔다.
그러나 이브의 공격도 놈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 트롤의 거친 가죽은 마치 용종의 비늘과 같았다.
형상력에 강한 저항력을 가지며 동시에 방어력도 뛰어나다. 괜히 헌터들이 이능으로 이놈을 잡기 까다로워 한게 아니었다.
"큭...이래서 인간의 몸은!"
나는 떨어진 이브를 받아주었다. 이브는 즉시 분기탱천하여 이를 갈았다.
그러나 여유부릴 틈도 없이, 우린 놈이 휘두르는 지팡이를 피해 다시 한번 몸을 날려야 했다.
"죽여버릴거야."
바닥을 굴러 일어난 이브가 눈을 번득이며 분노를 터트렸다.
일격을 먹었지만 이내 자신감을 회복한 것인지, 트롤이 다시 한번 지팡이를 들어 휘둘렀다.
바닥을 구른 우리를 마치 빗자루로 벌레 치우듯 쓸어버리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벌레취급 받았는데, 이브가 그 성격에 가만히 있을리 없다.
나는 뒤도 안돌아보고 앞으로 뛰었다. 반드시, 놈의 지팡이는 내 몸에 닿지 못할 것이다.
곧 뒤에서 거대한 충격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놈의 움직임도 멈췄다.
당황한 놈이 미처 대비하기 전에,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은 나는 땅을 박차고 뛰어 올라 허벅지 안쪽에 검을 깊숙히 꽂아넣었다.
"우어어어!!"
효과가 있다. 내 몸이 주르륵 미끄러질 때마다 놈의 허벅지도 길게 베여간다.
비틀거리던 놈이 결국 피를 철철 뿜으며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마무리 지어!'
군체의식을 통해 이브의 목소리가 울렸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기 전에, 나는 당황한 놈을 향해 몸을 날렸다. 휘둘러진 주먹을 피하며 검을 치켜세우고 그대로 돌진.
"끄륵."
내 몸만한 얼굴을 가진 놈의 미간에, 검을 손잡이까지 꽂아넣었다.
놈의 숨이 끊어졌다는건 굳이 확신할 필요도 없었다. 총탄을 퍼붓는 특수부대와 싸우던 흙인형들이 술자의 사망으로 모조리 무너져 내렸으니까.
"하아...이브!"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숨을 몰아쉰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살아남은 정령이 끌어모은 마력포를 내 뒷편을 향해 쏘아내는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