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새로운 카테고리(2)
"이제 막 우주문명이 태동하려는 미숙한 행성. 하지만 그 잠재력은 어쩌면 연맹의 어지간한 행성 두셋 이상과 맞먹을 중요도를 가지고 있다. 즉, 반드시 우리가 가져야 한다."
연맹, 정확히는 연맹의 세력 중 하나인 에레스는 그동안 벌인 지구에 대한 조사로 이런 평가를 내렸다.
지구 자체는 사실 평범한 행성이었지만 그곳을 지배하는 지구인들이 가진 잠재력은 은근한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던 그들이 놀랄 정도였으니까.
특히 이능을 사용하는 헌터들은 그들의 입장에선 같은 인류로 봐야 하느냐 마느냐 수준이었다.
이런 엄청난 전력을 잠재적 경쟁자인 연맹 내 다른 세력들과 나눈다는 것은 그들 입장에서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성과를 봤다고..! 우리도, 우리 에레스 인도 그들이 말하는 '내면의 힘'을 배웠단 말인가!"
그리고 마침내 재능있다고 판정받은 그들 중 일부가 수호자연합이 제시한 훈련법에 따라 성과를 보는데 성공했다.
함장은 물론 화면으로 보고 있는 상부까지, 평범한 군인이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어 맨손으로 인간의 수준을 벗어난 힘을 보여주는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
외골격도, 슈트도 없다. 그 어떤 도움도 없이 스스로의 육신을 그렇게 단련한 것이다.
"보이십니까 함장님? 에너지 스캔 결과 그가 힘을 사용할때의 몸에는 적지 않은 에너지가 관측되고 있습니다. 다른것 다 떠나서 이것은, 연맹 내 그 어느 세력도 갖지 못한 성취입니다. 저희 인류가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는!"
"확실히 앞으로 전쟁의 양상이 바뀔 수도 있겠어! 만약, 만약 저런 이들이 소수로 침투해 함선 내부를 휘저어 놓는다면."
연구원은 연구원대로. 군인은 군인대로, 그리고 정치인은 정치인 대로.
그들은 자신들의 관점에 따라 해석을 다르게 했지만 어쨌든 목적은 같았다.
절대 놓쳐서는 안될, 반드시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힘.
"상부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허가했네. 함장! 이 모든 것은 극비리에 진행되어야 하며 그것을 위해 지구의 세력들과 더 긴밀히 접촉하게. 특히 수호자 연합."
상부는 기함을 이끌고 파병을 나간 함장에게 큰 권한을 주며 반드시 일을 성사시키라 주문했다.
마계의 마족들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 수호자 연합, 그리고 지구연합군과의 적극적인 협력 확대는 그것을 위한 일종의 포석이었다.
이용 가치가 있다 수준을 넘어서서 그 중요도가 완전히 올라갔으니까.
*
"아무튼, 다들 잘 준비하길 바랍니다."
총대장 제이슨이 공지를 마치고 헌터들을 해산시켰다.
헌터들은 영 뒤숭숭한 분위기를 뒤로하고 해산했다.
사실 그들에게 연맹이 어쩌고 하는건 신기하긴 해도, 전장에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어때?"
하지만 우리는 조금 달랐다. 연맹의 연구원 피레스가 제이슨과 함께 나가는걸 지켜본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이브에게 다가갔다. 이브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이었다.
"신기해. 일단 효과는 보지 못했어."
"어째서?"
"형상력은 아니야. 근데 그들의 몸 속에, 마치 내 세포와 비슷한 이상한게 많았어."
이브가 자기 손바닥을 내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방금 전, 이브는 무려 피레스와 악수를 나누었다.
앞으로 잘 부탁 한다며 모든 헌터들과 한번씩 하긴 했지만 솔직히 이브가 아무 목적 없이 다른 인간이 자신의 몸에 손대는걸 허락했을리 없다.
"...아쉽게 되었네. 우리 계획을 단숨에 앞당길 수도 있었을텐데."
"몸에 뭔가가 있었다고?"
"응. 세포만큼 작은 무언가가. 하지만 확실해, 살아있는 생물이 아니었어. 놈들은 내가 세균을 투입시키자마자 모여들어 물어뜯고 조각내어 죽였지."
지금 고개를 젓는 이브는 방금전 피레스와 악수하는 그 순간. 그의 손바닥에 눈치채지 못할 미세한 상처를 내고 그곳에 감염균을 투입시켰다.
물론 방어력이 약한 감염균은 과거 마법사들을 상대로 시도했을 때처럼 상대가 어떤 종류든 형상력을 가지고 있다면 심장박동의 파장만으로 죽어버릴 만큼 약하다.
하지만 지금은 혈관에 직접 투입한데다, 연맹의 사람들 중 기계장비의 힘을 빌리지 않고 형상력을 다루는 사람들은 없었으니 나는 이브의 계획이 성공할 줄 알았다.
"아마 나노머신 비슷한 무언가지 않을까."
솔직히 나도 아직 아는게 많지는 않았다. 이브의 증언과 추측으로 때려 맞출 뿐.
어쨌든 기존에 계획한 방법이 어그러진 것도 아니니 나는 그리 중요하진 않다고 생각했다.
"그냥 침착하게 계획대로 가자 이브. 마침 연맹도 헌터들에게 큰 관심을 보이고 있어. 전공을 세우고 지위를 올리면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겠지. 그러면 굳이 고문하고 잡아먹을 필요도 없이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솔직히 답답해. 위장하는건 재미도 없고 인간들에 둘러 쌓여 있는 것도 기분 나빠. 그냥 다 죽이고, 강제로 빼앗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안할거잖아.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으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이브도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 효율적인 길이 있는데, 심지어 나도 이쪽을 원하는데 이브가 굳이 다른 길로 돌아갈리는 없으니까.
"그리고 너무 싫어하진 말고. 관점이나 감정을 조금 바꿔보는게 어때?"
거기다 나는 다른 것도 욕심을 내었다. 이브가 인간에 대한, 지금 상황에 대한 관점을 조금만 바꿔준다면.
차라리 오만하게 깔보는 것이 혐오하고 죽이려드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놈들이 우리가 움직이는걸 모를리가 없지요. 분명 자리를 잡기 전에 공격이 들어올테고."
"그럼 아무 의미가 없겠죠. 쥐어짜낸 본대가 피해를 입으면."
"그래서, 우리가 먼저 놈들의 주둔지를 칠겁니다."
그날 오후 이어진 작전 회의, 한 여성 헌터의 말에 얼굴이 어두워진 제이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순간 모두의 분위기가 딱딱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싸운다는 것은 곧 죽음을 마주해야 한다는 곳.
특히 마족들 중 유독 근접전에 특화된 우두귀와 맞붙어야 하는 이 전장은 한번의 전투마다 매우 처참한 생존률을 자랑하는 지옥 같은 곳이었다.
"저희가...먼저 그놈들을요?"
입을 연 누군가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게다가 방어전과 공격전은 엄연히 차이가 있었다. 이 악물고 싸울수라도 있는 방어전과는 달리, 공격하는 입장에서 사기를 끌어올리기는 어려웠다.
"상부에서도 승인한 작전입니다. 저희 뿐만이 아니라 철저히 교란을 맡을 특수부대도 함께합니다."
제이슨은 분위기를 읽었음에도 내용을 번복하지 않았다. 순간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혹시 이중에 자원해서 선봉대를 맡아주실 사람, 있습니까."
이내 다시 마음을 다잡았는지 그가 비장한 목소리로 고개를 들며 좌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손을 들었다. 이브와 함께. 그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놀란듯 보이는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마다할 이유가 없지.'
그에반해 우리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평온했다. 사실 우리가 싸우는 목적은 전공을 세우는 일이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정말 대단하쇼. 난 이제 막 견습 딱지를 뗀 맥스 비트만이라 하지."
"반갑습니다 비트만씨."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나도 마음을 잡았소. 내가 싸우는 것은 두려움에 떨며 하루하루 살아남을 생각만 하려는게 아니라고."
근육질의 몸을 가진 중년 흑인 사내인 맥스. 그는 막사로 돌아가는 나와 이브를 쫒아오더니 살짝 흥분한 기색을 보이며 말을 쏟아냈다.
그는 실제로 막판에 선봉대에 자원한 사람 중 하나였다. 하는 말부터 표정까지 아무래도 우리에게 감명을 꽤 많이 받은 것 같았다.
"매번 방어만하던 우리가 이번엔 놈들에게, 직접 반격할때지."
"너무 무리하진 마시길. 저희 임무는 놈들을 혼란에 빠트리는 것이니까요. 마치 놈들이 지금까지 게릴라를 벌인 것 처럼."
"암, 그렇고 말고. 내가 너무 흥분했군."
나는 슬며시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이브를 필사적으로 뒤로 숨기며 그와 대화했다.
다행히 흥분상태인 그는 자신의 접근탓에 이브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는건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어쨌든 이런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비록 우리에겐 다른 목적이 있는거지만 그래도 이렇게 남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좋은거니까.
"하지만 좀 아쉽기도 하군. 연맹이 도와준다고는 했지만, 막상 큰 도움은 아닌 것 같아서. 난 그 거대한 우주전함으로 폭격까지 해줄줄 알았소."
"...마족들에게도 적이 있다고 했으니까요."
흥분을 조금 가라앉힌 그가 몸을 돌려 돌아가는 길에 하늘을 바라보곤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우주전함 이야기에 내 소매를 잡고 있던 이브의 감정도 순간 차가워졌다.
확실히, 지금 다방면에서 여러 세상을 접하고 정보를 얻은 우리의 데이터베이스에서도 아직까지 가장 강한 것은 바로 우주함대였고 현재 이브의 목적은 그 힘을 따라잡는데 모든 것이 맞춰져 있었으니까.
그 힘이 지금 이곳에 온다면 어떨까. 내가 듣기로 연맹의 힘은 반군들보다도 크다고 했다.
아무리 마계의 마족들이 수작을 부려도 그 힘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연맹은 마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별거 없는 헌터의 이능에도 말도 안된다느니 역사적 발견이라느니 하며 펄쩍 뛴 그들의 성향상 그냥 넘길리가 없음에도.
'문제가 있는게 분명해. 게이트마저도 만능이 아니야. 그들이 가진 기술 역시, 어딘가 문제가 있는거겠지.'
'아니면 나름의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지도 몰라. 어찌되었든 지금 마계쪽에 유닛을 가진 플레이어가 반군 연합에 소속되어 있는건 사실이니까.'
게이트도 만능이 아니라는 이브의 말에 나도 동의했다.
의외로 간단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아예 그들의 기술로도 마계의 하늘에 전함을 워프시키는건 불가능 하다던가, 아니면 모종의 방해가 있다던가.
플레이어와 유닛이라는 이 판의 조커들이 양측에 한둘인가?
'우주전함급 반칙 무기는 뭐, 어느 한쪽만 쓰는게 아니라면 상관 없지.'
물론 지금 중요한건 이곳 마계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우주전함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이브도 이번 전투 자체도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었다.
강도연이 저쪽 세상에서 인간들을 상대로 펼치며 쌓은 공략전 데이터를 지금 우리가, 마계의 마족들을 상대로 얼마나 효과적인지 써먹을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