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누구나 이면을 갖고 있다(10)
"이놈들..."
깊고 깊은 협곡. 이곳은 한때 신성한 태초의 용이 살았던 곳이자, 전쟁 발발 이후의 마법사들에겐 지옥같은 용군단의 본거지로 여겨지던 곳이었다.
그곳에 놈이 잠들어 있었다.
반란의 주도자, 그리고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
동시에, 저주를 받아 퇴화한 용종들 중에선 태초의 용에 가장 가까운 존재.
전쟁을 일으키고 승리한 지금까지 놈은 이 땅의 지배자였다.
놈이 부리는 수하들은 전세계에 퍼져 모든 것을 멸절시켰다.
오직 파괴하는 그 본성이 놈들의 모든 것이었다.
"전부 모여라. 그리고 움직여라! 저 기괴한 이계의 벌레들을 죽여라!"
하지만 이 파괴자들을 역으로 파괴하고 죽이는 괴물들이 어느 순간 기생충마냥 자신들의 영역을 늘려가고 있었다.
그 면적이 이미 대륙 하나분이 넘어간다. 증식 속도는 예상을 초월하고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다.
그래서 분노한 놈은 결국 자신의 부하들을 모조리 불러 모았다.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어쨌든 엄청난 군세를 모으는데 성공했다.
마법사들과의 전쟁을 펼칠때도 용종들이 이렇게 많이 모인 적은 없었다.
"가라. 가서 감히 이 몸, 안타리스에게 덤비는 저 벌레들을 짓밟아라!"
놈, 안타리스는 그렇게 모은 수하들을 일제히 진격시켰다.
그 드넓은 땅을 뒤흔들고 끝 없는 창공을 가로지르는 용종의 숫자가 수천만에 달한다.
바다에서도 거체를 가진 수룡들이 떼지어 이동했다.
"또, 또 허접한 자기 부하들만 보내는가."
그것을 본 레이나가 히죽 웃었다.
지금 이곳을 향해 선공을 건, 온 세상을 뒤덮을듯한 용종의 군세, 그녀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지금 함께 움직이는 대형종 이상의 병력만 억단위.
용종을 상대하기 위해 덩치를 키운 대형 비행종을 포함하면 그 두배가 넘는다. 말 그대로 이 세상의 소유권을 둔 두 종족의 마지막 싸움.
정면으로 힘싸움을 해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한번 봐야겠다. 비록 저주를 받은 파편이라지만 마법의 근원, 마법의 정수였다는 진룡의 힘을."
두 군세가 충돌하기 전 레이나가 지팡이를 쳐들고 힘을 끌어 올렸다.
이전에 우주함대를 저격했던 100중첩의 마도직사포가 이번엔 하늘이 아닌 정면을 향해 겨누어졌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엄청난 두께와 위력의 붉은색 열선.
"마법...그딴것은 이제 우리에게 통하지 않는다."
과거 마법사들에게서 갈취한 유산인 대형 수정구로 이 상황을 안타리스는 레이나가 시전한 열선의 정체를 알아보고 비웃으며, 동시에 이를 갈았다.
마법에 대해 강력한 저항력을 얻었지만 그덕에 이제 용종들은 절대 마법을 다룰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으니까.
열선이 정확히 선두에 달려오던 지룡의 몸에 적중했다.
"...?"
안타리스는 순간 당황했다.
적중했다. 분명 그게 전부였다. 열선은 그 어떠한 저항도 없이 적중당한 지룡을 소멸시킨 채 앞으로 나아갔다.
그 뒤의 지룡도, 그 뒤도, 그 뒤도 마찬가지였다.
한순간에 떼지어서 뭉쳐 있던 수천마리가 그대로 소멸당했다.
용종의 군세를 그대로 관통한 열선이 땅과 산맥을 횡단하고 관통하고 부수며 정확히 안타리스가 있는 협곡으로 쏘아졌다.
"좌표가 명확한데, 빗나갈리가."
열선은 결국 이곳에선 대산맥에 가로막혀 눈에도 보이지 않는 용의 협곡에 적중했다.
이 모든 광경을 보고 있던 레이나가 한쪽 눈을 감은채 히죽 웃었다.
쏘기 직전 대기권에 띄워놓은 마법사의 눈이 그 거대한 붉은 눈을 정확히 타깃에 찍고 있었으니까.
"놈이 드디어 그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이는군."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곁에 있던 이브가 열선이 명중한 협곡을 보며 중얼거렸다. 오히려 이 상황을 유도한 레이나는 기다렸다는 듯 군단을 움직였다.
열선이 명중하긴 했지만 그곳까지 가느라 대폭 깎인 위력으로 안타리스를 저격하는건 불가능했다.
"감히...!"
하지만 의도대로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건 성공했다. 결국 놈이 버티지 못하고 둥지를 벗어나 날개를 펼쳤다.
몸길이, 날개 길이만 수백미터의 거룡.
놈이 뿜어낸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는게 마법사의 눈을 통하지 않고 이브와 레이나가 있는 현장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떨어트릴 수 있겠어? 유일하게 남았다는 진룡의 파편, 갖고 싶어."
"충분합니다. 반드시, 바치겠습니다."
그러나 놈을 상대해야 하는 레이나는 오히려 놈의 모습을 보고 웃었다.
*
서로를 죽이기 위해 땅과 하늘을 뒤덮은 생물들이 망설임 없이 앞으로 돌진했다.
레이나의 포격에 피해를 입었으나, 용종들은 그정도로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듯 흔들림이 없었다.
"레이나의 두번째 포격은 역시 저놈을 위해서?"
"맞아. 놈이 숨겨둔 수가 없다면 충분할거라고 생각해."
나와 같은 것을 보고 있는 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영화 같이,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화면에 두 군세가 서로 충돌하는게 보였다.
근래 겪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덩치와 덩치가 서로의 피지컬을 무기로 싸우는 모습들.
하지만 나도 이브도 복잡한 포메이션과 전술을 고려해야하는 최근의 전장보다는 오히려 이쪽이 더 익숙했다.
말그대로 우리가 처음부터 겪어왔던 전쟁은 오히려 이런 것이니까.
무엇보다 내 목숨도 걸려있다 한들, 결국은 개입할 수 없는 휴대폰 속 남 이야기였던 과거와 지금은 달랐다.
[정면 힘 싸움은 애초에 끝난 싸움이었다. 군단이 진화하고, 더 강해지는동안 저들이 한것이라곤 서로 뭉친 것 뿐이다. 시간을 준 순간 이미 정해진 승리다]
오랜만에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군단은 말그대로 용종들을 짓밟았다. 개체간 강함, 숫자, 집단 전술등 그 어느것도 우위를 점하지 못한 저 퇴화용종들은 그대로 쓸려나가는 중이었다.
"물론 놈들이 가진 형상력에 대한 방어력이 뛰어난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효율이 좀 별로야. 역시 인간식 무장은 우리와 맞지 않아."
그런데 내가 그렇게 추억에나 빠져 있을 때.
이브는 군단병들을 컨트롤하는 그 순간마저도 여러 곳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 대상은 새롭게 만든 군단병, 아니 새롭게 만든 무장.
창을 쓰던 상위종이 이번엔 창 대신 다른 무기를 들었다.
그리고 몸체에서 눈알 하나가 꿈벅이는 그 무기를 들고, 총신을 한창 싸우고 있는 지룡에게 겨누었다.
그 뒤엔 빛나는 붉은색 무언가를 쏘아냈다. 형상력을 탄환의 형태로 발사하는 신무기.
하지만 그 효과는 이브가 말한것처럼 그다지 임팩트 있어 보이진 않았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어. 그냥 마법으로 때우는건 군체의식에 손해가 있으니."
이브는 그자리에서 지구에서 습득한 총기의 형태를 띈 새로운 무장에 대한 계획은 전부 폐기했다.
"그래도 일단 이기긴 한건가?"
[아직 아니다. 놈이 온다. 놈들의 우두머리, 사실상 그나마 진짜 용이라고 불러줄 유일한 개체가]
전방위적으로 벌어진 전투에서 단숨에 밀린 용종들의 패색이 짙어졌을 때.
놈이 하늘을 가로질러 전장의 하늘에 도착했다.
그 덩치부터 다른 놈들의 몇배는 될법한 괴물이다.
"브레스."
이브가 이미 알고 있던 정보를 중얼거렸다.
놈이 입을 쩍 벌리더니, 순간 끌어올린 엄청난 불길을 지상을 향해 뿜어내었다.
확실히 다른 화룡과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이다. 나는 그 힘의 근원이 형상력임을 눈치챘다.
"고작 그정도인가?"
다만 동시에 레이나가 피식 웃는 모습도 보였다.
그녀가 지팡이를 쳐들고 다시 한번 마법진들을 불러내었다.
그곳에서 뿜어진 열선이 다시 한건 대기의 수증기를 모조리 날려버리며 하늘로 솟았다.
그렇게 뿜어지는 불기둥과 정확히 충돌한 열선은, 불길을 반으로 가르다 못해 역으로 소멸시키며 감속 없이 우주공간으로 뿜어졌다.
"마법은 위대하다! 하찮은 퇴화 용종의 숨결 따위 보다도!"
레이나가 머리부분이 사라진 채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는 적의 시체를 보며 붉어진 얼굴로 희열 가득한 표정을 짓더니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이래서 인간의 자아를 그대로 군체의식에 연결하는건 조금 위험하단거야."
어처구니 없다는 내 표정을 봤거나 내 감정을 알아차렸는지 이브가 먼저 입을 열어 슬금슬금 변명을 했다.
"그냥 조금 놀란 것 뿐이야. 좀 광기어리긴 해도 내 기억상 레이나는 좀 차분한 이미지였거든."
"어쨌든 저쪽 일은 다 끝났네."
그래도 놀란건 잠시였다. 어차피 레이나의 사정은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
다 끝났다는 이브의 말대로, 지금 화면에선 일방적인 학살만 벌어지고 있었다.
솔직히 이렇게 보고 있는게 의미가 있나 싶었다. 용종들은 유닛도 아니라서 골드도 안주는데.
"수련이라도 할까. 이브 넌 안 따라 올거지?"
"...수련, 굳이 인간놈들이랑 해야 해?"
그동안 시간을 쪼개쓰는게 익숙해진 나는 축소시킨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때 이브가 내 손을 붙잡았다.
"그럼 원한다면 나랑 같이..."
"같이 하는건 뭐든 좋아. 하지만 인간놈들 옆에서 그 역겨운 시선을 받으면서 하기는 싫어."
나는 함께 가자고 입을 떼었으나 이브는 고개를 저었다.
살짝 당황했다. 여긴 아직 피해를 수습중인 전장이고, 우리 둘이 개인적으로 날뛸만한 공간은 없었으니까.
"여기 말고, 우리의 본진에서."
"뭐?"
"네 육체 그곳에도 만들어 줄 수 있어."
그러나 이어지는 이브의 대답은 내 상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나처럼 해. 이곳에도 육체를 두고, 그곳에도 육체를 두고 움직여. 그럼 어디서든 같이 움직일 수 있어."
감지했을 내 망설임과 혼란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이브가 눈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