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누구나 이면을 갖고 있다(3)
"다른 선택을 해도 돼."
"의미 없어. 적어도 지금은,"
"하..."
이른 새벽, 동생 강도연은 떠날 준비를 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게이트를 넘어, 군단의 본진이 있는 레드리움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것이다.
"위장해서 얻을 수 있는 거짓된 일상마저도 이대로 흘러간다면 영원할 수 없으니까. 이건 내가 선택한 일이야. 나는 군단의 서브마인드로서 군단을 위해, 우리 모두를 위해 일해. 그게 이곳에서 평범한 여고생을 연기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야."
녀석의 의지는 굳건했다. 당장 어머니와 작별인사까지 하고 온 참이다. 그 감정이 어떤지는 지금 나도 잘 안다.
"게이트를 열어주지."
이브가 방 한구석에 게이트를 열었다.
게이트 너머 보이는 황량하고 건조한 풍경과, 그곳을 장악하고 있는 군단의 둥지가 보였다.
"몸이나 조심해."
"어차피 서로 다 알 수 있잖아? 오빠랑 나랑도 하나야."
피식 웃은 강도연이 게이트를 넘어버렸다. 그 직후 게이트는 순식간에 닫혀버렸고, 방안에는 순간 적막 밖에 남지 않았다.
"강도연은 이미 우리와 하나, 걱정할 이유가 없어."
"그 애는 이미 너무 변했어. 내가 걱정하는건 그런게 아니야."
"글쎄, 강도연의 사고방식은 아직도 인간에 가까워."
이브는 당연하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나는 다르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점차 무뎌지고 담담해 지는 것이 꼭 좋은 모습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살아남고, 승리해라]
"..."
눈앞에 글자가 아른거렸다. 하나가 되어, 나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이브마저도 이 글자는 볼 수 없었다.
이브가 설명한 내 영혼에 인질삼아 심어진 걸림돌. 분명 그 영향일 것이다.
"도연이는...갔니?"
"너무 걱정 마세요. 말했듯이 멀쩡하게 다시 올테니까."
"옆에 있는 그 아이도, 도연이 친구지? 혹시...같은 일을 하니?"
집을 나서려는 순간, 멍하니 거실에 앉아있던 어머니가 이브를 보며 말을 건넸다.
"...네."
나는 이브를 얌전히 있게 만들고 힘겹게 대답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와, 이브의 손을 덥석 잡았다.
놀란 나와는 달리 이브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감정의 동요도 전혀 없었다.
단지 내가 가만히 있으라 말한대로 가만히 있을 뿐.
"몸 조심하렴."
이브를 방금 전 이곳을 떠난 자신의 딸과 같이 생각한 어머니는 진심어린 걱정을 담았다.
강도연은 그저 둘러댔을 뿐이지만 사실 어머니는 어느정도 직감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찌보면 부모가 보일 수 있는 당연한 모습이기도 했다.
'역시 이해할 수 없어. 난 이 여자의 소중한 존재가 아니야.'
'...알아주기만 하면 돼. 우리 엄마가 믿을 수 있는 네 편이란거.'
'내 편.'
그나마 납득시키는데 성공한 것인지, 이브는 어머니가 끝내 와락 껴안는 순간에도 얌전히 있어주었다.
그대로 집을 나온 우리는 다시 차에 올라탔다.
분위기가 살짝 어색했다. 전적으로 나 때문이었다. 이래선 안 된다. 나는 고개를 저어 정신을 붙잡았다.
더 이상 이렇게 유약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이브와 하나가 되었으니 나도 어느정도는 이브처럼 사고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가자. 지부는 그리 멀지 않아."
마음을 정리하고 차를 내가 소속된 수호자 연합의 지부로 출발시켰다.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였으니 이제 다른 곳에 신경쓸 틈이 없었다.
"정보가 많긴 하지만 99%는 쓰레기 뿐이야."
차가 도로를 가로지르는 사이, 이브는 곁에 앉아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이브는 인터넷 속 대부분의 정보를 '기억할 가치도, 쓸모도 없음'이라고 판단했다.
하긴 지금의 이브라면 충분히 그럴만 했다.
지구인들이 만들어낸 지구인들에 관한 정보 대부분은 이브에겐 이제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현대에 나타난 다양한 무술 유파들이라."
물론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정보도 당연히 있었지만.
"도착했어."
지부는 사람들이 북적이는 시내 한복판에 있었다.
지금 사실상 전시임에도, 일반적인 전시상황은 아니다 보니 경제활동은 계속된다.
그래서 그런지 거리를 분주히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이 그리 밝지는 않았다.
애초에 하루가 멀다하고 국내와 해외에서 전쟁 소식이 보도되는 시대였다.
"저기 기다리고 있네."
"저 인간이?"
건물 부지의 주차장에 주차하는 중, 건물 밖에 나와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비록 키는 그리 크지 않아도 단단한 몸과 거친 인상을 가진 팀장 백종훈이었다.
이브는 그를 경계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모든 인간을 경계했다.
"반갑구나. 난 수호자연합 서울지부 1팀장 백종훈이라고 한단다."
"..."
우리에게 다가온 백종훈이 곧장 이브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이브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오히려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려던걸 내가 가까으로 말렸다.
그가 무안한지 슬쩍 손을 내렸다. 그러더니 나를 잡아끌고 속삭였다.
"내가 뭐 잘못했냐?"
"전에 말씀드렸죠. 어...사연이 좀 있는 애라고."
"다른건 다 그렇다 쳐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좀 그래. 무력을 다루는 일이야. 치료부터 해야지."
"그냥 남들을 좀 꺼리는 것 뿐이에요. 제가 잘 다루겠습니다."
순간 식겁했다. 치료? 치료하겠다고 이브를 정신병원에 넣는 그 순간, 지구는 그즉시 또 다른 대형 세력과 전쟁을 벌여야 할 것이다.
"...좋아. 일단, 일단은 실력부터 보자. 솔직히 궁금하긴 해. 그 짧은 영상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까."
다행히 그는 내 예상대로, 충분히 이상하고 수상함에도 어찌어찌 잘 넘겨주었다.
"가자."
"...확실히 네 말은 잘 듣는거 같은데. 현장에서 구출한 애라고? 하긴."
내가 손짓하니 이브가 슬며시 다가왔다.
백종훈은 그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측정하는 방법이야 간단하지 뭐. 너처럼 무투파, 맞지?"
"그렇죠."
우리는 지하에 있는 훈련장으로 직행했다.
말그대로 실전에 가까운 훈련을 위해 특수하게 만들어진 공간으로, 상당히 튼튼히 지어진 넓직한 곳이다.
'무투파가 뭐지?'
'그건 아직 정보가 없었나? 그냥 간단하게, 상태창이나 이능이 아닌 다른 형태로 형상력을 발휘하는 종류를 뜻해.'
백종훈이 몇가지를 준비하는 사이 나는 이브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수호자 연합과 함께 등장한 무투파는 그 숫자를 기존의 헌터들의 수백 수천배 이상으로 불려나갔다.
상태창의 가호가 없어도, 수련만으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 물론 그것에도 재능이 필요하지만 어쨌든 싸우고 싶은 힘을 열망하던 이들에겐 한줄기 빛이고 기적이었다.
"이건 어떠냐."
그때 준비를 마친 백종훈이 마네킹 하나를 가져왔다. 평범한 마네킹이 아니었다.
걸치고 있는 푸른색 슈트에, 순간 내 미간이 꿈틀거렸다.
사실 지금까지 이미 여러번 봤지만 그럼에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내 동생을 해치고 끝내 군단에게 보내야만 살릴 수 있던 산송장으로 만든게 바로 저 슈트였다.
연맹의 전신 강화 나노슈트.
분명 그 연맹 소속 플레이어가 지구에 대한 정보를 흘려, 연맹의 전함이 워프해 온 것이다.
워프해온 우주세력의 거대한 우주전함? 지금도 지구 각국은 따로 연맹에 줄을 대려 애쓰고 있다.
그덕에 그 플레이어의 유닛들이 슈트를 입고 벌였던 깽판은 탐색과정의 사고라며 유야무야 넘어갔다. 대낮에 사람이 처참히 죽고 다쳤는데도.
'감히...'
속으로 끓은 내 분노에, 이브가 반응했다. 눈을 번득인 이브가 슈트를 노려보았다.
"기준점으로 쓸만한게 이만한게 없지. 무투파는 이 슈트에 얼마나 큰 타격을 주냐에 따라서 급이 갈려. 막말로 우리보다 몇배는 잘난 그들이 왜 우리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협상하고 있겠냐. 그들도 무투파의 수련법이 탐나는거야."
우리 사정을 모르는 백종훈은 슈트를 내려놓고 계속해서 떠들었다.
나는 속으로 그에게 사과했다. 저 슈트, 그래도 꽤 귀중한 물건이긴 한데 과연 자가수복이 가능할지?
"마음껏 때려 보..."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이브가 땅을 박차고 주먹을 날렸다.
터져나온 충격파에 바닥이 갈라지며 깨져가고, 곁에 서 있던 내가 주르륵 밀릴 정도.
에너지 쉴드는 물론 그 몸체까지 산산히 부숴져 바닥을 뒹구는 슈트 조각들에, 바닥에 넘어진 그가 휘둥그레 뜬 눈을 꿈벅거렸다.
아무래도 상황파악이 좀 늦는 모양이었다,
"팀장님. 다음 발령지 말인데, 바로 일할 생각이거든요. 혹시 저희 둘이서 마계로 갈 수 있을까요."
나는 그가 정신차리기 전에 웃으며 다음 계획을 밀어 붙였다.
"이름은 정말 위장할 생각 없어?"
"위장에 영향이 없다면, 절대. 신성하고 소중한 이름이야. 나를 정의하는 유일한 단어지."
"...그냥 외국인 혼혈이라고 하지 뭐."
대강의 절차는 끝났다. 산산히 박살난 슈트를 보고 각혈한 백종훈은 시험을 더 보겠다며 자신의 이능인 바람을 움직여 직접 덤벼들었다.
그리고 검을 든 이브에게 그자리에서 철저하게 박살났다. 이능의 도움 없이 A급 헌터를 박살내는 순수 무투파는 아직 흔치 않다.
그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그는 약해. 깊이도 경험도 적지."
"네가, 아니 우리가 특이한거야. 팀장님은 충분히 경력있는 현역 헌터고."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이브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군단의 무서운 점은 모든 개체가 습득한 지식과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이브의 경험은 고작 몇 달 짜리지만, 그 몇 달 사이 겪은 전쟁과, 상대해 쓰러트린 적들은 셀 수 없다.
그 모든 경험을 가진 이브의 실력은 이미 완전하다 못해 경지에 이른 투사에 가까웠다.
"어쨌든, 우리 계획의 첫단추는 성공적으로 끝난거 같네."
나는 이브에게 붉은 배지와 작은 카드 하나를 내밀었다.
이브가 그것을 천천히 받아서, 내가 외투에 단것처럼 배지를 자신의 와이셔츠에 달았다.
카드는 일종의 면허증이었다. 헌터처럼, 무기를 소지할 수 있으며 유사시 그것을 사용해도 된다는 허가증.
"봐. 이제 너도 이 사회의 일원이 되었어."
피식 웃은 나는 휴대폰으로 방금 촬영한 이브의 프로필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름은 이브, 나이는 17세 추정, 출신지는 불명으로 기억을 잃은 채 구출됨. 사용 무기는 검.
그게 이브의 새로운 신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