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각자의 목적(10)
군단과 하나 되는 것. 그동안 막연한 상상만 해왔다. 그 거대한 군체의식과 연결된다는, 내가 절대 짐작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으니까.
'으, 으아아악!'
완벽한 개조를 가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키스를 통해 넘겨받은 이브의 만능세포가 내 몸에서 증식해가며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고통과 이질감이 몸을 덮쳐왔다.
비명도 못지르고 그것을 견뎌내야 했다. 그나마 이를 악물고 버틸 수 있게 버팀목이 되준 것은, 나보다 6살이나 어린 강도연 그 애는 이런 고통을 전부터 수차례나 겪으며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는 것.
결국 고통이 전부 가시고 확장된 감각들이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게 끝?'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예상 외로 정상적인 내 상태에 당황했다.
그 이후에는 예상했던 강렬한 정신적 충격도 없었고 내 뇌를 헤집는 막대하고 거대한 정보도 없었다.
'강도연과 같아. 평범한 인간의 자아로는 받아들일 수 없기에, 정보를 일부분 차단했어. 아주 약간 더 보여준 레이나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알지?'
'그래. 다행이네.'
군단의 충실한 서브마인드로 새롭게 태어난 대신 어딘가 꼬여서 감정에 큰 편차가 생겨버린 레이나의 경우를 알고 있기에 나는 이브의 배려가 고마웠다.
'원한다면,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려도 돼. 그러면 군체의식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겠지.'
'아니. 지금은 아니야.'
이브는 살짝 아쉬워 보였지만 나는 지금이면 충분하다. 군단의 장점을 모두 가져오고, 동시에 한때 인간이었던 나 스스로를 잃지 않고 의도대로 행동할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서열도 이브보다 낮지 않았다. 비록 군단을 움직이려면 결국 군체의식 자체인 이브의 협력이 있어야 하지만 적어도 이브의 말 한마디에 복종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
이브를 믿었던대로, 말 그대로 하나가 되었다.
으직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의식 잃은 날 감싸고 고치 역할을 했던 신목이 부숴지며 점차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빛에 손을 넣어 틈을 벌리고 밖으로 나왔다.
내 몸의 외견은 걸친 옷까지 포함해 들어갈 때와 달라진 점은 전혀 없었다. 달라진 점은 체내에 자리잡은 군단의 만능세포들.
특정 상황이 되면 이 세포들은 언제든지 내 힘이 되어 움직일 수 있었다.
"느껴지지? 심장에."
"그래. 군단의 동력기관."
기다리고 있던 이브가 내 가슴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형상력을 머금고 심장 속에 숨겨진 군단의 동력기관. 이 작은 광석 하나만으로도, 나는 기존보다 훨씬 강해졌다.
"근데 왜 이브가 교복을 입고 있는거지? 그것도 인간의 몸으로."
그제서야 내 시선이 어딘가 위화감이 드는 부분을 발견했다.
마찬가지로 오랜만에 인간의 몸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아있던 강도연이 혀를 차는 모습이 보였다.
"어때. 쓸만하지? 이렇게 보니까 이브도 평범한 여자애 같잖아?"
"...그래. 확실히."
동생이 군체의식을 통해 내 머릿속에 방금 전 있었던 일에 대한 기억을 전송해 주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오묘한 감각에 이질감과 소름이 동시에 돋았다.
그렇다고 징징댈 수는 없었다. 저녀석은 이전부터 이런 감각을, 그것도 자잘한 배려도 없이 고스란히 받았었다는 뜻이니까.
"그럼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자. 게이트를 닫아 이브."
"이제 무엇을 할거지?"
"어...집에 가는거?"
이브가 내 말대로 게이트를 닫았다. 상영관이 다시 어둠속에 잠겼으나, 나를 포함한 세쌍의 붉은 눈들이 은은히 빛나며 어둠을 꿰뚫고 있었다.
"집?"
"이브 너는 신분부터 만들자."
나는 다시 계획을 점검했다. 과거라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지금이 어떤 세상인가.
우주전함이 워프해오고 전세계가 마계와 전쟁을 벌이며 온갖 이세계인들이 포탈이니 게이트니 하는 것들을 열고 찾아오는 혼돈의 세상이었다.
"기억을 잃은 여자애 신분 하나 만드는건 이제 쉽지."
"???"
나는 멀뚱멀뚱 나를 보고 있는 이브의 손을 잡아 끌며 휴대폰을 꺼냈다.
"허, 헌터님? 그 학생들은?!"
"방금 구출한 아이들입니다. 지금 데려갈테니 신경쓰지 마시길!"
동시에 건물 입구를 지키고 있던 아까 그 군인들을 지나치며 자연스럽게 자리를 벗어났다.
이브는 내게 손을 잡혀 그대로 딸려 오면서도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심지어 강도연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래. 이런 풍경...비록 여기저기 부숴지고 통제되고 있지만.'
"나도 알아. 일단은 어서 가자."
내 시선을 알아챈 강도연이 군체의식으로 자신도 모르게 변명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지금 이곳은 이목이 많이 끌리는 곳이다. 최대한 빨리 돌아온 나는 애들을 내 차에 태웠다.
"오빠 차 샀어?!"
"산게 아니라 받은거야. 좀 조용히 해봐."
운전석에 올라탄 내가 전화를 건 것은 명목상 내 상사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 오빠가 속한 수호자연합이 대체 뭔데?"
"첫 시작은 단순한 집단 중 하나였지만, 이제는 좀 다르지."
나는 통화음이 가는 휴대폰을 귀에 댄 상태로 처음으로 군체의식을 이용해 내가 아는 정보를 이브와 강도연에게 공유했다.
둘은 그것을 동시에 수신했는지 표정이 살짝 변했다.
"이제는 지구를 대표하는, 오직 지구의 인류를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집단. 그 수장과 핵심은 게임에 속한 유닛과 플레이어들이지만, 그들은 게임의 승패보다 동족과 이 땅의 수호를 더 우선시한다. 현재 그 세력은 지구 대부분에 뻗쳐있으며 힘없는 플레이어와 유닛들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이브가 차가운 목소리로 수호자 연합에 대한 정보를 읊었다. 나는 그 목소리 안에 든 차가운 냉소를 읽어냈다.
"대체 승패보다 중요한게 이 우주에 어디 있지? 대체 왜 비효율을 감수하고 도태될 쓰레기들을 지키려 하는거야?"
"...다양한 관점이 있는거야 이브. 아무튼 우리와는 상관 없는 일이잖아? 우린 이대로 활동하면서 우리가 얻을 것만 얻으면 되는거야. 적어도 전시라는 지금 상황에서 이쪽 일에서는 수호자 연합의 일원이란게 의외로 커. 예 팀장님. 접니다."
가능하면 좋겠지만, 이브에게 인간의 가치관이나 시각을 주입하려는 시도는 애초에 때려쳤다.
단지 내가 우리를 위한 '위장'의 일환이라고 말한다면 싫어해도 억지로 따라는 줄 것이라고 생각할 뿐.근거도 그저 이브의 호감도가 전부였으니 이브의 가치관을 두고 벌이는 기묘한 주도권 싸움은 이제 시작이었다.
"철수 명령이 사실이었군요. 그럼 저 지금 집에 좀 들려도 됩니까? 급한일이 있어서."
"...집에 못가겠는데."
어차피 여기서 할 일도 다 끝났으니 집에 가는건 문제가 없다. 실제로 통화하던 상사도 흔쾌히 허가했다.
문제는 상부의 허가가 아니라 현장에서 터졌다.
나는 전화를 끊고, 강도연이 중얼거리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게이트!"
"또 마물, 아니 마족놈들의 습격이다!"
"고위 마족이다!"
사이렌이 울리며 철수 준비를 하던 군인들이 허겁지겁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몸이 옆에 둔 검을 움켜쥐며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너희는 여기 있..."
"나도, 함께 가."
그러나 서둘러 차에서 내리는 내 팔을 이브가 붙잡았다.
"언제나 함께 하겠다고 했어."
"...좋아. 대신 도연이 넌 여기 있어. 지금은 얼굴 알려지면 큰일이니까."
이브와 나는 동등하다. 강압적으로 굴지 못하는건 나도 마찬가지다.
이브의 의지가 너무 강력해서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이것도 예상한 일이었기도 했다.
결국 나는 이브와 함께 차를 박차고 나왔다.
군인들이 급히 화력을 집중시키는 게이트에서는 마계에서도 지겹게 본 놀, 코볼트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적이 있었다.
보라빛 피부에 대머리, 근육질의 몸에 손에 든 커다란 전투도끼까지.
"@#₩&!!!"
우리가 이제 마족, 그것도 고위 마족이라고 부르는 마계의 토착종으로 과거 이브가 군단을 이끌고 와 상대했었던 마수군단의 우두머리와 같다.
갑작스레 나타나서, 마계에 소속을 둔 유닛들이 지구를 상대하기 위해 연합한 마계 연합의 주축이 된 저놈들은 기동력과 강력한 힘을 이용해 게릴라를 펼치며 단신으로 군대를 갈아엎어 버리는 골치 아픈 놈들이었다.
그래서 이제 저런 놈들을 놈들을 저격하는 것이 헌터들의 임무가 되었다.
"헌터님?! 모두 사격 중지! 조준 사격!"
"강신우 헌터님이...근데 옆은 누구지?"
나와 이브는 함께, 그리고 단숨에 땅을 박차며 전장을 가로질렀다. 연결된 군체의식을 이용한 첫 전투.
하지만 나도 이브도 조금의 흔들림도 동요도 없었다.
우리는 하나였다.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생각하고, 서로의 힘을 공유했다.
동시에 우리가 가진 힘이 공명했다.
이브가 내게 전수하고, 지난 날 단 한순간도 쉬지 않은 전투법.
그 완성형인 합격술이 지금 처음으로 온전한 모습이 되어 시전되었다.
'마무리, 내가 해.'
나는 코볼트들이 쏜 마탄을 검으로 막아내고 동시에 놈들을 베어내어 자신이 마무리 짓겠다는 이브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인간의 육신이 어색하지도 않은지, 자신의 무기인 검도 들지 않은 이브는 검을 들고 덤벼들던 놀 전사들을 각각 단 한번의 주먹질로 무기째로 터트려 버렸다.
바람을 찢는 그 풍압만으로 아스팔트가 부숴지는 위력.
우리는 그냥 앞만보고 돌진했으며 한몸처럼 움직이는 서로의 등은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채 몇 초 되지 않아 몇 십의 부하들이 진격하고 있던 길이 훤히 뚫릴 것은 예상치 못했는지 놈이 당황하는게 보였다.
땅을 크게 부수며 박차고 단숨에 몇 미터를 뛰어오른 이브가 몸을 회전시키더니 당황한 놈을 향해 휘두른 발차기를 내리찍었다.
"끄아악..."
운동화를 신은 작은 발과 부딪힌 도끼가 산산히 부숴지며 충격파가 터져나왔다. 덕분에 이브의 자세가 허공에서 무너졌다.
이브의 상반신만한 전투도끼를 휘둘러 막아보려던 놈이 비명을 지르더니 터져버린 팔에서 피분수를 뿜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놈이 반격할 기회는 없었다. 내가 휘두른 검에서 뿜어진 참격이 놈의 몸을 위아래 반으로 갈라버렸으니까.
이것 역시 나 혼자였다면, 그리고 과거의 나였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위력이다.
'행복해.'
이 믿기지 않는 광경에도, 나는 굉장히 단순한 이브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나와 함께 싸워서 행복하다는 그 감정을.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 이거 망했나?"
그리고 벙찐 표정의 군인들을 보며 현실로 돌아왔다.
데뷔전이여도 너무 화려하게 데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