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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111화 (111/254)

111화-각자의 목적(9)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금 당장의 이야기일 뿐. 마치 네가 한때는 손바닥 만한 버섯과 사투를 벌였던 것과 같아."

나도 목소리가 떨렸다.

만나자마자 울려버리는게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이건 필요한 훈육이자 명백한 약자인 내 나름의 발버둥이었다.

그리고...분명 우리 모두에게 득이 될 방법이라고도 확신했다.

"우리는 늘 도전자의 입장이었고 아직도 그래."

충격을 줬으니 이제 달래야 할 때였다. 이러다 이브가 강제로 힘을 행사하면 나만 큰일나니까.

다행히 이브는 내 이야기에 여전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내가 말하는 대로만 하면, 문제 없이 강해질 수 있을거야. 그리고 그렇게 되면 다시 승리자가 될 수 있겠지."

"대체 그 방법이 뭔데?"

"아까도 말했듯 배우는거지."

나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맹목적인 신뢰를 보내던 이브의 눈에 내가 또 상처주는 말을 할까 묘한 경계심이 깃들었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감정에 호소할 생각은 일찌감치 접었다.

지금 이 자리는 논리와 증거와 계산으로 설득하고 발표하여 납득시키는 자리였다.

"현재 지구는 온갖 관심이 쏠리고 있어. 그 원인은 연맹이지. 정보를 입수한 그들이 거대한 전함을 이끌고 나타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다른 이세계의 존재들도 하나 둘 나타나고 있거든."

"그럼 그들을..."

"지금처럼 전쟁을 벌일 수는 없잖아. 하지만 흡수하고 모방하는 방법은 전쟁만 있는게 아니지."

나는 차분히 계획을 설명했다. 이 계획이 성공하면 이브를 내 뜻대로, 아니 우리가 함께 움직이는게 가능할 것이다.

"위장하고, 정체를 숨겨서 훔쳐내고 엿보는거야. 이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을까?"

"지금 나보고...인간 행세를 하며 다니란거야?"

"그래. 나와 함께 다니면서. 그 대신 네 본체는 그렇게 얻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저 우주 너머에서 더더욱 강해져, 끝내 적들을 몰아내고 잡아먹을 수 있게 되겠지."

"..."

충격을 받았는지 이브가 다시 한번 말이 없어졌다. 하지만 그 감정은 전과 달리 지극히 평온하다.

나는 지금 이브가 나름의 계산중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기다렸다. 내가 아는 이브라면 이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원래부터 구상하고 있던 계획이었지만, 자신이 최강이라며 오만해진 이브를 보다 확실히 납득시킬 계기가 필요했다.

그렇기에 이브의 콧대를 눌러준 우주 함대의 공격은 내게는 천운이었다. 벽을 아주 크게 느낀 이브를 설득하기 더 쉬워졌으니까.

"...어쨌든 우리는 계속 함께 있는거지?"

"으응?"

다만 정작 이브가 주목하고 집중하던 것은 내 예상과 살짝 달랐다.

"그렇다면 역시 합리적인 방법 같아."

히죽 웃은 이브가 내게 다시 다가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나를 안았다.

"그것을 위해, 하나가 되자."

"...그래. 그 이후에는 내가 위장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알려줄게."

번득이는 붉은 눈이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 눈에 담긴 열망은 여전했다.

피식 웃은 나는 이브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제 내게 남은건 없다.

이렇게 어렵사리 기회를 얻어냈으니 앞으로는 이브를 잘 교육시키는 것만 남았다.

각오를 마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브가 말하는 자기와 하나가 된다라는게 어떤 의미인지 사실 이미 여러번 봤었으니까.

아마 이대로 점액 웅덩이로 끌려가 산채로 분해되겠지. 그리고 새로운 몸을 짜맞추고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

그러나 그 직후, 내 입술에 갑작스럽게 덮쳐든 그 부드러운 감촉에 기겁해서 눈을 떴을 때.

나는 놀라 기절할뻔했다.

'들려...?'

하지만 마음속에 공명하는 조심스런 울림이 들려 온 순간. 나는 이 입맞춤이 단순한 행위가 아님을 눈치챘다.

이브의 얼굴을 잡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겠으나 이제는 완전히 믿을 수밖에 없다.

느낄 수 있다. 지금 나는 이브와 하나가 되고 있었다.

이순간 만큼은 다른 것은 생각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급격히 확장되는 감각이 내 정신을 뒤흔들었다.

마치 무중력의 공간에 던져진 것처럼, 분명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데도 중심을 잃고 둥둥 떠있는 기분이었다.

'이따가 보자.'

내 의식에 선명하게 연결된 새로운 의식이 끼어들어 자신의 의지를 전했다.

동시에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버틸 재간도 없이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렸다.

*

"..."

이브가 인간을 무시하고 멸시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직 단 한사람을 위해서, 인간의 애정표현을 배우고 그걸 그대로 실현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만큼 거침없고 솔직하다.

이브와 함께 온 강도연은 구석에 등을 돌리고 쭈그려 앉아 귀를 막았다.

아무리 지금 상황이 특수하다지만, 단순한 키스가 아니라지만 그 광경을 차마 자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괜히 이브에게 이상한걸 잔뜩 알려준 레이나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이, 이제 다 된거야?"

"그래. 차단한 감각을 풀어줄까?"

"...아니, 그건 싫어."

다 되었다는 소리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분명 서로 안은 한쌍의 남녀가 있었던 자리에 지금은 이브만 서 있었다.

신우가 있던 자리에 자리한건 어느새 자라난 검은 신목 하나가 뿌리와 가지를 바닥과 천장에 뻗으며 자라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그가 들어있었다. 지금 이건 진득한 키스를 통해 체내에 침투시킨 군단의 세포를 전신으로 퍼지게 만드는 과정 중 하나였다.

"계획을 많이 바꿨네?"

"그가 말한대로 인간 행세를 하기 위해서는 굳이 과격한 개조가 필요하진 않았어. 이것만으로 충분하니 그가 최대한 덜 고통스러운 방법을 택한 것 뿐이야."

게이트 너머의 둥지에서 에너지를 끌어 온 이브가 웃으며 껴안은 검은 나무 줄기를 쓰다듬었다.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염원을 이루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 신우는 군단과 하나되어 죽음에서도 자유롭고 인간의 한계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정작 강도연은 이브가 지금까지 일말의 배려도 없이 자신의 몸을 뜯어고치던 것을 떠올리곤 조용히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불완전해."

"그야 그렇겠지? 네가 오빠를 나처럼 완벽하게 개조하지는 않았잖아."

"그런게 아니야. 다른건 상관없지만 너나 레이나와는 달리 그의 영혼을 온전히 내것으로 삼을 수가 없었어.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걸림돌이 존재하니까. 게다가 그 걸림돌은 언제라도 터질 수 있는 폭탄과 같아."

그러나 금방 얼굴을 굳힌 이브가 고개를 저었다.

하나가 되는 과정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방해는 온전한 합일에 옥의 티가 되어 이브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들고 있었다.

[당연한 것 아닌가. 그의 영혼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이 게임의 것이다. 온전히 해방될 길은 단 하나, 게임의 최종 승자가 되는 것 뿐]

"그 승자가 된다는건,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란 뜻인가?"

[그렇지]

"그렇다면 상관 없어. 그와 하나가 된 지금, 내가 질리가 없으니까."

기다렸다는 듯 울리는 목소리에 이브는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었다. 지금까지는 조금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게임'이, 처음으로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은 셈이니까.

[나도 제발 그러길 바라지. 승자가 되어서, 너희 모두 행복하기를]

정작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평온했다.

"...그나저나, 이제 어쩌지?"

"그가 다시 태어나려면 시간이 좀 걸려."

"좋아. 그럼 예습을 좀 해볼까."

시간이 좀 비었다. 그러자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이해한 강도연이 직접 나섰다.

"예습?"

"어쨌든 너는 앞으로 계속 '위장'을 해야 하잖아. 우선 모습부터 좀 바꾸자."

강도연의 몸이 뒤틀리며 변이를 일으켰다.

몸의 구조 자체가 뒤바뀌며 덮은 검은 갑각과 거친 가죽이 다시 만능세포로 변하며 몸 안으로 스르륵 사라지더니 뽀얀 속살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속살 위에 새로운 갑옷을 입었다.

단지 그 갑옷은 전과는 달리, 부드러운 천으로 된 옷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당장 생각나는게 이것 뿐이었어. 옷이라는게 너무 어색해. 고작 몇 달 되었을 뿐인데."

그녀는 실로 오랜만에 입게 된 자신의 교복을 만지작거리며 피식 웃었다.

자리에는 어느새 검은 갑주를 두른 괴물이 아닌 평범한 여학생이 서 있게 되었다.

"소화기관, 생식기관...인간의 몸은 너무 비효율적이야. 방어력도 약하고."

"하지만 임무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걸. 너도 한번 바꿔 봐. 인간의 옷으로."

"인간의 옷..."

미간을 찌푸린 이브도 마지못해 자신의 몸을 변형시켜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강도연은 자신도 모르게 그 모습에 주목했다.

이브가 처음으로 자신의 몸을 완전한 인간의 형태로 변형시키는 순간이었다.

"불편해. 비효율적이야. 미개해."

얼굴은 그대로이지만 이제는 몸마저도 괴물이 아닌 긴 흑발을 흩날리는 아름다운 인간 소녀가 된 이브가 드레스의 긴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투덜거렸다.

애초에 갖고 있는 데이터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가장 고급스런 옷을 입었지만 그 화려한 귀부인의 드레스는 지구에선 시상식에서나 입을법한 옷이었다.

"...그냥 지금은 나랑 똑같은걸 입는게 나을 것 같아."

결국 강도연은 이브가 자신과 똑같은 형태의 교복을 입는걸 묘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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