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110화 (110/254)

110화-각자의 목적(8)

"이제 필요한건 시간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이주를 모두 끝낸 이브가 무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는게 보였다. 방해 없이 확장을 계속하면서도 전과는 달리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낄 수 없는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아무리 에너지를 뽑아 써도 이브는 근본적으로 창조하는 존재라기 보다는 모방하고 습득하는 존재였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고할 것들과 많은 경험이 필요했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행성에 갇혀 있는건 이브에게 끔찍한 형벌이나 다름 없었다. 이래서야 복수도 불가능했다.

"분명, 방법이 있다고 했어. 나를 도와줄 방법이."

그렇기에 이브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정확히는 화면을 보고 있는 나를. 뭔가 느끼는 것이라도 있는지 나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이브에게 전해. 나는 준비가 되었으니, 만나고 싶다면 오라고."

"하지만 우리가 만나서 하나가 되기에는 준비가 필요해."

내가 전한 말을 들은 이브가 게이트를 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아도스 학회에게서 얻은 마법, 게이트는 내가 생각하는 것 처럼 만능은 아니었다.

게이트를 원하는 곳에 열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착점의 좌표, 혹은 연결의 흔적이 필요했다.

마법사들이 레드리움에서 전혀 모르는 곳으로 이주할 수 있었던건 순전히 수많은 시도 끝에 우연찮게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마법에는 무지한 내가 지구의 좌표를 어떻게 알려줘야 하냐는거지."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야. 이 수정구에, 내가 가르쳐주는 대로 하면 되니까."

이브가 내게 사람 머리통만한 수정구 하나를 제물 기능을 이용해 전송해 주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챙겼다. 척 봐도 수상해 보이는 물건이었지만 다행히 지금은 그리 바쁜 타이밍은 아니었다.

"아. 일어나셨습니까 헌터님."

"아무일도 없었죠?"

"다행히 그렇습니다."

방을 나오니 경계를 서고 있던 군인이 내게 경례했다. 그의 방탄모에 병장 딱지가 붙어있었다.

솔직히 이런 상황은 아직도 얼떨떨했다.

유닛소환권을 사용한 이브와의 첫 만남 이후.

이브가 본격적으로 현지의 인간, 유닛들과 전투를 벌이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을 때.

나 역시 활발히 활동하고, 싸웠고, 강해졌다.

지금 이곳도 한때는 대한민국의 번화한 도시였지만 지금은 전장이었다. 내가 속했던 지역의 연합군이 결국 패퇴한 이후 적들의 역습이 시작되었다.

약탈이 주 목적이었던 전과는 다른 양상의, 철저한 전쟁이.

"저희도 주워 들은 거긴 한데, 아무래도 전선이 옮겨질 것이란 말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기갑 부대도 철수 준비를 하고 있군요."

그때 그 병장이 저 앞을 손으로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다만 거대한 초생물인 이브와는 달리, 나는 아직까지도 흔하게 널린 일개 개인일 뿐이었다.

내가 강해지고 움직이는 것 보다도 이 거대한 세상이 변하고 발전하는게 더 빨랐다.

유닛, 플레이어, 그리고 게임.

세상을 한순간에 혼돈으로 몰아넣은 그것들은 용케 아직까지도 정체를 숨기며 동시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게임에 속한 이들은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고 서로 상호작용을 이어가며 계속해서 강해지고,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라도 외부 세력이 개입할 수 있다는 것도 확인했고."

[저런 이들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경계서는 군인들을 피해 자리를 옮긴 내가 멍하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저 먼 하늘 위해 쥐죽은 듯 정지해 있는 거대한 함선 하나.

그 형태는 군단의 둥지를 공격했던 우주 전함의 모습과 조금 달랐다.

오히려 더 크고, 더 강해보이는 모습이었다.

아득히 먼 우주에서 단숨에 태양계로 워프해온 '연맹'의 함선. 분명 연맹에 속한 플레이어나 유닛이 지구에 대한 정보를 흘린 것이다.

저것이 도착한지 채 일주일이 되지 않았다. 처음 우주전함이 나타났을 때 지구인들이 받았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했다.

"...걸림돌이지만, 우리에겐 기회기도 하지."

내가 이브에게 자신 있게 이야기한 기회와 도움은 저것을 의미했다.

연맹의 전함을 시작으로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는 이세계의 존재들과 접할 수 있는건 이곳이 딱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단지 그 접함이라는게 이브가 생각한 무차별한 정복과 전쟁은 아니겠지만.

"자, 잠깐! 여기는 민간인 출입 금지..."

"멍청아! 수호자 연합의 헌터시다!"

여명이 밝아올 때쯤 나는 도시를 가로질러 지금은 사람들을 대피시켜 인적 없는 빌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경계를 서던 이등병이 내게 총구를 겨누었지만 바로 곁에 있던 선임에게 방탄모를 맞고 총을 내렸다.

"잠시 조사할 일이 있어 왔습니다."

"드, 들어가시죠."

선임자의 눈이 내 외투에 붙어 있던 배지로 향했다.

마계에서의 전쟁으로 그 입지를 급격히 키우고, 지금은 사실상 세계정부에 준하는 수준의 영향력을 가진 수호자 연합 소속이라는게 이럴땐 참 편했다.

"저, 그때 정말 감사했습니다 강신우 헌터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아닙니다."

그 선임병은 지나치는 내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인사를 전했다.

나는 그냥 웃으며 답해주었다.

솔직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마 언젠가 함께 싸운 적 있는 군인인 것 같지만, 지금까지 나와 함께 싸운 군인들이 워낙 많아서.

[에너지를 마음껏 방출할 수 있는 비밀스런 공간이 필요하다]

"패쇄된 주상복합빌딩의 지하 영화관이면 충분하지."

나는 이브가 요구한대로 적합한 장소를 찾았다.

방음설비도 잘 되어있는 영화관이라면 혹시 모를 일이 터졌을 때도 대비할 수 있을 테니까.

가방을 열어, 전송 받은 수정구를 꺼내 상영관의 스크린 앞에 놓았다.

이것만으로 사실상 절반은 끝난 것이었다.

남은건 이 수정구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 뿐.

거기서 추가로 꺼낸 것이 이브가 꾸준히 준 군단의 동력기관을 소형화한 광석.

나는 반대손에 쥔 그 광석을 이용, 내제된 에너지를 뽑아내어 수정구에 옮기기 시작했다.

한개, 두개...그렇게 계속해서 에너지를 들이부었다. 이렇게 하면 이브가 이곳의 좌표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되고 있는거 맞아? 점점 뜨거워지고, 터질 것 같이 밝게 빛나는데?! 야!"

그러나 일단 알려준 대로 하기는 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다급해졌다.

계속 상황을 중계해 줘야 할 녀석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혹시 일이 틀어졌나 싶어 심장이 철렁한 그 순간에.

"아니. 계획대로 잘 되었어."

내 뒤에서 많이 들어 본 목소리가 들렸다.

동생의 목소리를 베이스로, 하지만 분명히 다른 아름다운 그 목소리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인 것은 게이트 안에서 바람에 흩날리고 있는 길고 짙은 흑발이었다.

*

분명 서로 초면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의 만남 이후로도 많은 일이 있어서 그런가, 나는 순간 이브를 보고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강한 충격과 함께 내 몸이 쿵 하고 바닥에 넘어졌다.

그때처럼, 내 품으로 돌진하듯 뛰어든 이브가 어느새 내 위에 올라탄채 붉은 눈을 번득이며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최근 좀 짜증나는 일이 있었지만, 어쨌든 줄곧 오늘만을 기다렸어."

"...그래. 나도."

"그래서 기분이 많이 나빴지만 이제는 괜찮아진 것 같아."

이브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차마 밀어낼 수가 없었다.

전과는 다른 긴장감이 내 몸을 휘감고 있었으니까.

"하나가 되자."

이브는 역시나 그 이야기를 꺼냈다.

"역시 하나가 되면, 서로의 불완전함을 채울 수 있어."

"나도 동의하지만 우선 이야기를 좀 들어봐."

쓰게 웃은 나는 천천히 이브를 밀어냈다.

다행히 이브는 그 행위에 의미를 두지 않고 순순히 몸을 비켜주었다.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 결국 나도 한명의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맞아. 그러니 하나가 되어, 내가 네 열등한 인간의 유전자를 지워줄게."

"...그 인간에게 패퇴한건 너야 이브."

산채로 굳어버린다는게 어떤 것인지, 나는 내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이브는 싱글거리던 그 상태 그대로 동상이 되어 버렸다.

슈퍼컴 따위는 가볍게 뛰어넘는 지능과 연산력을 가진 초생물인 주제에 순간적으로 지금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고 버퍼링이 걸린 것이다.

동시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지금 이브가 느끼고 있는 혼란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나는 네가, 많이 부족하고 더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추가타를 날렸다.

굳어버린 이브의 얼굴에 일그러짐이라는 균열이, 상황파악을 못하고 혼란스럽던 감정엔 분노라는 감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나한테 그런 말을."

"냉정하게 생각해 이브. 너답게. 그게 현실이야. 감정에 짓눌려 단순해지지 않으려고 서브마인드들을 만든 것 아니야?"

이브의 분노가 처음으로 나를 향했으나 나는 정면으로 부딪혔다.

이건 이브가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었으니까.

"마침 지금 지구에는, 그리고 지구와 연결된 마계에는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많은게 있지. 그것들을 이용하면 우릴 공격했던 인간들을 이길 수 있을거고."

"그, 그럼...내가 지구를 먹어치우면 되는거야?"

"내 말을 뭘로 들은거야 이브. 먹어치우다니? 지금의 넌, 그들과 싸워서 절대 못이긴다니까?"

나는 웃으며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이브의 표정이 끝내 무너져 내렸다.만약 이브가 눈물 흘리는게 가능했다면 아마 눈물을 펑펑 흘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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