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109화 (109/254)

109화-각자의 목적(7)

[살아남은 적들의 전함은 이쪽의 반격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행성의 권역 밖으로 벗어난 것으로 추정되나, 그것이 위기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분명 목적을 가지고 찾아온 것일 테니까. 역시 연맹인가? 아니면 다른 세력?"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직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았다. 저 먼 우주에, 지구보다도 훨씬 발달한 기술을 가진 인간종이 존재한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연맹이라 불리는 그들 역시 이미 오래 전 여러 세력으로 갈라진지 오래라고 했다.

"...아무튼, 이브는 이제 어떻게 대응하겠다고 하지?"

[너도 알겠지만 지금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다]

이브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동시에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당장 나도 방금 전 뿜어진 이브의 분노에 영향을 받았을 정도였으니까.

지금 당장 우주 밖 공격에 대응할 병종등을 생산하여 대응하는건 불가능했다. 즉, 선택의 시간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들은 지금의 이브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선택일 것이고.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해."

다만 나는 오히려 지금이 잘된거라 생각했다. 이브가 굴욕적인 판정패를 당했지만, 이번 일은 어찌보면 내 계획을 도울 수 있는 강력한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콧대가 너무 높아졌어. 하지만 그 콧대가 제대로 부숴지고 자신이 아직 부족하단걸 알면 분명 그것을 더 갈구하고 원할 것이고, 원하는게 있다면 대화하기도 더 편할테니까."

[이브가 네 뜻대로 움직여 줄거라 생각하나]

"난 이브가 원하는 것을 줄 것이고, 마찬가지로 이브 역시 내가 원하는 것을 줘야만 해. 우리 사이에 누가 더 우월한가 따위는 없어. 우리 둘다 아직 한참 부족해."

나를 존중하고 좋아할 뿐 내면에 나보다 자기가 더 강하고 똑똑하다는걸 잘 알고 있는 이브는 나와 하나가 되어 나를 자신의 기준대로 '교정'할 생각이 만연해 보였다.

내 입장에서 그런 식의 합일은 절대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애초에 나는 일개 인간인 나 자신도 태어난지 몇개월 차인 이브도 믿지 않았다.

방심하지 말라는 관조자의 말처럼 이 우주는 너무나 넓고,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테니까.

아마 이제는 이브도 그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둘다 계속 배워야 한다고. 이브에게 내 말을 전해. 저 우주 밖의 인간들이 제대로 된 함대를 이끌고 오기 전에 기반을 통째로 들어서 그 행성에서 옮기는게 좋겠어."

나는 처음으로, 이브에게 내 의견대로 움직일 것을 요구했다.

"기반을 옮긴다고...? 나, 나보고 지금 도망치란 뜻이야?"

"전략적 후퇴는 지금까지 네가 잘 써먹던 전략이잖아."

"그건..."

내 말을 전해들은 이브가 전전긍긍하더니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 감정의 편린은 내게도 전해졌다.

"새롭게 기반으로 삼을 곳은 이곳과 게이트가 연결된 레드리움. 그곳의 용종들을 청소하고 우리의 새로운 거점으로 삼자. 그 이후 다시 이곳에 돌아오면 되는거야."

"다시 돌아온다..."

물론 말했듯이 이건 전략적 후퇴일 뿐이다. 이브는 당연하겠지만 나조차도 완전히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나를 만나러 와. 장담하는데, 나와 하나되면 네게 그 위기를 벗어날 방법을 알려 줄 수 있을지도 몰라."

"...정말?"

"나는 늘 너를 도와줬어. 네가 일개 세포덩어리던 순간부터. 지금 마계와 연결되어 있는 지구의 상황이 많이 복잡하거든, 분명 얻을게 있을거야.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줄 방법들이."

게다가 내게는 거부하기 힘들 당근도 있었다. 도움을 주겠다는 내 말에 이브의 감정이 변하는게 느껴졌다.

"이사를 마치고 나면 보자."

"알았어."

다시 기운을 차린 이브가 군단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한숨을 쉬었다. 진짜 애 키우기 힘들다. 게다가 평범한 사춘기와는 비교도 안 되니.

[이브가 게이트를 열고, 동시에 닫았다]

이브는 그 즉시 레드리움으로 가는 게이트를 새롭게 열었다. 이미 연결이 되어 있어 쉽다던데 솔직히 그런 원리는 들어도 모른다.

동시에 메나스 앞에 열려 있던 게이트는 닫아버렸다. 용종들이 당황하는게 보였지만 지금은 신경쓸 틈이 없었다.

이브는 병력들을 집어 넣어 게이트 안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 새롭게 둥지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용종들이 모든 것을 파괴하고 살아있는 모든 것을 절멸시킨 땅이다. 놈들은 에너지 소모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열이나 지진등 자연의 에너지를 일부 흡수해 형상력의 동력으로 삼아 버티고 있었지]

"...먹을게 없는건 아쉽지만 우리에게 그게 중요한건 아니지."

한때 인간들이 살았다던 레드리움은 생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붉은 암석과 흙만 가득한 척박한 세상이었다.

물론 이브 역시 용종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곳에서도 에너지를 뽑아낼 방법은 갖추고 있었다.

레드리움에 처음으로 뿌리내린 둥지는, 게이트 너머에 연결된 둥지에서 무한정 공급되는 에너지를 바탕으로 그 면적을 미친듯이 늘려가기 시작했다.

검고 뒤틀린 군단의 세계수가 분당 몇미터씩 자라는 모습은 무슨 배속을 돌리는 것 같았다.

[기존의 둥지는 실시간으로 에너지를 잃고 사멸하고, 새로운 세상에 뻗어지는 둥지는 그 면적을 급격히 늘려간다]

"이주가 끝나는 예상 시간은?"

"3일. 3일이면 충분."

근처 암반지대의 한 동굴. 그곳에 자신의 뇌를 새롭게 만든 이브가 내 질문에 검은 갑옷으로 두르고 신목을 배치해 만든 둥지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며 답했다.

단 3일이면 군단은 통째로 다른 세상으로 이주하는데 성공하는 것이었다.

"레이나.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적들을 죽여라."

이브는 동시에 레이나에게 병력을 딸려주며 레드리움에 남은 모든 용종을 죽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당연히 그 명령을 받아들인 레이나는 용종의 데이터를 적용한 대형종들을 이끌고 감지되는 모든 생명체를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브의 기분은 어딘가 어두워 보였다.

내가 그것마저 뭐라 할 수는 없었다. 저 강렬한 감정이 곧 이브의 성장과 진화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동력이었으니까.

"예상되는 에너지 수급 효율 58%. 다른 방법이 필요해."

그때 무언가를 계산한 이브가 힘을 움직였다.

잡아먹을 식생이 없는 척박한 레드리움에서 기존과 같은 방법, 같은 면적의 둥지에서 생산할 수 있는 에너지는 기존의 절반 수준이라고 했다.

그에 대응하여 새로운 에너지 수급 체제를 개발하겠다는 소리였다.

[어차피 필요한 일이었다. 유기체를 잡아먹고 얻을 수 있는 에너지는 한계가 있다. 거점둥지에나 어울리는 방법이다]

"맞아. 새로운 방법, 더 효율적인 방법이 필요하지."

이브의 시선이 저 하늘 위의 태양으로, 그리고 땅밑으로 향했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은 아직 이 행성 전체를 덮어버리지 못해 최대 효율을 뽑을 수 없는 태양보다는, 작열하는 용암이 잔뜩 있는 이 행성의 땅 속이었다.

지열은 지구에서도 이용하는 에너지다. 근데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이용하려는거지?

"어차피 행성은, 버리고 다른 곳을 다시 먹으면 되니까."

[신목의 뿌리에 에너지를 집중한다. 형상력을 들이부어 강화한 뿌리가 단숨에 단단한 지각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행성을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겠다는 말에 나는 순간 충격을 받아 말문이 막혔다.

환경 따위 생각할리 없는 이브가 선택한 방법은 결국 나무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단지 신목의 뿌리 하나하나의 굵기가 수백미터 단위이고, 그 뿌리에 투자되는 에너지가 뿌리를 보호하며 암반을 두부 부수듯 부수며 파고든다는게 다를 뿐.

"땅 내부의 열에너지를 신목의 힘을 이용해 치환하여 이용한다."

이런 행위가 지금도 넓어지고 있는 둥지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화면을 확대했다. 마침 둥지 근처에 있던 화산 하나가 존재했다.

그 화산에 살던 화룡 무리를 죽이고 둥지를 뻗친 이브는 그곳에서도 땅 속을 파고들었다.

화산 답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뜨거운 마그마가 자리하고 있었다.

신목의 뿌리는 형상력으로 된 방어막을 두른채 그 마그마에 풍덩하고 빠져버렸다.

"마그마에 직접 담근 효율은 방어막 때문에 대폭 깎여서 60%...정도. 더 올릴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이브가 만족스럽다는 듯 계산을 끝냈다. 남은건 시간을 들여, 확장하는 것 뿐이었다.

"그나저나 등록된건 어떻게 하지? 우리는 통째로 다른 세상으로 이사했는데. 용종들은 유닛이 아니었어. 그리고 놈들이 다른 모든 생물들을 절멸시킨 이 레드리움엔 유닛이 존재할 수도 없고. 이브가 가진 '승자'의 권리는 그대로 유지되는건가?"

[아무리 이사다닌다 한들 등록은 바꿀 수 없다. 이브의 소속은 여전히 그대로이며 한세상의 승자로 등록된 것도 변함 없다. 현재 진행도 챕터 5, 레벨은 8. 그리고 다음 단계로 나가기 위해서는 이제 다른 조건들이 필요하다]

"..다른 조건?"

[게임이 다음 페이즈로 넘어가기 위한 준비]

유닛인지 플레이언지 모를 외부의 존재에게 한방 먹기는 했지만 이브는 어쨌든 한 세상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유닛간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덕에 챕터도 넘어가고 내 레벨도 올랐지만 눈에 띄는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애초에 게임은 유닛간의 전쟁이라는 한가지 결과를 위해 유도하는 역할이 전부니까.

"내가 주는 표본이나 하사품을 수신할 장소는 바꿀 수 있잖아."

[그정도는 가능하다. 단지 명심해야 할 것은, 떠나왔다고 신경을 끄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상관없을걸. 이브에게는 거의 먹을 수 있었던 그 땅을 되찾는게 굉장히 중요할테니까."

지금은 한발자국 물러났지만 따져보면 척박하되 더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을 뿐이다.

이곳에서 힘을 기른 이브가 다시금 쳐들어갈 곳은 뻔했다.

*

"이럴수가..."

"말도 안 돼. 놈들의 둥지가 전부 사라졌다."

이브가 이주를 결정하고 그 계획을 시도한 그 순간.

자세한 사정은 전혀 모르는 현지인 생존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정찰을 나왔다.

마법사의 눈을 사용한 마법사들은 폐허가 된 도시를 보고 단체로 굳어버렸다.

분명 징그러운 둥지로 덮여있어야 할 도시가 지금은 다시 그 어떤 생명도 없는 폐허로 변해있었다.

단 하룻밤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야. 저길 봐라!"

당황하던 그들의 시선이 저 위로 향했다.

마법사들은 단체로 말을 잊고 몸을 떨었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짙은 구름을 가로지르며 나타나는 것은, 그들의 비공정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함선이었다.

그런 거함이 수척.

그리고 수십척의 크고 작은 함선들이 이어서 모습을 드러내며 일제히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어, 어서 의원님께 알려라. 어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한 마법사가 소리치며 동료들을 다그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