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각자의 목적(2)
"이런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한때 번성하던 메나스 인근의 위성도시. 이제는 검붉은 육벽과 비틀린 신목으로 뒤덮인 군단의 거점둥지가 되어버린 이곳에, 메나스에서 철군한 레이나가 도착했다.
그녀 혼자 온 것은 아니었다.
메나스에서 얻은 모든 '전리품'을, 그녀가 끌고 이곳으로 왔다.
"으읍! 읍!"
신목을 움직인 레이나의 앞에, 누군가 발목을 잡아채여 거꾸로 매달린 채 배달되었다.
사로잡힌 아도스 학회의 마법사. 일부는 아군의 손에 죽었지만 모든 이들이 목숨보다 사명을 귀하게 여기던건 아니었다.
이미 감염균에 감염된 그는 이제 자기 의지로는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는 신세였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심지어 미쳐버리는 것도 완전히 자신의 손을 떠난 처절한 신세.
가면을 벗은 레이나의 얼굴을 본 그의 눈이 격하게 흔들렸다.
레이나를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무자비하고 잔혹한 학살을 벌이던 가면 속 얼굴이, 아직 앳됨이 남아있는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이라 놀란 것 뿐.
"위대하신 분께서, 내가 이 일을 맡는걸 허락하시며 네게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뽑아내라 하셨다."
레이나는 입을 열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물론 이것이 '대화'가 아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그저 묻는 질문에 답할 수만 있을 뿐.
"끄읍...끄아아악!"
레이나는 우선 그에게 전신의 신경이 마구 꼬이고 긁히는 가장 강한 고통을 한번 안겨주었다.
눈을 부릅뜬 그가 마음껏 비명을 내질렀다.
이브가 정보를 캐내기 위해 포로를 고문할때는 비명조차 차단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대신 전권을 받은 그녀가 비명을 지르게 만든 이유는 하나였다.
'이런 미친.'
블레이클의 학회장을 비롯, 잡혀 온 포로들 모두 그 광경을 보고 듣고 있었다.
자신들과 같은 처지인 동료가 내지르는 그 끔찍한 비명, 그리고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그 절망.
인간 내면의 심리를 꿰뚫는 공포가 그들의 감정을 뒤흔들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은 오직 하나. 모든 것을 토해내는 것 뿐."
그 절망에서 유일한 탈출구가 보인다면, 아무리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어도 편해지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명심해. 절대 레이나의 행동이 정상적인 건 아니야."
"정상적인게 아니다라. 그 정상의 기준이 무엇이지?"
"...뭐?"
레이나가 포로들을 잔혹히 고문하고 있을때.
이브는 강도연과 대면하고 있었다.
현재 레이나와의 연결은 차단하여, 레이나는 지금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모르는 상태였다.
"지금 레이나는 효과적으로 인간들을 고문하여, 정보와 증언을 뽑아내고 있어. 내가 주도할 때보다 빠르게. 그게 잘못된 것이라고?"
"너, 널 거역하려는게 아니야. 당연히 그게 맞아. 그, 우리 기준으로는."
흠칫한 강도연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레이나의 사정은 전부 알고 있지만, 레이나의 영향으로 이브의 가치관이 그쪽으로 물드는 것은 본인은 물론 신우도 바라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문제는 이브에게 그걸 그대로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강도연은 혹시라도 자신의 언행 때문에 신우가 설계한 이브의 '교육'에 문제가 생기지 않길 바랬다.
"단지 확실한건 레이나가 가진 인간 혐오를 확대하지 말라는것 뿐이야. 착한 사람도...많아."
"인간이 만든 인간의 선악개념 따위는 전혀 관심 없어. 결국은 인간이란 종이 만들어낸, 사회와 생존을 위한 자기 위안일 뿐. 내게는 너무나 하찮고 쓰잘데기 없어."
이브가 비웃음을 흘렸다.
"뭐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안타깝게도 오빠는 그것에 관심이 많으니까."
"...맞아. 그렇지."
그러나 강도연이 신우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이브의 감정이 순간 차가워졌다.
'그는, 내가 '착한 인간'이 되길 원하는건가?'
이브가 육성이 아닌 군체의식으로 말을 걸었다. 지금 신우가 부재중이란 말은 없었으니까.
'그건 아닐거야. 단지 널 위해서 그러는 것 뿐이지. 인간이 되는걸 원하는게 아니라, 괴물이 되는걸 원치 않는것 뿐.'
'괴물?'
강도연은 침착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이브는 괴물이라는 단어에는 반응했다.
'그는 내게 소중한 존재야. 그런 그에게 내가 괴물일리가 없어.'
'...그렇겠지. 오빠의 목숨에 우리 목숨도 달렸으니.'
'하지만 그가 잘못된 선택으로 위험해지는걸 보고 있을 수도 없어. 그 선택이 설령 인간의 기준으로는 옳은 선택이라 해도.'
'그게 지금의 네 본심이구나.'
강도연은 섬짓한 느낌에 흠칫했다. 분명 신우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하지만 지금의 이브는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강아지도 아니었고, 자신의 힘이 어느정도인지에 대해서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왜? 왜 두려움을 품지? 오히려 기뻐해야 하는것 아닌가? 그도 나와 하나되기를 바랬어. 레이나도 우리와 하나된게 기쁘다고 했단 말이야. 더 완전해지고, 영광스럽다고 했어.'
'오빠는 자신이 나나 레이나처럼 되는건 절대 바라지 않을거야.'
'그것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굳이 이해한다면 나는 당연히 그에게 최고의 서열을 줄거야. 나와 동등한.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는 늘 나와 이야기 하고 나와 함께 하고 나를 납득시켜야 해. 그가 인간의 사고방식을 버릴때까지.'
이브가 말 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강도연은 반박할 수 없었다. 누가 봐도 가진게 더 많은 것은 이브였으며 플레이어와 유닛의 관계가 정해진 것도 아니었다.
'...우리 오빠는 할 수 있을거야.'
결국 그녀는 자신의 오빠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한 행성 전체를 실시간으로 잠식하는 이 거대한 존재를 잘 다룰 수 있다고.
'나는 그를 사랑해.'
'글쎄.'
강도연은 굳이 이브의 감정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순간순간 느낄 수 있는 이브의 감정은 그 단어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설령 그 감정이 인간의 상식과는 좀 뒤틀려 있다 한들.
[그는 지금 바쁘고, 덕분에 화면도 잠시 꺼두고 있다. 굳이 몸 사릴 필요는 없다]
"건방진 도마뱀들이 감히 내 땅을 더럽히고, 망치고 있어."
이브가 먼곳을 보며 짜증을 냈다. 지금 이브가 정찰병의 눈으로 보고 있는 곳에는 게이트에서 튀어나오고 있는 레드리움 용종들이 있었다.
놈들은 퇴화하여 생산적인 활동은 없이 오직 파괴와 학살만을 위해 움직이는 생물체가 되어버렸다.
푸르는 산천초목은 놈들의 발에 짓밟히고 불에 타버려 황무지가 되어가고,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명들은 죽임당했다.
"놈들은 이제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성장을 위협하는 적이 되었어. 그러니 지금부터 우리의 적을 죽인다."
이브가 강도연의 눈앞에 몇가지를 보여주었다.
지난 전투에서 얻은 용종들의 몸을 철저히 해체분석하여 획득한 결과물들이었다.
"이것들이 뭐지?"
"그래도 승리자가 되어 한 세상을 정복했던 이들답게 흥미로운 것들이 몇가지 있었어. 그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이제 그것들은 우리의 것이 되었으니 이용해야지."
강도연의 눈앞에 도착한 것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투박하게 생긴 반투명한 검붉은 광석이었고, 또 하나는 거친 암석 비늘을 닯은 갑각 조각이었다.
"레이나가 말한 용에 대한 전설. 인간들에게 마법을 전수한 레드리움 태고의 용은 아주 강력한 심장을 갖고 있었지. 그리고 형상력의 동력이었을 그 심장은 비록 퇴화한 후손들일지라도 갖고 있어."
이브가 어른 주먹만한 그것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강도연의 가슴에 툭 가져다 대었다.
"놈들의 유산을 이용해 효율을 4배 이상 끌어올린 우리의, 그리고 네 새로운 심장이 될 물건이야."
"...그럼 저건."
"놈들의 비늘에는 형상력을 약화시켜 흡수하고 저장하거나 방출하는 기능이 있었어. 알면 알수록 탐이나는 그 힘도, 이제 우리의 것이 되었고."
한숨을 쉰 강도연이 고개를 떨궜다. 대충 앞으로 벌어질 일이 예상이 갔기 때문이었다.
"대체 몸을 몇번이나 개조당하는거야? 이젠 내가 변신로봇인것 같잖아."
"강해지는게 싫다고?"
"...아냐."
그녀는 투덜거렸으나 다시 고개를 저었다. 결국 이것은 자신의 선택이었다.
무엇보다 용종을 분석하여 얻은 그들의 힘은 그들이 한 세상을 통째로 초토화시키고 극대화시켜 얻은 힘이다.
즉 적용하는데 기존에 비해서 엄청난 에너지가 든다는 뜻.
덕분에 이브는 인간들을 절멸시키고 시작할 둥지 확장계획을 더 서둘러야했다.
"그래서 강해진 병사들을 기존과 비슷한 규모로 양산하는건 불가능. 병력 규모는 지금의 1할 이하로 줄일거야."
"그렇게 하면 그 용들을 막을 수 없잖아."
"상관없어. 그 멍청한 짐승들 따위,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 할지도 않을 테니까."
전과 똑같다. 인간들을 쓸어버릴 대규모 물량을 갖추기 전까지 둥지를 늘리며 적은 병력으로 버텼다.
지금도 그 퇴화 용종들이 실로 오랜만에 분출하는 본인들의 본성에 취해 늦장을 부리는 사이, 군단은 더욱더 몸집을 키워 더욱 강해진 힘으로 놈들을 쓸어버릴 계획이었다.
"출격해, 군단의 첫번째 이빨. 가서 인간놈들이 수작을 부리기 전에 쓸어버려."
"...알았어."
다시 한번 극심한 고통과 함께 몸 전체를 새로 짜맞춘 강도연이 한숨을 쉬며 날개를 펼쳤다.
하늘로 치솟는 그 속도가 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순식간에 소리를 찢으며 고고도까지 상승한 강도연이, 지상에서 함께 움직이는 군단병들과 함께 대륙의 동쪽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