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타락이 아닌 진화(8)
"재가동 될때까지 뒤로 빼. 이제, 이 전쟁은 내가 끝내. 지금이라도 메나스를 함락시킨다."
눈을 번득인 이브가 둥지 한복판의 옥좌에서 단숨에 전방을 향해 날아가는 군단병들을 지휘했다.
그 사이 상위종들은 척살권을 맞고 쓰러진 레이나의 육신을 회수해 빠르게 현장을 벗어나는 중이었다.
마법사들이 그들을 쫒으려 쏘아낸 마법폭격이 빗발쳤으나 베리어를 공명시켜 막아낸 상위종들은 그자리를 여유로이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이브는 이제 그들에게서는 신경을 껐다. 어차피 레이나는 몸에 다시 혼을 넣고 군체의식을 연결하면 되살아날 수 있으니까.
그 기적과 같은 말도 안되는 과정은, 군단의 하이브마인드인 이브에겐 그저 자기 몸의 일부를 움직이는 것 뿐이었다.
동시에 거대한 군체의식이 다시 한번 활성화되었다. 지축을 울리며 돌진하는 수많은 군단병들이 메나스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한번에 쓸어버린다.'
계획은 전과 동일했다. 전병력을 동원하여 일대를 통째로 쓸어버리는 것.
이브는 메나스가 이 세상의 지배종이었던 인간 세력의 핵심이자 중심임을 알고 있었고, 인간들이 자신에 비해 신속한 움직임이 불가능하다는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메나스는 지금 이미 방어기능을 상실하고 극도의 혼란에 빠져있는 상태.
그런 곳을 날려버린다면 인간들은 제대로 결집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쓸려나갈 것이다.
'고속 비행이 가능한 중형 비행종 3백만 마리.'
그런 메나스를 향해 선발대로서 가장 먼저 동원된 병력은 3백만에 달하는 비행종.
전체적인 형태는 곤충을 베이스로, 마치 황소만한 크기의 장수말벌을 닯았다.
단지 전신을 단단하고 가벼운 갑각으로 두르고 있었으며, 두쌍의 날개로 더 빠른 비행이 가능했다.
주 무장은 인간에겐 창이나 마찬가지인 길고 뾰족한 독침. 거기에 6개의 다리는 모두 날카로운 맹금류의 발톱을 달고 있었다.
'놈들이 정신차리지 못하게 만들어.'
히죽 웃은 이브가 서서히 시야에 보이기 시작하는 메나스를 보며 총공 명령을 내렸다.
목적은 단 하나, 그들이 결집하여 제대로 된 반항도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모두..! 모두 대피해라!"
"날짐승들이다!"
바람잘날 없던 메나스는 당연히 대혼돈에 빠졌다.
저 먼 창공을 새까맣게 물들이며 날아오는 괴물들은, 밝은 보름달이 휘영청 떠있는 한밤에 직전에 있었던 피해를 채 수습하지도 못한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이제는 인정해야지. 놈들은 군대요. 짐승무리가 아니라, 명확한 목적과 병종, 전술을 가진 군대!"
"지금 당장 방어벽을 재가동해라! 아직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도 어서 대피시키고!"
마법사들은 급한대로 대응에 나섰다. 정확히 이브가 원한 반응이었다.
차라리 뒤도 돌아보지 않고 흩어져 도망치던가 했다면 길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 끝도 없이 몰려올 물량에 맞서겠다 다짐했으니 남은건 처절한 싸움 끝에 죽어가는 것 뿐.
도시 전반에서 그들이 쏘아낸 수많은 마도곡사포의 포탄들이 어둑한 허공을 가르고 몰려오던 비행종들에게 틀어박혔다.
이브가 동시에 조종하는 비행종들은 한몸처럼 기민하게 움직여 피해를 최소화했다.
애초에 화망을 갖추지도 않고 이렇게 무질서하게 쏘아내는 공격에 맞아 줄 생각도 없었다.
"...로제스. 준비는 된건가?"
"그, 그렇소. 근데 정말 플레이어가 척살권을 쓴거요?"
"아깝게도. 하지만 혹시 모르지. 척살권은 틈이 많아."
레이나의 포격으로 반쯤 부서진 의회 건물 옥상에서 그 광경을 무심히 보고 있던 다르크가, 차가운 분노가 느껴지는 어투로 자신에게 다가온 로제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복귀한 로제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강압적으로 시킨 다르크의 이상한 명령에 불만을 가졌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차라리 무슨 방법이라도 있다는게 기적이었으니까.
"대체 그들로 무얼 하려 그러시오?! 그들은 아무 힘도 없는 평범한 무지렁이들일 뿐이오!"
"말 함부로 하지 마시오. 그들은 비록 아무 힘도 없을지언정, 우릴 위해 바쳐 줄 뜨거운 피를 가지고 있으니."
다르크는 전장에서 몸을 돌렸다.
당황한 로제스가 그를 불렀으나 그는 한마디 쏘아주고 그대로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내 이럴때가 아니지."
멍하니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로제스는 순간 흠칫하더니 서둘러 전장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목숨이었으니까.
"..."
로제스와 헤어진 다르크는 말 없이 걸었다.
도시 전체를 습격한 대규모 공세.
놈들이 덮친 도시 서쪽은 이미 전쟁터로 변해버렸다. 인구수가 워낙 많은 탓에 대피도 쉽지 않았다.
미친듯이 도망치는 시민들의 대피 행렬은 동쪽으로 치중되어 있었다.
그곳에 사람들을 모아놓은 대형 연무장이 하나 있었다.
로제스가 게이트를 열어 도주할 수 있게 해주겠다며 거짓말을 하여 모아놓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약 1천의 사람들.
그들은 불안에 떨며 어서 이곳을 떠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적들의 공세에 플레이어가 크게 당황하여 잠시 잡음이 있었다]
[우선 마력을 증폭시켜라. 네 계획대로 게이트를 열어, 괴물들끼리의 싸움을 성사시킨다]
멍하니 그 길을 걸으며 연무장으로 향하는 그의 눈앞에, 글자가 아른거렸다.
자신에게 꽤 쓸만한 힘을 내려준 존재가 내리는 지시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르크는 주변의 비명과 고성을 들어가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의 플레이어는 사실 그리 유능하지 않았다. 본인 말로는 본인이 일족의 공주이며, 훗날 일족의 지도자가 될거라고 자랑을 늘여놓았다.
아직 젊은 다르크가 보기에도, 플레이어는 어리고 미숙하다는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분명 그 힘은 진짜였다. 다르크는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건 플레이어와 자신의 힘을 결합하는 방법 뿐이라 믿었다.
'하사품'으로 보내진 금잔. 그리고 그 안에 담긴 피를 마시고, 다르크는 플레이어의 힘을 계승해 인간의 몸에서 벗어났다.
그덕에 그 힘이 어떤 것인지 이제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의, 의장님?! 세상에."
"의장님이 오셨어!"
연무장에서 불안함에 떨며 대기하던 사람들은 다르크가 단신으로 나타나자 환호했다.
높은 지위에 있는 그가 직접 나타날 정도라면, 자신들이 버려질 일은 없다는 것이니.
그리고 무엇보다 젊고 능력 있던 다르크에 대한 신뢰는 원래부터 높았다.
'이건...이건 대의를 위한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사람들을 본 순간. 그동안 차가운 얼음장 같던 그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유닛으로 지정된 이들을 어린 아이까지 모조리 학살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당연했다. 그들은 자신의 대적자. 하지만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이들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시민들이었으니까.
'난, 난 타락하는게 아니야. 이건 옳은...'
이를 악문 그는 중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일종의 홀(忽). 이것 역시 하사품이었다.
그 효과는, 피를 제물로 하여 그 안에 담긴 힘을 마력으로 치환하는 것.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의아해하던 시민들을 향해 다르크는 하나의 마법을 발동시켰다.
그 마법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마법, 혈마법.
짙은 핏빛 마력이 고개를 떨군 그의 몸에서 뿜어져나왔다.
*
"신기한 힘, 역시 끝에 끝까지 숨겨놓은 비장의 한 수 같은게 있었다는건가?"
다르크가 연무장에 간 사이 군단병들을 지휘하던 이브가 희미하게 웃었다.
학살은 계속된다. 마법사들의 마법에 펑펑 터져나가고 있지만, 그래봤자 한줌일 뿐이었다.
만들어지는데 채 하루도 걸리지 않는 중형의 비행종 군단병에게, 수십년 이상 마법을 수련해 온 마법사들이 꿰뚫리고 잡아채여 죽고 있었다.
[적 유닛들의 힘이 갑자기 상승했다]
"잡아서 분석해야겠어."
물론 상대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아까부터 전장에 난입한 유닛들이 있었다.
다르크와 같은 사이드에 속한 그들은 겉모습은 분명 현지의 인간과 흡사했다. 검을 쓰고, 마법을 썼다.
'하지만 피 맛은 전혀 달랐으니.'
그들은 꽤 특출난 움직임을 보이며 군단병들을 상대로 꽤 효과적인 전투를 보여주었다.
기사로 보이던 적측 유닛 하나가 붙잡혔다.
근처에 있던 군단병 셋이 단숨에 독침으로 그의 가슴과 목, 다리등을 앞뒤에서 꿰뚫었으나 그는 그 상태에서도 고통 따위 모른다는 듯, 죽음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듯 검을 휘둘러 군단병들을 베어버렸다.
"피 전체에 진득한 형상력이 느껴져. 흥미로운데."
이브는 당연히 새로운 것, 즉 그들의 힘에 욕심을 내었다.
[...납치를 시도했으나 놈이 탈주한다]
"죽은 시체에선 마력이 전부 사라져버렸어. 그러니 반드시 사로잡아."
문제는 특정 시점을 기점으로 그들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진다는 것.
그것을 통해 이브는 그들이 모종의 방법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걸 확인했다. 사로잡으려 했지만 형상력 없는 일반 비행종들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쉽게는 안 된다는건가."
거기다 도시 반대편, 폭발하듯 터져 나온 핏빛 마력을 본 이브는 선발대의 패배를 직감했다.
거센 폭풍과도 같던 그 마력의 소용돌이에서 은발을 휘날리며 허공을 날아오는 존재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마법을 시전했다. 마치 짙은 핏물처럼 붉고, 무거운 마법이었다.
터져나온 섬광이 허공을 가득 채우고 있던 수천의 군단병들을 일거에 소멸시켰다.
그것은 분명 이브가 알고 있던 이 세상의 마법이 아니었다.
'연사가 가능한가? 저것이 최대의 위력인가?'
이브는 그순간 목표를 바꾸었다. 모든 전력을 투입하여 상대의 전력을 알아내는게 우선이었다.
모든 비행종들이 일시에 행동을 멈추고 다르크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가 다시 한번 마력을 끌어올려, 거대한 힘을 폭사했다.
"어, 어서 의장님을 보조해라!"
"뭉쳐라. 길이 보인다!"
끝없을 절망에 빠졌던 이들이 희망을 얻어 그 곁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는 어마어마한 마법에 경악하면서도 다르크에게 뭉쳐 저항을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