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타락이 아닌 진화(4)
강도연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을 때.
감염균의 힘으로 몸을 회복한 레이나는 마구 달려서 자리를 벗어났다.
'복수하고 싶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지금 보여줄게.'
"으으윽...아아악!"
후들거리는 다리로 달리던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이미 장악이 끝난 뇌에 직접 때려박히는 이 강력한 정신간섭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도주하던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경련하며 눈을 뒤집었다.
지금 그녀의 눈에는, 군단의 하이브마인드 이브의 정신이 일부분 공유되고 있었다.
이브가 강도연에게는 절대 하지 않은 짓이었다. 인간의 뇌로는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정보가 아니었으니까.
자칫하면 그대로 자아가 파괴될 위험이 있지만 이브는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레이나에게 보여주고 싶은게 있었다.
"하악..."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레이나가 헐떡였다. 사람들은 여전히 도망치거나 허둥대느라 그녀에겐 관심도 없었다.
그녀가 본것은 바로 군단의 일부. 덜덜 떨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절대, 못 이겨..."
동시에 공포심이 차올랐다. 이브가 군체의식을 통해 보여준 편린에는 구석자리 변방 땅을 전부 둥지화시킨 군단이 지금 어느정도의 힘을 폭발시킬 수 있는지 전부 담겨있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둥지도, 수많은 군단병들도.
'우리와 함께해.'
그때, 두려움에 떨던 그녀의 뇌리에 치명적인 속삭임이 들려왔다.
순간 그녀의 떨림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우리는 네가 가진 증오심을 알고 있어.'
'우리는 네가 가진 가능성도 알고 있지.'
'우리는 네가 필요로 하는 것도 알고 있고.'
"내, 내가 필요로 하는 것..."
레이나는 돌바닥을 꾹 움켜쥐었다. 희고 가느다란 손에는 상처 하나 없고, 뽑혀나가고 부러졌던 손톱이 어느새 다시 재생해 있었다.
'너는 그 의지와 증오만 있으면 돼. 군단에게는 없는 바로 그것만. 나머지 부족한 모든 것, 그건 우리가 전부 채워줄 수 있으니.'
"전부..."
레이나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마음은 지금도 여전히 불타고 있었다. 마지막 기회마저 걷어찬 썩어빠진 존재들에게.
'망설이지마. 타락하는게 아니야. 너는 이제 진화하여, 이 거대한 신경체가 시전하는 진정한 마법이 무엇인지 저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테니.'
마지막 말이 쐐기를 박았다. 다시 고개를 든 레이나의 눈은 이제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서둘러 걸음을 옮겨 도시를 빠져나왔다. 혼란덕에 혹시나 싶었던 조금의 방해도 없었다.
그러고선 강도연이 자신을 픽업할 때까지 근처에 숨어 난리통인 메나스를 지켜보았다.
"멍청이들."
그 모습을 보며 진심을 담아 욕을 짓씹었다.
자신에게 그렇게 오만방자하게 굴던 이들이, 지금 아무것도 못하고 휘둘리는 모습이 이렇게 한심하고 멍청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아하핫!"
그리고 큼직한 폭발과 함께 옅은 비명이 들려올 때는 통쾌하게 웃었다. 레이나에게 더 이상 저들은 동족이 아니었다.
자신의 원수였으며, 이렇게 도태되어도 모자를 패배자들이었다.
그렇기에 도시를 빠져나온 강도연이 자신에게 날아와 괴물의 손을 내밀어도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당신도 나와 같은가요? 실망하고 화가 나서, 모든걸 포기했나요? 그래서 하나가 된건가요?"
그녀는 그 손을 잡으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한때는."
입 부분만 가면을 해제한 강도연이 한마디만 대답한 채, 그녀의 손을 잡고 단숨에 하늘 저 위로 날아올랐다.
"어서 와."
"이, 이럴 수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강도연이 레이나를 데리고 복귀했다.
레이나는 가면을 벗은 강도연의 얼굴에서 한번, 마찬가지로 가면을 벗고 기다리고 있던 이브의 얼굴에서 두번 놀랐다.
"이미 전부 알고 있겠지. 저 웅덩이가 보여? 저곳에 스스로 들어가. 그러면...넌 이제 우리와 '하나'가 되어, 마법사들을 죽이는 선봉장이 될 수 있을테니."
이브가 굳어버린 레이나에게 둥지 한쪽에 있던 점액 웅덩이를 가리켰다. 군단의 만능세포가 무한정 배양되는 그 웅덩이에서 육체를 분해하고 재구성하여 자아를 유지시킨채 완연한 군단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레이나의 눈이 흔들렸다.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지금 스스로 목숨을 바치라는 것과 비슷하단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할게요."
"좋아."
잘게 떨리는 그 목소리에 이브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애초에 자발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이 실험엔 의미가 없다.
레이나는 지시대로 옷을 전부 벗고, 스스로 그 출렁이는 점액 웅덩이에 몸을 담그기 시작했다.
"아, 아무렇지도 않...어?"
기묘한 느낌에 당황한 레이나가 돌아본 순간.
그녀는 중심을 잃고 웅덩이에 풍덩 빠져버렸다.
"어푸악..."
본능에 따라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려던 그녀는 경악했다. 어느새 점액에 담겨있던 자신의 다리가 전부 사라져 있었다.
결국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점액에 잠겨버렸다.
허공을 휘젓는 파들파들 떨리는 손이 마지막으로 점액속으로 사라졌다.
"한번 소화시켜야 하는건 똑같거든."
"...설마 나도?"
태평한 이브의 말에 강도연이 질색을 하며 자신과 레이나를 번갈아 손가락질했다.
레이나가 담겨있던 웅덩이가 요동치더니, 육벽이 움직여 그 웅덩이를 감싸버렸다.
인간의 자궁을 모방한 그 형태는 강도연이 찢고 나왔던 둥지와 똑같았다.
"두번째 군단장이 태어나면, 그대로 작전을 실행할거야."
"...태어나는데 성공한다면 말이지."
강도연이 꿈틀거리는 그 분홍색 육벽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본인이 당사자이기에 잘 알고 있었다. 군단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결국 다시 태어난다는 것.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교체되어 발산하는 그 이질감을 견디기란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 그 이질감을 견디지 못하면 그대로 미쳐버려 자아가 붕괴할 것이다. 그래서야 이브가 원하는 군단장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역설적으로 오직 인간만이 우리의 군단장이 될 수 있다고 믿거든. 불굴의 의지를 짜낼 수 있으면서도, 쓸데없는 자긍심 같은건 없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유연하게 정의할 수 있는 존재니까."
이브가 진동이 느껴지는 육벽을 살살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브는 레이나가 견딜 수 있다고 믿었다. 강도연도 부정하진 않았다. 이미 레이나의 정신력이 얼마나 굳건한지 알고 있었으니까.
"계획은?"
"전방위적인 총공격."
이브의 머릿속에 지도가 펼쳐졌다. 비행종을 이용해 만든, 목적지인 메나스까지 자세하게 그려진 항공지도가.
"이곳 서남쪽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대도시 621개, 크고 작은 마을 2800여개. 살아가는 인간들의 추정치는 1억 5천 이상."
이브가 계산된 수치를 나열했다. 지금 방어 준비를 갖추고 있는 수많은 도시들의 모습이 보였다.
물론 지금 이브가 보기에 저들이 갖추었다는 방어 태세는 어이가 없다 못해 실망할 지경이었다.
"한번에, 전부 공격한다. 최대한의 효율을 위해, 다른 지역의 인간들이 지원오기 전에 속전속결로."
압도적인 전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전력을 일시에 통제할 수도 있다.
이걸 동시에 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적들이 채 정신 차리기도 전에 한번에 삼킬 수 있게.
"너는 먼저 출발해. 세부적인 계획은 이미 네 뇌로 다 전송했으니. 네 후배도, 완성되면 곧바로 투입될거야. 느낌이 좋아. 아주 잘 성장하고 있어."
"...후, 알았어."
양분을 공급 받고 동력기관을 전부 재충전한 강도연은 작게 한숨을 내쉰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분만 있다면 군단은 쉬지 않는다. 언제든 행군하고 언제든 싸울 수 있다.
강도연에게 부여된 임무는 중간 거점으로 삼을 도시의 함락.
그녀에게 주어진 병력은 이미 그곳으로 출발한지 오래였다.
"그곳에 거점 둥지를 마련하면, 그곳을 방위하면서 좀 쉬게 해주지."
"...배려 고맙네. 그건 오빠가 지시한거지?"
그녀는 떠나기 직전, 이브의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이브는 군체의식으로 긍정했다. 군단의 만능세포로 이루어진 이 특별한 육신은 양분 보급만 이루어지면 지치지 않는다. 하지만 정신적 피로는 별개의 문제다.
이브는 절대 모르는 그것을, 계속 지켜보고 있던 신우가 지켜준 것이었다.
*
"시장님. 이거 주변에서 자꾸 불만이 커지고 있습니다.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괴물들 때문에 언제까지 비상을 유지해야 하냐며."
"나도 마찬가지네. 하지만, 명령이 그런걸 어쩌나?"
보좌관의 말에 집무실에 있던 도시의 시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현재 도시는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 원인은 인근을 습격했다는 정체 불명의 괴물들 때문.
오직 살육, 살육, 살육 뿐인 그 괴물들에게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증언하는 끔찍한 내용이나, 소집된 방위군을 격파했다는 소식은 확실히 가벼이 여기기 힘든 소식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때 이야기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는데 괴물들이 전부 사라져버린 이후로 쭉 조용하니 슬슬 통제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시장님! 의회에서 온 연락입니다!"
"오오! 뭐라던가. 봉쇄를 풀어도 된다는 것이겠지?!"
"예? 아, 아닙니다. 경계를 더 강화하여 전시를 가장한 최고 단계 대응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뛰어 온 또다른 보좌관이 눈을 꿈벅이며 손에 든 수정구를 내밀었다. 충격적인 내용에 벙찐 시장은 단숨에 그 수정구를 낚아채서는 내려 온 공문을 읽어내렸다.
"고대의 미궁에서 기어 올라온 굉장히 위험하고 음험한, 파멸귀의 후신으로 추정되는 심연과 어둠의 괴물들이며 따라서 중앙에서 군을 파견할 때까지 그에 맞는 최고 등급의 방위에 힘쓰라?"
시장의 손이 덜덜 떨렸다. 보좌관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이었다.
"...게다가 이 괴물들은 놀랍게도 아군의 마법을 훔쳐쓰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마법은 블레이클 학회의 마법과 스타스 학회의 마법. 이게 대체?!"
시장은 불이 꺼진 통신구를 들고 멍청한 눈으로 보좌관들을 돌아보았다.
솔직히 방금 전 수정구가 때려박은 정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시장님. 그 집채만한 크기의 괴물은 대체...?"
그와중에 수정구를 가져온 보좌관이 흘끔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생존자들과 오스틴이 증언한 초대형종에 대한 소리 역시 그들 입장에서는 쉽사리 믿기 힘들었다.
"거, 걱정 말라. 설령 아무리 크다 한들 우리 헤름의 성벽이 더 높고 단단하다. 게다가 마법으로 친 결계가..."
"이건?! 지진인가!"
시장이 흐르던 식은땀을 닦으며 애써 정신줄을 잡으려던 참.
갑작스레 땅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진동은,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다.
"...온다."
무언가를 직감한 시장이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
정확히 그들이 서 있는 곳을 향해. 무언가 거대하고 거대한 것이 땅을 가르며 접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