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타락이 아닌 진화(3)
처형 당하는 순간에. 본능적으로, 자신의 목에 그 무겁고 큼직한 칼날이 떨어지고 있다는걸 직감한 그 순간에.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감각 속에서 레이나는 거센 풍압과 충격파에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나가떨어졌다.
마지막으로 본것은 분명 검은 괴물의 가면.
"무슨..."
"으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퍼졌다.
부서진 단두대에서 튕겨나간 레이나는 바닥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힘줄이 끊긴 팔다리와 만신창이인 몸은 이제 뜻대로 움직여 주지도 않았다. 그나마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지금 무슨일이 벌어졌는지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이게 대체.'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했다.
난장판이 된 현장에, 검은 깃털 날개 한쌍이 검붉은 기운을 머금은 채 휘둘러졌다.
검붉은 기운은 곧 참격이 되어 사방으로 쏘아졌다. 피바람이 불고 흥분과 광기의 도가니였던 처형장은 순식간에 공포에 빠졌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고 이미 시체가 된 이들이 여럿이었다.
"잡, 잡아라!"
처형장을 지키던 기사 하나가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검은 갑주에 덮인 길쭉한 다리가 쭉 뻗어져, 기사의 상반신을 걷어차 흉갑을 부수고 핏물을 뿌리며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다.
레이나는 그제서야 '그것', 아니 분명 한 앳된 여인이었을 '그녀'의 모습을 온전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나를 보고 있다. 어째서.'
가면 너머 번득이는 안광이 정확히 그녀의 푸른 눈과 마주쳤다.
레이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괴물이 어째서 자신을 보고 있는지. 버림받고 배신당한 지금의 자신은, 벌레만도 못한 신세인데.
"아..."
그러나 그것은 괴물의 손을 뻗어 떨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레이나는 그 손길을 통해 자신의 체내에 감염균이 침투했음을 알지 못했다.
동시에 몸의 상처가 나아가며 고통이 완화되기 시작했다. 지금껏 인간을 고문하는데만 쓰인 감염균이 처음으로, 인간을 치료하는데 쓰인 것이다.
'살고 싶나?'
"...!!!"
그리고 그 순간.
레이나는 자신의 뇌리에 울려퍼지는 초월적인 존재의 의지에 전율했다.
"어서 움직여라!"
"습격! 습격이다!!"
대륙수도 메나스가 뒤집어졌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적이라 부를만한 존재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자부심과도 같은 성스러운 도시에 침입자가 나타나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저 괴물은!"
"놀라지만 말고 움직이게 근위단장!"
하지만 이곳은 대륙의 중심이자 마법의 총본산인 곳이었다.
말그대로 대륙의 전력이 모여 있는, 마법사는 길가다 채이는 돌멩이보다 많은 곳이기에 대응은 빨랐다.
"떨어져라 괴물아!"
허공에서 마법사들이 허겁지겁 퍼붓는 마법 폭격을 받고 있는 적을 향해, 번쩍이는 은갑을 입고 있던 덩치큰 기사 하나가 전력을 다해 지붕을 밟고 뛰어 올랐다.
그의 이름은 라크. 직책은 이 메나스를 수호하는 근위대의 단장.
그 실력은 기사들 중 손에 꼽는다. 그가 휘두르는 검이 푸르게 빛나더니 이내 한줄기 벼락이 되어 내리꽂혔다.
"큭! 이걸 막았다고!"
거대한 충격파가 허공에서 울려퍼졌다. 찡 하고 울리는 검에 눈을 찌푸린 그는 서로 교차하여 자신의 검을 막아낸 검은 날개를 보고 침음했다.
"우아아악..."
물론 타격은 전혀 없었으나 그는 날 수 없으니 곧 날개가 펴지며 밀려난 그는 그대로 허공을 허우적거리며 땅으로 추락했다.
"마도직사포의 준비가 끄..."
"그게 무슨 소용인가! 지금 다른 쪽으로 날아갔는데!"
라크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진 순간 땅에있던 마법사들은 급한대로 마법을 퍼붓는 것 외에는 뭐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허둥대고 있었다.
게다가 기동력에서 상대가 안 되었다. 마법사들이 뭔가 해보기 전에 상대는 단숨에 하늘을 가로질러 도시 반대편에 도착했다.
마치 도시 전체를 휘저어 놓는게 목적이라는 듯이.
"그러니, 우선 떨어트려야 한다는 것 아닌가."
"학회장님, 직접 나서실 필요는..."
"이런 중대한 일에 나서지 않으면 언제 나서란 말이냐?"
그때 로브를 걸치고 지팡이를 짚은, 허리가 굽어있는 왜소한 체격의 노인이 제자들과 함께 건물 밖으로 나와 하늘을 보았다.
"대체 어떤 괴물인지 모르겠지만, 오만하기 그지 없구나."
눈을 번득인 노인은 지팡이를 들고 동시에 마력을 움직였다.
"다른 도시도 아니고 감히 이곳 메나스에 단신으로 들어오다니. 지금 이곳에 있는 학회장들만 몇명이느냐."
눈을 번쩍인 그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순식간에 주변 공기의 흐름이 뒤바뀌었다.
그 흐름이 거센 폭풍이 되어 휘감겼다. 바람을 다루는 학회의 학회장급이 사용한 가장 강력한 마법.
형상력의 힘으로 버티고 있던 상대가 결국 그 회오리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근처 5층 건물의 지붕에 내려 앉았다.
"쏴라!"
그 즉시 대기하던 마법사들의 집중 포격이 이어졌다.
건물을 반파시킬 위력에 검은 날개를 둘러 대충 포격을 막아낸 상대가 다시 한번 땅을 박차고 건물들을 타넘었다.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으냐."
그 앞을 또다시 기사들이 가로막았다. 처음의 당황함은 어디가고, 이제 승기를 잡았다 생각했는지 그들 모두 자신감에 차 있었다.
"제 1근위대! 대형을 펼쳐라. 반드시 사로잡는다! 전공은 우리의 것이다!"
지휘관의 지휘에 맞춰 칼같이 진형을 잡은 근위대가 검을 빼들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상대도 마찬가지로 이곳을 향해 땅을 박찼다.
"뒤를 노려라! 앞에서는 나와 칼슨이..."
충돌과 충격, 그리고 피분수.
침을 튀기며 떠들던 지휘관은 순간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왜 전장을 지휘해야 하는 자신의 얼굴이 이 억센 손아귀에 붙잡혀 있는지.
왜 피분수를 뿜으며 쓰러지는 자신의 몸이 자신의 눈에 보이는지.
왜 부하들은 잘린 팔다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지.
이제 이곳을 벗어나라는 명령을 하달받은 그녀는 손아귀에 쥐어져 있던, 잘린 지휘관의 머리를 휙 던져버렸다.
허공을 나는 그의 시야가 절망속에 서서히 암전했다.
"어딜 가느냐."
"...!"
그러나 그녀는 이번에도 장애물을 만났다.
뿜어진 일격. 다시 한번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려던 그녀에게, 빛나는 섬광이 덮쳐졌다.
섬광을 뿜어낸 그의 눈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떨어지지 않았다. 검붉은 베리어를 둘러친 채,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유닛!?'
이내 그 정체를 알아본 그의 미간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하지만 슬슬 도주해야 할 입장이던 그녀는 그자리에서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대로 날아갈 뿐이었다.
"의, 의장님!"
"의장님!"
그 직후 사람들이 그에게 서둘러 달려왔다. 그럼에도 그의 표정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적을 놓쳐서 분노한 줄만 알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저런 괴물들이 힘을 기르고 있었나.'
그는 이를 갈았다. 단순한 괴물이라면 솔직히 깊게 신경쓸 가치가 없었다. 그냥 토벌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제는 단순히 생각할 괴물이 아니었다.
이 하늘 아래, 자신들과는 절대 함께 할 수 없는.
반드시 죽여야 할 대적자이자 맞수였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길! 보십시오! 우리의 자랑스러운 마법사들이 시전한 포획진이 발현했습니다! 놈은 이제 독안에 든 쥐입니다!"
눈치 없이 들뜬 의원 중 한명이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확실히 그 말대로, 하늘에 나타난 거대한 장막이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본디 외부의 침입을 막는 용도의 마법이지만 이렇게 도주하는 적을 잡는 용으로 쓰는 것도 가능했다.
이제 저 장막은 서서히 줄어들어, 대상을 옴짤달싹 못하게 가둬버릴 것이다.
"...이럴 수가."
그러나 그들의 낙관적인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손을 뻗은 상대가 검붉은 힘을 일으키더니, 그 끝에 힘을 집중시켜 그대로 뿜어내었다.
아무리 범위가 넓다한들 학회장급들이 참여해 만든 장막이 단번에 부숴졌다.
우수수 떨어져내리던 장막이 연기가 되어 사라질 때. 주위에는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고 적막만 흘렀다.
"...의장의 권한으로, 지금 당장 긴급 의회를 소집하겠습니다."
"예?!"
"그리고 조사중인 슐츠 의원을 데려오십시오.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야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가벼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는 그 즉시 결단을 내렸다.
*
"최연소 대륙 의회 의장, 다르크 유타 크루거."
둥지 한가운데, 이브는 기존에 포로를 심문해 갖고 있던 간단한 인상착의 정보로 그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찬란한 은발을 가진 명문가의 젊은 천재 마법사. 그것이 대외적으로 알려진 그의 신분.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외부세계의 존재와 연결된 특별한 존재였다.
"하지만, 유닛인지 플레이어인지는..."
"스트링이 굉장히 얇았지. 물론 확실한건 아니지만 유닛일 확률이 굉장히 높아."
"그도 알아봤을까?"
"아마도."
강도연과 소통하며, 이브는 씩 웃었다.
강도연의 눈을 통해 본 그의 마지막 얼굴이 아직도 선명했다. 이브는 그가 모종의 방법으로 강도연이 유닛임을 알아보았다고 확신했다.
"그럼 위험한거 아니야?"
"전혀."
너무 쉽게 정체를 노출한게 위험하지 않느냐는 말에는 즉답했다.
오늘 강도연을 시켜 메나스에서 난리를 치게 만든건 단순히 레이나를 빼돌리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전력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만약 오늘 보여준게 마법사들의 전부라면."
이브는 자리에서 일어나 둥지를 둘러보았다.
"놈들은 절대 못이겨."
[준비가 끝나간다. 지금껏 단 한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대규모의 병력이]
목표치만큼의 확장은 끝났다. 계획한 군단병들의 양산도 이미 진행중이었다.
도합 억 단위의 대병력이 얼마든지 둥지에서 뿜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거대한 파도이고. 놈들의 방어는 모래성에 불과해. 너는 어떻지 레이나. 잘 보이나? 마음은, 정했나?"
이브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지금 이곳으로 날아오고 있는 강도연의 품에는, 어쩔 줄 모르는 레이나가 안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