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타락이 아닌 진화(2)
'대륙 의회는 어디지?'
잔뜩 긴장했던 강도연은 지금 평범히 주변을 둘러보며 도심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미개한 이세계라고 대놓고 편견을 가졌던 것과는 달리, 사람들은 지구 기준으로도 상식적이고 정중했으며 반짝이는 발광석이 빛나는 발달한 거리는 지구의 거리와 비교해도 고풍스러우면서 아름다웠다.
그녀는 멍하니 바닥을 포장한 깔끔한 벽돌을 발로 탁탁두드렸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많은 인간들 틈에 있어보는건 그녀가 군단에 합류한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다만 한가지 거슬리는 것은.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아가씨. 혹시 길을 잃으셨는지."
"...예?"
"아름다운 붉은 눈이 꼭 완벽한 마석이라는 화염의 루비를 닮...커헉."
대뜸 그녀에게 말을 걸어 온, 술냄새 풀풀 풍기던 그 젊은 사내는 동료로 보이는 이에게 머리를 얻어맞고 그대로 뻗어버렸다.
"죄송하게 됐수다. 집에 어린 아들도 있는 놈이 술을 먹었다 하면 예쁜 여자한테 사족을 못쓰는통에."
헤롱거리며 쓰러진 사내를 부축한 동료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으며 사과했다. 당황한 그녀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정말로 무슨 도움이 필요한거요?"
"혹시 한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마음을 진정시킨 강도연은 이렇게 기회가 생긴 김에 몇가지 확인을 받고자 했다.
"혹시 지금 서남쪽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알고 계세요?"
수수한 차림새를 한 그는 말그대로 평범한 시민의 표본이었다. 즉 그가 알고 있다면 다른 이들도 알고 있을 것이라는 뜻.
표정을 지우고, 가짜 웃음을 띄운 강도연은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군단에 대해 물었다.
"듣기는 들었지."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 뭐시기, 옛날 구덩이에서 뭐가 나왔다면서. 그것때문에 변방에서 여러명 죽었다더군. 그래서 군대를 보냈다고 했는데?"
"...그게 전부인가요? 군대가 패퇴했다는 소식은요?"
"군대가 졌다구..? 그건 몰랐네. 뭐 높으신 분들이 알아서 하겠지."
살짝 굳은 강도연이 다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눈치채지 못한 그는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머저리들.'
그녀의 뇌리에, 이 모든 광경을 공유하고 있는 이브의 비웃음이 들렸다.
강도연은 무언가 부정당한 느낌이었다. 예를들면 자신의 내면에 남아있던 인간에 대한 희망이나 기대라던가. 설마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적어도 알기는 하는 상태라고 예상했으니까.
"그나저나 아가씨. 외부에서 온것 같은데 혼자서 늦은 시간에 여긴 돌아다니지 않는게 좋을거야."
"...취객 때문인가요?"
"아니? 요즘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우리 같은 소시민은 여자한테 까딱 잘못 손대면 그대로 손이 날아가지."
그가 부축하던 동료를 보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천외천이 있거든. 하늘 같은 법 위에 군림하시는 수사관님들이. 조심하라고. 뭣도 없이 수사관에게 찍히면 죄가 없어도 죄가 생기는 기적, 아니 마법이 생기니까. 그걸 믿고 아녀자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수사관놈들이 많아. 자네 같이 젊고 아름다우면 더더욱."
그가 멀어지며 진심 어린 충고를 남겼다. 그녀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충고를 새긴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는게 좋겠다는 결론을 단숨에 내렸다.
"그정도의 고위직이라면, 뭘 더 알고있겠지. 대륙 의회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등등."
잠시 주변을 두리번 거린 그녀는 더 깊숙한 거리를 배회했다. 물론 무서운 충고를 들었지만, 사실 그정도로 막장인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가 길을 배회한다고 갑자기 시비를 거는 미친놈들은 적어도 이 번화가에는 없었다.
하지만 명분이야 만들면 그만이다.
그녀의 눈에 한잔 걸쳤는지 동료들과 함께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는 한 사내가 보였다. 몸에 걸친 제복, 사람들이 슬슬 피해주는 권위.
그녀가 찾던 수사관이었다.
'정말하려고?'
"시간끌 이유가 없어."
이브가 잠짓 놀랄 정도의 추진력을 바탕으로 강도연은 갑자기 있는 힘껏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정확히 그들을 향해서.
"무슨...커허억!"
뒤에서 갑자기 들리는 탁탁탁 하는 발걸음 소리, 취기로 붉어진 얼굴을 슥 돌린 그는 갑자기 몸에 쳐박히는 충격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바닥을 굴렀다.
"수사장님!"
"수사장님! 괜찮으십니까!"
곁에 있던 수사관들이 기겁해 그를 챙겼다.
물론 그는 마력을 수련한 사람이기에 멀쩡했다.
취기까지 겹쳐 아픔은 전혀 느끼지 못한 그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 무슨 일이냐?"
"이 계집이 감히 수사장님을 음해하려 했습니다!"
후임 수사관은 그녀의 팔을 꺾어들고 제압하여 그의 눈앞에 대령했다.
그는 순간 마른침을 삼켰다. 흔치 않은 짙은 검은 머리칼 밑에 자리한 작고 하얀 얼굴이, 붉은 눈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죄, 죄송합니다. 미처 앞을 보지 못하고 고귀하신 수사관님을..."
울상이 된 그녀가 덜덜 떨며 붙잡힌 몸으로 연신 고개를 숙였다. 이제서야 상황판단이 된 그는 이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제가 어떻게든 사과드릴테니..."
"호오, 그 말 사실이렸다. 어떻게든 사죄하겠다."
결국 그는 그 미끼를 일말의 망설임 없이 덥석 물었다. 덜덜 떠는 뺨을 쓰다듬은 그가 헤실거리며 후임 수사관에게서 그녀를 인계받았다.
"크흠. 자네들은 이만 돌아가고, 내일 늦지 말고 출근하게."
그는 후임들을 그대로 보내버렸다.
그리고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어 근처 여관으로 향했다.
"커헉! 끄아아악..."
물론 이 방음 잘되는 고급 여관방에 들어 온 순간, 그는 단숨에 손이 잘려나가고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검게 번득이는 괴물의 손에 목을 붙잡혔다.
"덕분에, 사람에 대한 혐오가 더 심해졌어 이 쓰레기야. 딸뻘 여자애한테 무슨 짓이야?"
그를 넘어뜨리고 목을 조르는 강도연이 쓰게 웃었다. 혹시 통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한 플랜도 세웠는데, 성욕에 져버린 중년의 수사관은 단숨에 걸려들어버렸으니.
"너어는..."
"알고 있는거, 모조리 토해내."
강도연의 눈이 붉게 빛났다. 그녀의 체내에 존재하는 만능세포가 감염균으로 바뀌어 손을 타고 그의 목에 파고들었다.
점차 번져가는 검은 혈관에 그는 물고문이나 몽둥이질, 혹은 달군 인두로 지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신경이 다 타버리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온갖 배설물을 싸지르곤 몸을 경련했다.
물론 몸의 통제권을 가로챈 감염균은 그가 비명을 지르는 것도 금지시켰으니, 침묵속에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흐음, 로제스? 오스틴? 레이나?'
그 과정에서 강도연과 이브는 모든 전말을 알게 되었다. 물론 로제스가 플레이어라는 것, 존재하는 또다른 유닛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지만 지금은 전체적으로 돌아가는 상황만 알아도 충분했다.
'실망이군.'
자연스럽게, 이브는 분노했다.
인간들이 결국 내분으로 자멸하려는 모습을 보였다는건 더 이상 그들에게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이었으니.
"그럼 이제 어떡해? 복귀할까?"
강도연이 죽어버린 수사장의 시체 위에서 일어났다. 이브는 이미 방침을 정했으니까 이제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 여자, 처형된다며.'
"그 레이나라는 여자? 안타깝게도."
강도연이 죽은 수사장의 시체를 발로 걷어차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녀는 딱히 감흥이 없었다. 어차피 이브가 모든 인간들을 죽일 계획이었기에, 지금 죽나 나중에 군단의 손에 죽나 거기서 거기였으니까.
'내가 인간에게 바란 모습은 바로 그런 모습이야. 굴하지 않는 의지, 투쟁, 정신.'
"그 대상이 동족이라는게 웃기지만. 솔직히 그 여자가 대단한거야. 물고문? 거꾸로 매달아 매질? 과거의 나였다면 절대 못참을거 같은데. 그사람 이제 성인식을 치룬 19살이라며."
'그 여자는, 동족을 원망할까?'
"...당연한거 아닐까?"
수사장은 레이나를 어떻게 고문했는지, 그녀가 얼마나 버텼는지, 자신이 레이나를 고문하던 동료에게 그걸 전해듣고 얼마나 낄낄거렸는지도 토설했다.
그 끔찍함은 지금의 강도연이 얼굴을 굳혀버릴 정도였다.
'군단장, 우리의 강점이 뭐지?'
그때 대뜸 이브가 뜬금 없는 질문을 날렸다.
밤새 고문하고 정보를 들어내느라 시간이 흐르는줄도 몰랐기에 벌써 날이 밝아오는 창 밖을 바라보던 강도연이 움찔했다.
"흡수하고, 진화해."
'맞아. 우리는 남들의 강점을 가져와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지. 인간이 가진 강점, 그 의지와 사고의 유연함. 그것들은 비록 육체적 가치가 아니지만 우리는 그조차도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몰라.'
감염균들에 의해 노골노골 녹아 없어지며 흔적만 남기고 있던 수사장을 지켜보던 강도연은 이브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증오심. 가장 강한 감정 중 하나. 그것을 원동력으로 인간의 의지가 인간을 향해 발현하면 어떻게 될까. 전부터 구상하던 것이지만 마침 좋은 실험체가 나타났군. 지금 당장 처형장으로 가. 그녀를 보자. 그 눈을 보고, 내가 직접 판단하겠어. 이건 일종의 실험이야.'
이브는 다음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강도연은 그길로 흉악범들을 처형하는 도시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레이나와 만났다. 단두대 위에서, 사람들을 보는 그 깊고 공허한 눈을.
'이용할 가치가...있어보여. 확실히, 다른 인간놈들 따위와는 비교 불가능.'
그리고 이브는 그 눈을 보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이브마인드의 명령이 하달되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다.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지는 순간 강도연은 위장을 그만두고, 힘을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