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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93화 (93/254)

93화-타락이 아닌 진화(1)

"..."

그녀는 어려서부터 마법사를 동경했다. 마법은 그들이 발달시킨 근본 그자체.

마법은 법칙을 뒤트는 기적의 힘이었다. 동시에 인간을 보다 완벽히 만들어주는 정의의 힘이기도 했다.

이 세상 그 누구나 바라듯이, 그녀는 열심히 노력하고 재능을 인정 받아 마법을 배웠다.

마법을 배우며 선대 마법사들이 고향땅에서 얼마나 훌륭히 싸웠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애썼는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자부심이 대단했다. 자신이 마법사인 것에, 그들의 후손인 것에.

하지만 점차 마주치게 되는 현실은 좀 달랐다. 과거 그 치열한 전장을 겪었던 원로들은 안전한 세상에 오게 되니 그 날카로운 전투 감각을 정치력에 투자했다.

새롭게 자라나는 젊은 세대는 기본적으로 자만심을 갖고 있었다. 파멸균을 몰아낸 이 땅에, 더 이상 그들과 '경쟁'할만한 이들은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생존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할 상대조차 없는 이 태평하고 풍요로운 신세계예서 모든 권력을 독차지한 마법사들은 발달하고 발전함과 동시에 서서히 고여가고 썩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올바른 길로 나아가고 있으며 세상이 점점 발전하고 있다 생각했지만, 그 실상은 아니었다.

"블레이클의 레이나...아니 이제 제명당했으니 일개 죄수가 되었군. 넌 이번에 새롭게 개정된 학회마법사비리특별법에 의거, 본보기로 처형된다."

아직도 살타는 냄새가 진동하던 고문실 문이 열리고, 흐릿하게 거꾸로 보이는 수사관이 문서를 들고 거꾸로 매달려 있는 그녀의 죄목을 줄줄 읊어주었다. 당연히 조작된 자백과 증거로 만들어진 판결이었다.

더 이상 말할 힘도 없던 그녀의 바싹 마른 입술에선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현실의 벽에는 아무리 저항해도 흠집 하나 내지 못하고 오히려 본인만 고통 받았다.

오직 자랑스러운 마법의 대의를, 올바른 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행동으로 보여주던 그녀는 이렇게 짓밟혔다.

'나는...'

그러나 그녀의 마음마저 쓰러진건 아니었다.

한때 마법과, 용종들의 후신에도 당당히 맞서던 인간을 동경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마법사 레이나. 이제 그녀의 마음에는 공허, 실망, 증오만이 남았다.

거꾸로 매달린 몸이 드디어 풀려나, 단두대로 질질 끌려가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비명을 지르느라 성대가 찢어지지만 않았다면, 기력만 있었다면 욕이라도 쏟아냈을 것이다.

지금 할수있는건 그나마 눈으로 그 증오를 뿜어내는 것 뿐이었다. 그동안 믿어온 사회와, 마법사에 대한 모든 신뢰가 박살난 그녀는 이미 반쯤 정신을 놓았다.

"근데 수사관님, 아무리 제명당했다지만 학회마법사 출신인데 잡범들과 함께 공개처형이라니요?"

"나도 몰라. 상부 지시다."

수사본부를 빠져나온 그들은 레이나를 공개적으로 범죄자들을 처형하거나 형벌을 내리는 곳으로 끌고갔다.

레이나의 눈에 단두대의 모습이 보였다. 그 밑에 굴러다니는 머리와 처리되고 있는 시체들도.

이렇게 본보기 삼아 처형당하는건 본래 살인범이나 강간범 등 흉악범들에 한한다. 그녀 같은 사람이 이곳에서 이름도 없이 속전속결로 처형당하는건 비정상적이었다.

"으극."

누군지 모를 남자의 시체가 치워지고, 여기저기 부러지고 지져진 만신창이던 그녀의 몸이 그대로 단두대에 끼워졌다. 눈을 가려주지도 않았다.

'왜...'

아마 그녀가 보는 마지막 광경이 되는 것은, 자신을 보며 야유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들은 당연히 그녀가 누군지도 모르고,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진심으로 전하고자 한 소식이 저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고자 했던 소식임을, 저들은 알아주지 못했다.

"집행해라!"

명령이 떨어진 순간 이제는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에서 눈물이 한줄기 흘렀다.

"아."

그때, 그 눈에, 군중에 섞여서 자신을 직시하고 있는 한쌍의 붉은 눈이 보였다. 그 눈을 본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

그 붉은 눈을 빛내던 여인의 얼굴이, 빠르게 검은 가면으로 덮이고 있었다.

*

"도대체 왜지?"

신우와의 짧은 만남 이후 다시 복귀했을 때.

이브는 당황스러움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이유는 인간들의 태도때문이었다. 여력을 갖고 있던 모든 병력을 신우에게 투자했기에, 이브는 여유를 찾은 인간들이 결집하여 둥지로 쳐들어 오는 것 까지 각오했었다.

그렇기에 이미 지반을 무너뜨린다거나 하는 수십가지 방어 계획도 설계해둔 참이었다.

하지만 인간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놈들의 움직임이 없어. 무슨 꿍꿍이가 있는게 분명해."

"...정말 그럴까?"

이브는 수만가지 가설을 동시에 시뮬레이션 하면서도 도통 감을 잡지 못했다.

하지만 그 곁에 있던 강도연은 피식 웃었다.

그녀는 인간에 대해 이브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브가 인간을 분석하고 이해했다지만, 애초에 단순히 공부하는 것으로는 그 형태와 문화도 복잡하기 그지 없는 인간이 과연 어떤 종족인지 알 수 없었다.

"내 생각엔, 그냥 아직도 못정한 것 같은데. 뭐 의견충돌이라던지 정보부족이라던지 이런걸로."

"말도 안 되는 의견이야. 그들은 발달한 사회조직과 지배체계를 가지고 그걸 활용할 기술도 충분히 갖추고 있어. 그리고 정보가 부족하다면 당연히 어떤 방식으로든 정보수집을 우선해야지 가만히 있는건 상식적으로 맞지 않아. 그 열악한 동굴속에서 살던 달빛요정들도 그정도는 했어."

"그런 합리적이고 체계적이고 계산적인 결과를 단번에 도출하여 움직일 수 있는 집단은 우리, 아니면 로봇뿐일거야."

강도연은 코웃음을 쳤다. 이브는 인간을 미개하고 비효율적이라고 깔보고 무시하면서도, 사실 그 누구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는 셈이었으니까.

"...정말 아무것도 안했다고?"

이브의 목소리가 굳었다.

짙은 분노가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물론 게이트를 얻어야 하니 어서 인간들을 죽이고 게이트 관련 기술을 빼낸다면 좋은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경쟁자이자 대적자가 되어, 자신의 성장에 쓰일 재료와 시련을 제공해야 할 이들이 보이는 한심한 모습에는 크게 실망했다.

"무쓸모한, 쓰레기들."

"하지만 아직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잖아."

"제발 그러길 빌지."

옥좌에서 일어난 이브가 다시 한번 계산에 들어갔다. 강도연은 그 모습을 보며 잠자코 서 있었다.

"정보가 부족한 탓인것 같네. 무슨 일이 있는게 분명해. 어쩌면 지난번 관측한 유닛 혹은 플레이어와 관련 있을지도 모르고. 놈이 우리 정체를 알아차렸다면 분명 모종의 움직임이 있겠지."

이브는 단숨에 판단을 마쳤다. 정보가 부족한건 사실이었다. 그간 움직임을 조심하느라 정찰병들을 내륙 깊숙한 곳, 예를 들면 총본산 메나스 근처까지 파견하지는 않았으니까.

변방에서 훔쳐듣거나 포로들을 심문해 얻는 정보에는 시차와 한계가 있었다.

"그럼 정찰병들을 더 깊이 보내는거야?"

"그래야겠지. 그래서, 이번엔 좀 특별한 정찰을 시도해야겠네."

순간 이브의 눈이 휘었다. 강도연은 그 감정을 알아차리고 움찔했다.

"누구보다 인간을 잘 아는, 완벽하게 위장해서 고등급의 정찰이 가능한 존재가 여기 있잖아."

"그, 그 사람들이랑 난 완전 달라?! 그냥 외국인, 아니 이세계인들이라고!"

"무슨 상관이야. 같은 인간종으로 겉모습은 똑같으니, 그냥 숨어들어서 이야기만 들으라니까."

자신을 가리키는 이브의 손가락에 당황한 강도연이 손사래를 쳤지만 이브는 이미 계산을 마쳤다.

정말로 강도연을 적들의 한복판, 대륙 수도 메나스로 잠입시킬 작정이었다.

"가서 철저히 보고 와. 인간들이 정말로 그정도까지 멍청하고 답답한지. 난 그렇게 생각 안해. 인간은 인간만의 강점이 있지. 내가 나만의 강점을 가졌듯 말이야. 난 절대 그것을, 얕볼 생각이 없어."

하이브마인드의 의지가 단호했다. 강도연은 결국 명령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녀 본인도 이브가 짠 계획이 합리적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만약에, 그들이 널 실망시키면 어떡하려고?"

출발을 위해 날개를 펼친 강도연이 슬쩍 질문했다.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던 이브가 슬며시 웃었다.

그러고선 팔을 들어, 사방을 가리켰다.

"처음 계산했던 최소한의 확장이 끝나가. 게다가 그곳에서 얻어 온 수많은 수확들이 있어. 짓밟고, 부숴서, 모조리 먹어치울거야. 단 한번에."

군단의 둥지는 단 한번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일대를 덮어가고 있었다.

제대로 된 방해 한번 받지 않은 그 확장 행위는 이미 끝물이었다. 일단 목표치를 채우고 나면, 끝도 없이 뿜어지는 대규모 병력으로 방해물들을 전부 치워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깨끗해진 이 세상을 다시 천천히, 완벽하게 전부 먹어치운다는게 이브의 계획이었다.

"...갔다 올게."

그 광경을 머릿속으로 상상한 강도연이 의심을 버리고 하늘로 날아올라 허공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그리고 레이나 일행이 붙잡혀 메나스로 끌려와 취조당할 때.

강도연은 야음을 틈타 메나스 인근 숲에 내려 앉아 신체를 변형시켜 위장을 시도했다.

그녀가 다시 숲을 빠져나왔을 때는, 검은 날개와 괴기한 갑각을 두른 괴인이 아닌 이곳의 평범한 여자들이 입는 수수한 옷을 입은 한명의 여인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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