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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92화 (92/254)

92화-혼돈과 영웅(10)

"...다른건 모르겠지만 로제스 그놈도 수사해야 하네. 지엄한 군법을 어기고 도망간 놈일세."

"당연히 의원님께서 부학회장을 고발하신다면, 그를 수사할 것입니다."

불구속으로 수사 당하게 된 오스틴은 자택에 연금되었다.

수사관은 현역 의원인 그를 정중하고 예의있게, 그리고 형식적으로 대했다.

형식적이라 함은 상식이 통한다는 것이나 바꿔말하면 참으로 진부하고 질질 끌린다는 것.

오스틴은 자신에게 걸린 고발의 목적이 그것임을 간파했다.

"독단적이고 비상식적인 지휘, 평시 규정 위반, 뇌물 수수...그런건 내 다 참고 넘어가지. 하지만 성추문이라니! 지금 그게...당장 내 손주가 올해 아카데미에 들어가는데!"

"하지만 유력 증인이 나와서, 수사는 해야 합니다."

문제는 지금 오스틴에게 걸린 혐의가 한두개가 아니란 것이었다.

수사관의 어쩌라고? 하는 눈을 본 오스틴은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부학회장 로제스 레블랑은 멍청하지 않다. 승부수를 띄우기 위해 모든 수를 동원했다.

오스틴은 자신의 고발에, 로제스 뿐만 아니라 평소 자신과 충돌하던 반대파 의원들도 있음을 눈치챘다.

하필이면 방위대의 총사령관으로 부임해, 어떤 적을 상대했든 결국 1만의 병력을 말아먹고 패퇴했다. 지금 정치적으로 굉장히 불리하다는 뜻이었다.

"우리가 상대했던 괴물들, 절대 만만히 보아서는 안되네! 다른 생존자들도 증언하겠지만 놈들은 세상을 파먹는 괴물들이야!"

"저도 보고를 받긴 했습니다. 하긴 방위대 1만을 상대로 승리할 정도면 참 괴이한 괴물들이긴 한가봅니다."

"...이 말은 엄연한 사실이네."

네가 패퇴해서 그 책임을 무마하기 위해 적을 올려치기 하는게 아니냐 하는 수사관의 속내를 알아차렸지만, 오스틴은 자존심을 접고 진심으로 경고했다.

통신구를 타고 이곳 중앙에도 소식들이 전해지긴 했지만, 지금 지옥도인 변방에 비해 중앙의 태도는 영 미적지근했다.

"그래봤자 미개한 짐승들 아닙니까? 물론 부학회장도 패퇴하긴 했지만, 그는 괴물들이 강해서가 아니라 병력간의 부족한 훈련도와 유약한 의지를 탓했습니다. 정예한 중앙군이라면 지지 않을 것이라더군요."

지금 보이는 수사관의 반응이 평균적인 반응이었다.

직접 상대해봤던 오스틴이 아무리 초대형종과 상위종의 힘에 대해 설명한들 패장의 변명일 뿐이었다.

'어리석은...곧 알게 될 것이나, 그래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한 이후일 것이다. 늙은 놈들은 권력투쟁에 여념하는 사악한 뱀이 되었고, 치열했던 그시절을 모르는 젊은 것들은 너무 평화에 찌들어 오만해졌어.'

혀를 찬 오스틴이 고개를 저었다. 진정한 혼돈은 겪어보기 전까진 모른다.

그리고 지금 그 혼돈은 분명 다가오고 있었다.

"너무 염려말고 기다리시죠. 그리고 그 괴물들의 출처가 고대의 미궁이며, 블레이클 부학회장이 그 사실을 알고도 무마하셨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지. 지금 자네, 내가 패전의 책임을 피하려 그것까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건가?"

"어이쿠. 그런건 아닙니다 의원님."

손사래를 치던 수사관이 씩 웃었다. 그뒤 수사관은 직접 차를 따라 그에게 건네주었다.

"단지 그 증언의 출처는 의원님이 아니라 오로지 그 레이나라는 연구마법사던데...그녀가 되도않는 '거짓말'로 의원님을 현혹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슬쩍 눈짓했다. 그것을 본 오스틴은 절망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수사본부에 붙잡혀 있을 레이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다시 한번 이야기 해보지."

어둑한 지하 취조실. 아니, 사실 번듯한 취조실보다는 다른 곳에 가깝다. 애초에 취조실 푯말이 붙은 방은 저 위에 따로 있으니까.

"무슨 일을 당했었다고?"

"...블레이클의 부학회장 로제스는 미궁에서 나와 도움을 요청하던 달빛요정 생존자 소년의 말을 무시하고, 연구소장과 결탁해 개인적 연구를 위해 살해했습니다. 그 사실을 목격한 저를 공격하고 감금시켰으며, 미궁에서 기어나온 괴물들에 대한 진실을 알고도 은폐한겁니다."

레이나의 푹 젖은 금발에서, 오똑한 코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창백해진 얼굴로 덜덜 떨며 이를 딱딱 거리면서도 그녀는 지금까지 수십번 이상 반복한 증언을 다시 한번 내뱉었다.

"음, 어린 계집년 치고 이렇게 독한년은 또 오랜만이군."

"우븝..."

수사관의 지시에 그녀의 머리가 다시 얼음장 같이 차가운 물웅덩이에 쳐박혔다.

억센 사내들이 짓누르는, 단단히 구속당한 가녀린 몸이 마구 경련했으나 그들이 그녀를 다시 꺼내주는건 그로부터 2분이 지난 뒤였다.

"끄윽...우웨에엑!"

2분뒤 꺼내진 그녀가 물을 토해냈다. 몸의 떨림은 더 심해지고, 눈도 거의 풀렸다.

물고문만 몇시간을 연달아 받았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이미 항복했을 시간.

"자, 다시 말해볼까?"

"블, 블레이클 학회의 부학회장 로제스는..."

그러나 레이나는 물을 뱉어내면서도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오죽하면 이런 고문수사에 능한 수사관이 대단하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하지만 말이지, 아무도 너 같은 일개 연구마법사는 신경 안쓴다고? 매달아. 내장에 남은 물도 깨끗하게 뱉어내게 해주지."

다만 이미 지령을 받은 수사관은 반드시 들어야 할 대답이 있었다.

정신을 못차리는 푹 젖은 레이나의 몸이 양 발목에 줄이 묶여 공중에 거꾸로 매달렸다. 순식간에 피가 몰린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정강이까지 오던 치마가 뒤집어져 속옷이 훤히 보였지만 지금 그런데 신경쓸 겨를은 없었다.

"꽤 반반한 얼굴이라서 건들기는 싫었는데."

수사관의 지시를 받은 사내들이 큼직한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왔다. 그녀의 흐릿한 시야에, 그 몽둥이들이 자신의 몸을 겨냥해 위로 치켜올려지는게 보였다.

*

"좀 진정하고 차분히 있는게 어떤가 블레이클 부학회장? 학회장도 돕겠다고 나선 마당에."

"...지금 자네 같으면 편히 있을 수 있겠소?!"

"대체 뭘 걱정하는지 모르겠군."

오스틴은 자택연금, 레이나는 수사본부의 지하 고문실에서 고문당하고 있던 그때.

그 둘을 고발한 로제스 역시 편한 상황은 아니었다.

"슐츠 의원은 일단 패장이고, 각종 의혹들도 한번에 터트렸지. 그 레이난가 하는 일개 연구마법사야 사실 이대로 죽여 묻어버려도 문제 없고. 당신도 패전 책임은 져야겠지만, 고작 그정도로 이렇게 불안해하나."

"그보다 더 복잡한 것들 때문이네!"

조금도 가만있지 못하고 융단 위를 빙빙 돌고 있던 로제스가 결국 빽 소리를 질렀다.

그에게 말을 걸며 여유있게 의자에 앉아있던 사내는 찬란한 은발을 가진 젊은 사내. 그의 황금빛 눈이 반짝였다.

"복잡하다? 무엇이?"

"그 괴물들...절대 만만히 보아서는 안되네."

"그래? 증언할때는 별거 아닌 놈들이라고 침을 튀기며 말하더니. 혹시 그놈들, 유닛으로 보이던가?"

그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그걸 본 로제스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애초에 자신이 플레이어인 것을 알아보고 먼저 접근한게 그였다. 그 이후 서로의 세상이 겹치지 않는다는걸 확인하자 먼저 동맹의 손을 내민 것도 그였다.

"그건 잘...모르겠군. 어차피 '자네들'은 보기만 하면 알 수 있지 않나."

"그렇지. 그분의 피로 얻은 권능은, 우리에게 미물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하시는 선구안을 주셨으니."

그는 유닛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강한 유닛.

남들은 모르겠지만, 로제스는 그들이 경쟁 유닛이라며 전 대륙에서 비밀리에 몰살한 사람들의 숫자만 가히 일천에 육박하는걸 알고 있었다.

'대륙의회 최연소 의장이 유닛인데, 사실상 대륙 전체가 그의 손에 있는데 다른 놈들이 버틸 수 있을리가.'

자존심 하나는 알아주는 로제스가 그 자존심을 꺾어야 할 몇안되는 상대기도 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는지 그는 은색 머리를 쓸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한번 보기는 해야겠군."

"만약 유닛이라면? 너무 여유로운 것 아닌가?"

"우리가 질것 같은가? 대륙 전체가 우리와 함께하는데? 글쎄. 그리고, 최전방에서 들어온 보고들에 의하면 그 괴물들이 단번에 사라져버렸다던데."

"그건..."

로제스는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괴물들이 사라졌다. 쉬지도 않고 계속해서 날뛰던 괴물들이.

만약 괴물들의 날뜀이 그 이상으로 더 심했더라면, 지금 이렇게 여유롭게 대화할 수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체 뭐지?!'

그덕분에 처지가 상당히 애매해진 로제스는 이걸 호재라 해야할지 악재라 해야 할지 정확히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빠르게 처리하는게 낫지 않겠소? 괜히 시간을 줬다간 그 괴물들이 얼마나 강해질지 모르오."

"일리있는 말이지만, 이왕 기회를 잡은 김에 내부 단속을 확실히 하고 가야지."

로제스는 안달냈지만 그는 계속 여유로웠다. 근거는 자신이 플레이어에게 하사받은 권능이었다.

본신의 능력과 결합한 그 권능을 쓰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들은 강해진다. 그러니 시간은 자신들의 편이다.

그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단지, 시간이 지나면 성장하는게 그들만 있는건 아니었다. 그것도 상상을 벗어나는 속도로.

문제는 그들은 그걸 모르고, 아니 상상조차 못하고 있다는 것.

세상은 넓고 본인들은 결국 우물안 개구리에 불과하다. 다른 세상의 전대 마왕 칼타스가 그토록 경계하던 오만함과 자만심에 그들은 그대로 빠져든 상태였다.

"이참에 오스틴 같은 반대파는 날려버리고, 의회 전체를 먹을 기회지. 당신은 학회쪽에 좀 신경쓰시오."

"...알겠소."

"당신 비리를 폭로하던 그 여자는 신경쓰지 말고. 취조중 죽여도 되고, 역으로 털어서 처형시켜도 되니까."

로제스도 눈치를 볼 정도의 과격함을 갖고 있던 그는 잔에다 여유롭게 차를 새로 따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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