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혼돈과 영웅(9)
"저거 설마 헬기인가? 미친 괴물새라던지, 괴물 박쥐가 아니라?"
[헬기가 맞다]
정처 없이 황무지를 걸은지 이틀이 지나, 나는 슬슬 위험한거 아닌가 싶었던 차에 드디어 아군을 발견했다.
헬기는 나를 못본 것 같지만 그건 상관 없었다. 날 보게 만들면 그만이니까.
나는 검을 치켜들고 힘을 움직였다. 아직까진 내 힘이 부족해서 이 힘을 뿜어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공명법의 오의는 다른 힘을 그대로 가져와, 내것과 섞어 발현하는 것.
내 반대 손에 쥐여진 광석에서 빨려 온 에너지가 그대로 검으로 이동해 검붉게 타올랐다.
이걸 경광봉마냥 마구 흔드니 효과가 있어보였다.
[봤나보군]
허공에 떠오른 글자 너머로, 헬기의 움직임이 변하는게 보였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지금은 다른거 다 떠나서, 시원한 물이랑 따뜻한 음식이 먹고 싶었다.
"곧 호송차량이 올겁니다! 저희는 계속 임무를 수행해야 해서!"
"감사,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모두가 영웅의 생환을 기뻐할 겁니다!"
"...예? 잠, 잠깐만!"
헬기 프로펠러의 소음으로 시끄러운 현장.
그 일본인은 기다리라는 내 말에도 엄지손가락만 들어보이며 다시 헬기에 올라탔다.
나는 그가 전해준 통신기와 수통만 든채 멍하니 헬기가 다시 떠나는걸 지켜보고 있었다.
정신이 얼떨떨했다. 굉음에 가까운 프로펠러 소리 때문은 아니었다.
"그야 내가 살아 왔을거라 생각은 못했겠지. 근데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다시 생각해봐라. 진위를 모르는 그들의 입장에서, 네가 한 행동이 어떻게 보였을지]
"...아, 이런 미친."
나는 그제서야 눈치채고 땅을 쳤다.
그당시 내 생각은, 시간을 벌고 사람들을 살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단을 소환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군단을 보여줄 수는 없다.
그 생각 뿐이었다. 그래서 나 혼자 남고 사람들을 먼저 보낸 것이었다.
문제는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누가 봐도 오해할 모습이었다.
"난, 난 노리고 한거 아니야."
[잘 알고 있을 텐데...남들은 그렇게 안본다는게 문제겠지. 대패, 궤멸, 절망과 슬픔. 그 와중에 들려온 기적 같은 이야기. 이목이 집중되는게 당연한게 아닐지]
"망했다."
저 멀리서 부릉거리는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긴급히 달려오는 군용 차량.
생각해보니 나를 데리러 군용차량이 오는 것도 이상하다. 나는 일개 용병신분으로 참여한건데.
"강신우 씨. 저는 연합군 제 32군단 작전참...아니 그냥 성진우 준장이라고 부르시죠."
"아..예. 준장님."
그리고 차에서 내린 중년 아저씨의 방탄모에 별이 하나 보일때 나는 내 예상이 맞았음을 직감했다.
"타시죠. 모두가 힘들어 하는 이때, 그나마 좋은 소식이 있다면 바로 강신우씨의 생환 소식입니다."
그는 나를 직접 에스코트해서 차 뒷좌석에 태워주었다.
부담스러워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어째 운전석에 있던 병장의 눈이 반짝반짝거렸다.
"강신우씨 덕분에 살아서 귀환한 이들이 다들 입을 모아 이야기 하는 통에 이미 전부 퍼졌습니다. 아마 지구까지 다 퍼졌을 겁니다."
"...그렇겠죠."
진형도, 종교도, 이념도 초월한 유례 없는 전세계 국가들의 연합이었다. 그렇기에 연합군은 그 자체로 지구인들의 자부심이었으며 하나의 상징이었다.
연합군의 전공은 지구 전체가 집중하고 있는 특종이었으며 연합군의 승리가 곧 지구의 승리였고 패배는 지구 전체의 패배였다.
"너무나도 암울한 상황에 닥친...한줄기의 희망."
그가 태블릿을 하나 꺼내들었다. 거기 찍힌건 흐릿하게 흔들린 단 한장의 사진이었다.
바로 군단과 적들이 벌이는 대전쟁의 광경이 찍힌 사진.
"그러니 진실을 이야기 해주십시오. 군이 가진 자료는 정찰헬기가 격추당하기 직전 촬영해 전송한 이 사진 한장이 전부입니다...!"
그가 진지하며 동시에 간절함이 엿보이는 눈으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잠깐 충격 받아 가출하려던 정신을 붙잡고 이성의 끈을 이어 붙였다.
들킨게 아니다. 적어도 군이 가진 자료가 이 엉망진창인 사진 하나뿐이라는건 사실 같았으니까.
"실은, 남겨진 포탄과 폭약들로 놈들을 매장시키려던건 사실입니다."
차분히 거짓말을 시작했다.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과거였다면 지금 같은 상황에 입도 벙긋 못하겠지만 나는 최근 몇달간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하지만 갑자기 그것들이 나타났습니다. 이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소,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괴물들 같은데."
"저도 직접 봤지만 잘 모릅니다. 할 수 있던건 서둘러 몸을 피하는 것 뿐..."
말은 술술 나왔다. 군단은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괴물들, 나는 그냥 몸을 피해 자기들끼리 싸우는걸 구경했다 등등.
못믿으면 어쩔건가 어차피 증거도 없는데.
무엇보다 갑작스레 뭉쳐버린 마수며 창을 휘두르는 이상한 해골도 있는데 괴물들끼리 싸웠다는게 못믿을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람들에게도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준장님이 뭘 걱정하시는지 알아요. 그래도 믿어주시죠. 거짓말을 하는 것보단 진실을 알리는게 좋을 겁니다."
나는 실망의 빛이 스치는 준장의 얼굴에 쓰게 웃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강력한 영웅의 탄생이 아니라 그저 우연찮은 일이었다는게 아쉬울 테니까.
그러나 주둔지에 도착해서 사람들에게 진실을 발표해도 반응은 달라지지 않았다.
"어쨌든 넌 계속 싸운다는거 아니냐."
"그, 그렇죠."
"그럼 그걸로 충분해. 넌 이미 영웅이다. 사람들 모두 그렇게 생각해. 오히려 더 좋아하겠지, 네가 초월적인 강함도 없으면서 앞으로 나섰다는 사실에."
로버트가 당황한 내게 다가와 씩 웃으며 말했다.
*
"어서..."
"성문! 성문을 열어라!"
늦은 저녁, 철통같은 경계를 서던 도시의 병사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성벽은 사실 과거의 유물. 하지만 이 과거의 유물이 지금은 큰 보루가 되어 그들을 지켜주었다.
"대륙 의회 의원 오스틴 슐츠와 블레이클의 연구 마법사 레이나가 방위군을 수습해 왔다고 상부에 보고하게. 그리고 지금 당장 게이트를 열어! 메나스로 갈 수 있게!"
"아, 알겠습니다!"
허겁지겁 달려 온 책임자는 오스틴의 호령에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몸을 돌려 반대로 뛰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오스틴과 레이나는 병사들이 가져다 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대체 그놈들은 뭐였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네. 정말로 파멸귀라고? 기록과는 너무나 달라."
레이나의 말에 오스틴이 혀를찼다.
그들은 패잔병을 수습해 우선 로제스가 있을 별동대를 쫒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로제스가 이끌던 별동대가 궤멸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 놈들이 수십, 수백?'
오스틴은 자신이 상대했던 상위종이 하나가 아니었음에 전율했다.
'게다가 그 검은 날개는...'
거기다 상위종보다 강해보이는 존재가 있음에 기겁했다.
그나마 그들이 들키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건, 그들이 보았던 것들을 포함 전방위적으로 공세를 펼치던 적들이 한순간에 전부 사라졌었기 때문이었다.
"의원님! 확인 되었습니다. 현재 로제스 레블랑 부학회장은 메나스에 있습니다!"
"으으음. 역시 한발 빠르게 도망친 것인가!"
게이트가 자리한 시청으로 향하던 그들에게 문의했던 소식이 들려왔다. 오스틴은 이를 갈았다.
다른거 다 떠나서, 별동대를 자원했던 로제스가 정작 위기의 순간이 오자 혼자서 도망친건 참작의 여지가 없었다.
"너무 노여워 마십시오. 반드시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겁니다."
이젠 오히려 레이나가 그의 분노를 말려야 할 정도였다.
그들은 머지않아 게이트 앞에 도달했다. 대륙 의회에서 선출된 도시의 시장이 굽신거리며 오스틴의 앞에 섰다.
"의원님, 좀 쉬다 가시는 것이..."
"시끄럽소. 지금 대륙의 명운이 달려있으니 망설일 시간이 없소이다. 어서 게이트를 여시오."
오스틴이 미간을 찌푸리자 움찔한 시장이 괜히 시청 마법사들을 다그쳤다.
곧 거대한 거울 같은 장비가 설치된 마석들에서 마력을 흡수해 푸르게 물들더니, 진동하기 시작했다.
'역시 의원님을 설득한게 신의 한수였다.'
레이나는 이 일사천리를 보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개 연구마법사가 아무리 떠들어봤자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을 테지만, 대륙의회 현역 의원의 말은 달랐다.
"크흠. 어서 가지."
곧 푸른 장막이 눈앞에 펼쳐졌다. 오스틴은 지팡이를 딱딱거리며 앞장서서 게이트로 향했다.
"일단 멈추시죠. 가시긴 하셔야 하지만, 저희와 함께 가셔야 합니다 의원님."
그러나 그의 걸음은 몇걸음 못가 멈춰섰다.
들어가야 할 장막 안에서 몇 사람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검은 제복을 갖춰 입은 건장한 남녀 십여명.
그들을 본 레이나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블레이클 학회의 부학회장, 로제스 레블랑께서 여러분을 고발하셨습니다. 조사를 위해 협조해주시길."
선두에 있던 금발의 사내가 문서 하나를 들어 보여주었다.
"고발이라니! 임무를 저버리고 도주한건 그자가 아닌가! 감히 적반하장으로..."
격노한 오스틴이 로브를 펄럭이며 손가락질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가서 하시죠. 모셔."
그러나 그들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남녀 한쌍이 그의 곁으로 다가오자 이를 간 오스틴이 팔을 뿌리치고 자기 발로 걸어 장막 안으로 향했다.
"지금 이럴 시간 없습니다! 미궁에서 기어나온 끔찍한 괴물들이..."
"그건 우리도 알지만, 일개 연구마법사가 무례하군. 감히 수사관에게 항명하는 것인가? 지금은 그까짓 괴물들보다 비리를 찾는게 더 중요하다."
"그, 그까짓?!"
발끈한 레이나의 목에는 대놓고 검이 겨누어졌다.
결국 레이나까지 붙잡혀 장막을 넘은 가운데,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시청에는 눈치만 보는 시청 사람들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