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혼돈과 영웅(8)
"..."
"그 꼴이 되어서도 죽지 않는건 신기하지만, 아무래도 진득한 이야기는 다른 놈이랑 해야겠네."
이브가 잘린 적장의 손에서, 빛이 반짝이던 반지를 빼내었다.
동시에 불타던 해골의 안광이 꺼져버렸다. 역시 해골바가지 상태로 움직이던건 마법 같은 특수한 힘이 작용한 덕이었겠지.
이제 더 이상 적은 없다. 나는 슬쩍 눈치를 보며, 날 감싸고 있는 상위종들을 지나쳐 이브에게 다가갔...
"야! 그만 도망가!"
내가 걸음을 옮길때, 강도연이 후다닥 도망치려던 이브에게 빽 소리를 질렀다. 이브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오빠도 알겠지만 지금 이브는 부끄러워 해."
"그, 그런게 아니야!"
동생의 말에 이브가 뒤통수만 보이면서 발끈했다. 그 모습에 나는 강도연의 팔을 잡고 말렸다.
부끄러워한다? 맞는 것 같지만 나는 이브의 감정이 조금 더 복합적인 것이라고 짐작했다.
"부끄러운거라기 보다는. 그냥 혼란스러운거라고 생각해. 말 그대로 우리 관계는 다른 유닛이나 플레이어에 비하면 특별하고, 너도 특별하지."
나는 굳이 이브가 아니라 당장 옆에 있는 상위종을 보면서 말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저 장발의 여체는 하이브마인드 이브가 조형한 스스로의 아바타일 뿐, 그 본질은 지금 이자리에 있는 모든 군단병이 곧 이브였으니까.
"특별하다."
"우리는 모든 순간을 함께했지. 잘 살다가 갑자기 만난 다른 이들과는 달라. 그리고 끊을 수 없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나는 이브가 내게 가진 집착의 감정이 절대 단순한 애정 따위가 아님을 안다.
신실한 신도가 자신의 신에게 가진 신앙심, 아이가 부모에게 갖는 신뢰와 애정갈구, 연인들이 갖는 호감 등 그 모든게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타인은 절대 이해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할 감정.
"...맞아. 우리는 특별해."
내 설득이 통했는지 지금껏 뒷머리만 보여오던 이브가 중얼거리며 자신의 몸을 천천히 돌렸다. 아직도 가면에 쓰여있었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다.
나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이브는 더 이상 자신의 몸을 피하지 않았다.
여동생의 몸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몸이지만, 스스로 계속 개량했다던가? 그래서 지금은 겉으로 보이는 세밀한 모습들도 분명 다르다.
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브는 그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으직, 하는 소리와 함께 가면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살짝 움찔했지만 그냥 그대로 가면을 벗겼다.
그동안 몰래 여러 모습들을 봐오긴 했지만, 사실 가면 속 얼굴을 보는건 처음이었다.
새하얀 피부가 보였다. 작고 붉은 입술도, 붉게 번득이는 눈도.
"...좋아해?"
이브가 자기 가슴에 손을 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우리는 감정을 공유한다. 숨기지 못하는 내 감정이 그대로 이브에게 흘러들어갔다.
"네가 깊숙한 미궁 최하층의 세포웅덩이였을 때부터 지켜봤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보여주는 이브의 얼굴은 확실히 아름다웠다.
숨길 이유가 없었다. 지금 나는 충분히 좋다. 마치 자수성가한 훌륭한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 이럴까.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간다]
다만 우리는 계속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우릴 둘러싸고 지켜보던 군단병들이 하나 둘 사라져갔다. 유닛 소환권에 달려 있던 시간 제한이 발동한 것이다.
"...왜, 왜 그래?"
그러더니 갑자기 눈이 흔들리기 시작한 이브가 안절부절 갈팡질팡하기 시작했다.
나는 순간 당황해서 이브의 양 어깨를 턱 하니 잡았다.
"에이씨! 그냥 껴안아! 나한테 했던 것처럼! 그러니까 그만 물어봐 나 머리 터질 것 같아!"
강도연이 갑자기 소리를 빽 지른게 그때였다.
그러나 나는 녀석을 돌아볼 수 없었다. 이브가 냅다 달려들어,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 충격에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이브는 당황해서 말도 잃은 내 위에 올라타고는, 그 긴 머리를 늘어뜨리며 웃고 있었다.
"곧 다시 만날 수 있어. 마법사들을 먹어치우고, 게이트를 열거야."
"어...? 그, 그래. 그렇겠지."
"그때가 되면, 하나가 되어 영원히 함께."
이브가 순간 눈을 반짝였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한줄기 흘렀다.
역시 군단인 이브의 가치관에서는 결국 모든것이 그것으로 귀결된다. 하나가 되어 함께 완벽해지자는 것.
"하나가 되면 척살권에서, 죽음에서 자유로워. 우리는 더 강해질 수 있어."
"거부하지 않을게. 나도 네 힘을 원해. 하지만 약속해줘야 할게 하나 있어."
나는 당황스러움을 누르고 이브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런 상황, 이미 예상한 바였다. 이브가 이렇게 나올 것이라는 것도.
"언제나 영원히 내 말을 듣는 착한 이브로 남아주길 바라는데."
"어렵지 않아. 늘 그래왔는걸."
이브가 그게 뭐가 어렵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실 그건 착각이었다. 지금껏 나는 단 한번도 이브가 거부할만한 부탁은 한적이 없었으니까.
물론 길들이는건 앞으로 천천히 하기로 하고, 지금은 이브에게 만족감을 주기만 하면 족하다.
"잘 가. 어차피 계속 보겠지만."
내 마지막 인사와 함께 빛에 휘감긴 이브의 얼굴이 점차 투명해졌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브가 날 배려해줬어."
"...미안해."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 선택이었고, 앞으로도 내가 선택해."
마지막으로 남은건 강도연이었다. 하지만 내 사과에도 애써 담담히 말하는 동생의 몸 역시 투명해지고 있었다.
"오빠가 싸우듯 나도 싸워. 그러니 앞으로 있을 일만 생각해."
녀석은 내가 잡으려던 손을 매몰차게 빼고 등을 돌렸다.
나는 동생의 성격을 안다. 저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담금질을 당했는지도 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면 내가 간섭할 여지가 없다.
"엄마한테 뭐라도 말하고 싶은데, 지금 내가 가진게 아무것도 없어."
"길이 없는건 아니야. 그러니 반드시 돌아와."
속에서 치미는 무언갈 억지로 눌러참는 목소리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나마 희망이 없는건 아니었다. 이브가 세상의 벽을 넘는 기술을 알아내면, 넘어올 수 있다.
그때 만나면 된다.
비록 나도, 동생도 여러모로 달라졌지만 그딴건 중요하지 않다는걸 우리 남매 모두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잘 있어."
결국 훌쩍임을 숨기지 못한 강도연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이제 이 황무지엔 처참한 흔적들과 함께 나 혼자 남게 되었다. 마치 한바탕 꿈을 꾼 것처럼,군단은 그 어느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나는 멍하니 몸을 돌렸다.
"급한불은 껐지만, 말그대로 급한불만 껐어. 연합군은 어떻게 되는거지?"
[네게는 군단의 행보가 더 중요하다. 너와의 만남으로 또 한번 성장한 이브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 그것에 집중해라. 그래야만 머지않아 게이트를 열고 지구에 등장한 이브가 순종적인 아이가 될지, 너를 제외한 전지구를 멸망시킬 대재앙이 될지 조절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 지금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내 혼잣말에 글자가 주르르륵 떠올랐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사실 이브와의 대면은 당연히 벌어질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때를 대비해서 움직여야하고.
"...와, 근데 언제 가냐."
나는 끝도 없이 펼쳐진 황무지를 보고 고개를 떨궜다. 일단 주둔지로 돌아가야 하는데 길이 막막했다.
*
"대, 대체 어찌된 일이오?"
"...잘 모르겠군. 그 괴물들은 마계의 생물들이 아니었다. 보다 더 깊고 끔찍한...그 영혼마저 제대로 읽어낼 수 없는 놈들이었다."
연합군 본대가 궤멸된 자리.
마수군단보다 뒤늦게 도착한 코볼트와 놀 연합군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풍경에 당황해 허둥거렸다.
깨어난 전대 마왕, 칼타스는 조용히 후드를 걷고 바닥에 말라붙은 피를 만지작거렸다.
"급히 다시 보냈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무것도. 오직 아군의 시체 뿐이다. 이것도 역시 그 '게임 시스템'의 힘 아닌가?"
그의 눈 역할을 하던 괴조는 진즉에 군단의 비행종에게 독침을 맞고 죽었다.
덕분에 알 수 있던건 정체불명의 괴수무리에게 아군이 몰살당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충신 가르틴이 완전히 죽었다는 것 뿐.
그의 뇌리에, 마지막 순간 홀로 마수군단을 가로막았던 인간의 모습이 스쳤다.
"그럴리가 없소. 플레이어께서 말씀하시길, 설령 당신이 말하는 그 괴물들이 유닛이라 한들 자신의 유닛을 대량으로 소환할 방법은 없다고 하셨소. 차원문 같은 마법의 낌새는 없다고 하지 않았소? 시체도 남지 않았다는건 또 뭔지."
"그렇지...분명 대규모 마력이 동원되어야 할 마법의 조짐은 전혀 없었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말 별의 별 해괴한 재주들이 많다. 혹시 모르지.'
다만 경계심을 풀지는 않았다. 이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있는지 깨달은 그는 더 이상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어, 어쨌든 사라졌으니 된 것 아니오. 플레이어께선 어서 다음으로 넘어가자고 하시는군."
코볼트 대족장이 눈치를 보며 그를 재촉했다.
코볼트들의 플레이어, 로제스는 지금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던 탓에 칼타스가 두루뭉술하게 말한 군단이 자신을 습격했던 이들과 동일함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어차피 자기 유닛들과 싸운 것도 아니었으니까.
"놈들이 다시 군대를 보내기 전에 지구를, 역으로 공격한다."
칼타스는 다음 계획을 실행했다. 코볼트와 놀들을 자신의 병력과 함께 지구로 보내주고, 현재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다른 곳에도 개입하여 균형을 부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