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혼돈과 영웅(5)
"이런..."
선두부분에 있던 차지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지금 몰아닥치는 저 폭풍은 방금 전 일격에 비하면 더 거칠고 힘들 것이라고.
"땅이..."
"땅이 진동한다!"
이런 상황을 감히 예상치 못했던 연합군은 패닉에 빠졌다.
애초에 그들이 상정했던 적은 놀과 코볼트.
마계가 어떤 곳인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예상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꽉 잡아!"
[플레이어가 능력을 발현했다. 대가를 바치고 힘을 얻어 싸워라]
마치 지진을 연상시키는 진동 끝에 차지연과 크리스가 타고 있던 차량이 위치한 지면이 펑 하고 터져나왔다.
차지연은 하늘로 튕겨 올라감과 동시에 품에서 꺼낸 단검으로 손을 그었다.
초중반에 애용한 플레이어가 갖고 있는 기능중 하나. 피를 받아, 그녀의 힘이 강화되었다.
"으아아아..."
땅으로 떨어지는 크리스를 무시한 그녀가 전신에 전격을 두른채 차량을 부수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푸른 눈을 번득이며, 땅을 뚫고 나온 그 괴물을 향해 번쩍이는 뇌전을 날려보냈다.
마계땅강아지들과 함께 땅에서 튀어나와 본대를 기습한, 이 땅의 지하에서 살아가던 오래된 고대의 생물.
그녀의 전격에 맞은 놈이 두께만 수십미터인 몸을 비틀어 그녀를 향해 입을 들어냈다.
얼굴에 오직 입만 달고 있는 이 데스웜은 거대한 전차나 자주포도 한입에 삼켜버릴 큼직한 입을 쩍 벌려 포효했다.
'가능할까?'
차지연이 식은땀을 흘렸다. 저 촘촘하고 거대한 이빨들.
자신이 최대출력을 뿜어내도 상대하는게 가능할지 장담할 수 없다.
[그것을 써라. 플레이어가 척살권은 아끼기로 결정했다]
"큭..."
그것의 입질을 겨우 피한 그녀가 꺼내든 물약병을 바라보았다. 지상에서 싸우고 있던 크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하사품으로 받은, 순간적으로 스트링을 극대화 한다는 물약.
그녀는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천혼술의 근본은 자신의 혼이다. 그리고 지금 네 혼은 네 동료 121명과 강하게 연결되었다. 그것이 곧 힘이니, 싸워라]
잠시 비틀거리던 그녀가 전격이 번쩍이는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을 중심으로 몰아치는 전격의 폭풍을, 그대로 폭사해냈다.
천갈래 만갈래로 갈라지는 거대한 전격이 허공을 가르고 지면을 꿰뚫었다. 족히 수백을 넘는 적들이 크기를 막론하고 감전당해 터지고 타죽었다.
땅에서는, 그녀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적들을 향해 마찬가지로 능력을 강화한 크리스의 지진이 땅을 뒤흔들며 적들을 넘어뜨리고 짓눌렀다.
[영혼공진. 막대한 힘을 얻을 수 있으나...종국에는 연결된 영혼들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버려, 자아를 잃게 된다]
[물론 그런건 고려 대상이 아니다]
[적이 살아남았다]
지금은 의식이 꺼진 차지연과 크리스의 뇌리에 그들은 듣지 못하는 공허한 목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데스웜은 비록 외갑이 반쯤 부서지고 여기저기 체액을 흘리면서도 전격폭풍과 지진에도 살아남았다.
다시금 입을 벌린 데스웜이, 차지연을 향해 입을 들이밀었다.
"정신 차리십시오."
그때 붉은 불길이 한차례 터져나왔다.
데스웜의 거대한 목이 천천히 지상으로 떨어져내리며, 참격을 쏘아낸 지창현이 전격을 무시하고 차지연을 데리고 지상으로 복귀했다.
"사람들이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정, 정신 차렸으니 이 손은 놓으시죠."
지창현은 그녀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곧 연결이 끊긴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그의 손을 밀어냈다.
"강하더군요. 두 사람덕에 최악은 면했습니다."
"...솔직히 두번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요."
의식이 끊겨 영혼공진의 진상은 모르지만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란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 싸워야 합니다."
지창현이 검을 들고 앞에 나섰다. 데스웜은 죽었지만 그보다 더 강하고, 빠른 무언가가 그들의 앞에 내려앉았다.
"인간들에게 죽음 있으라!"
마수의 군주 가르틴. 그가 인간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포효한 뒤 손에 든 장창을 휘두르며, 물밀듯이 몰려오는 괴물들을 쏟아부었다.
이미 갑작스런 땅 속 기습으로 대형이 무너진 본대는 포격이고 뭐고 제대로 된 저항을 할 수 없었다.
"네놈이 가장 강해보이는구나."
"...유닛인가?"
지창현과 가르틴이 서로 마주쳤다.
물론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다. 단지 서로 죽이려는 살의만을 느낄 수 있을 뿐.
"마계의 영..."
가르틴이 단숨에 땅을 박차고, 지창현을 향해 마력이 타오르는 창을 휘두르려했다.
그러나, 그 창은 결국 검을 들고 방어하려던 그의 발끝에도 닫지 못했다.
가르틴은 달려오던 그대로 땅에 쳐박혀 꼴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그상태로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이건 설마."
"플레이어가 써버렸군. 척살권."
차지연을 부축하던 크리스가 피식 웃었다.
놀란건 검을 휘두르려던 지창현도 마찬가지. 그 역시 눈을 크게 뜨고 바닥에 쓰러진 가르틴의 시체만 보았다.
하지만 그는 금세 평정을 되찾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수습이라도 하려면 저희가 서둘러 사람들을 구해야..."
"조심해요!"
지창현이 다시 움직이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
사색이 된 차지연이 쏘아낸 뇌전이 뒤에 꽂혔다.
"흐, 흐흐...마계에 영광 있으라."
새하얀 부리가 딱딱거리고, 두개골 속 안광이 푸르게 번득였다.
새하얀 백골이 되어 몸을 일으킨 가르틴이 다시 창을 들어 지창현을 향해 휘둘렀다.
*
"야, 이거 안되겠다. 이번엔 진짜다."
로버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용병도 지금 답을 내놓지 못할 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전열이 붕괴했다. 차지연, 크리스, 지창현 3인의 강자가 버티고 있던 전열이.
지금 들이닥치는 마계의 생물들은 오직 돌격 뿐이다. 빗발치는 총탄 사이로 뛰어드는 괴물들은 그 자체가 공포가 되어,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트리고 절망으로 물들였다.
나는 이런 비슷한 광경을 이미 여러번 보았다.
군단을 상대하는 적들의 시선으로 군단을 본다면 이런 기분일지.
"크흡...후퇴! 후퇴!!"
무전기에서 과연 책임자가 제대로 전달된게 맞나 싶은 다급한 후퇴명령이 하달되었다.
하지만 이미 전부 덮쳐진 마당에 질서를 갖춘 후퇴 따위는 없었다. 그냥 도망치는 것 뿐이었다.
나는 그 와중에 한 기관총 사수를 덮치려는 괴조를 휴대폰으로 찍었다. 이제 남은 표본 숫자는 9개.
레벨업의 낌새가 보이질 않으니 이제 남은건 9번의 기회 뿐이었다.
"어서 타! 일단 튀어!"
총을 쏘던 로버트가 내 팔을 붙잡고 잡아 끌었다. 지휘체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우리를 비롯한 에볼루션 관계자들을 비롯해 연합군 군인들도 대열을 이탈해 탈주하기 시작했다.
숨을 몰아쉰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향하는 차량들은 채 서른대가 안되었다.
대패, 아니 궤멸이었다.
소식으로나 들었던 궤멸을 내가 참전한 곳에서 당한 것이다. 아니, 그보다 대체 무슨 수를 썼기에 그동안 평범한 동식물처럼 굴던 마계의 생물들이 우리를 공격하는거지?
"저기 협곡이 있다. 저 협곡에서 몸을 피하고, 주둔지로 간다."
로버트는 무전기를 붙잡고 다른 이들과 소통하며 방향을 정했다.
목적지는 저 앞에 보이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좁은 협곡.
[도망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썬루프를 통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미 하늘도 저 괴물들의 영역이었다. 아군 정찰기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놈들의 눈에서 벗어날 수 없는건 확실했다.
"이런 씨...저 새끼들, 우릴 쫒아온다!"
"일단 협곡으로 가. 거기서 방어하든 뭘 하든 해. 개활지에서는 절대 못이겨!"
콕스의 외침에 화를 낸 로버트가 더 거칠게 지시했다. 패닉 상태에 연합군 수뇌부도 뇌정지가 왔는지, 지금 함께 도주하는 연합군 차량들도 우리를 따라 꼬리를 물며 달리고 있었다.
"이, 이제 어쩝니까. 오래는 못 막습니다!"
"그걸 왜 나한테 따지는거요?! 난 일개 PMC야!"
협곡 안으로 도달했어도 뾰족한 수가 생기는건 아니었다.
좁은 입구를 이용해 가진 화기를 모조리 쏟아부어 추격해온 놈들을 격퇴하는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다. 놈들의 본대가 몰려오면 결국 잡힐 것이다.
연합군의 장교도, 로버트도 이제는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안토니프씨. 그게 뭐죠?"
"이것 좀 보시죠 신우씨."
조급해진 사람들이 목소리만 높이고 있을 때.
나는 차량에서 내려 협곡을 조사하던 연구원 안토니프에게 다가갔다.
"석판...같은데."
"그렇습니다. 이 균일한 벽을 보시죠. 무슨 유적이 있던 곳이 분명합니다. 전 지금 굉장히 흥분됩니다. 이것들은 유물이 틀림 없어요. 하긴 생각해 보십시오 신우씨, 여기도 결국 누군가 살아가던 세상 아닙니까. 마물들도 결국 모여 살아가던 집단 아닙니까."
그는 동료들과 함께 그 석판들을 조심스럽게 챙기고, 조사하고 촬영하며 데이터를 모았다. 그리고 그것을 소중히 차에 실었다.
"이것들은 단서입니다. 이것들을 연구하면 우리가 단지 끔찍한 괴물둥지로 여겼던 이곳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오늘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요."
그는 이 상황에서도 미래를 보고 있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이 상황에, 오직 희망과 승리를 위하여. 애초에 그러기 위해서 자원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 선구안이 통하려면 결국 지금 처한 이 위기 상황을 극복해야 했다.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내일이 있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실행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모두들 지금 당장 차에 탑승하세요."
"...예?"
"지금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거냐?"
나는 아직도 성을 내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 조용히 내 뜻을 전했다.
당연히 그들은 어처구니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제가 여길 막아볼테니 그 사이 협곡을 빠져나가, 주둔지로 복귀하세요."
"너 진짜로 미친거냐?"
로버트가 자기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대고 흔들었다.
그런 모습에는 딱히 말해줄게 없었다. 검을 뽑아들고, 협곡의 입구로 향했다.
"네 실력은 인정한다! 그 검술 뭐시기 배우고 좀 세졌더라! 하지만..."
"남은 폭약이나 포탄도 전부 두고가시고."
마침 딸려 온 탄약차 하나가 사실을 말할 수 없는 내게 좋은 핑계가 되어 줄 수 있었다.
물론 내가 할 짓은 폭약으로 놈들이 올때 이 협곡을 무너뜨리겠다 따위가 아니라, 지금 내가 가진 유일한 한방을 믿는 것.
[군단이 너를 기다린다. 너와 함께하기를]
이곳으로 다가오는 뿌옇고 거대한 흙먼지에 흐릿한 글자가 겹쳐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