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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86화 (86/254)

86화-혼돈과 영웅(4)

"기세를 탔어. 이대로 계속 진격한다고 하는군."

"그렇겠죠. 시간을 주면 안됩니다."

용병단장 로버트가 내 등을 두드렸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수습이 한창인 가운데, 본대는 계속해서 진격할 것을 결정했다고 했다.

어쨌든 전면 힘싸움에서 크게 승리했으니까.

단지 지금 나는 여기 신경쓰기가 힘들었다. 로버트는 보지 못하는 내 한쪽 시야에는, 지금 다른 세상의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표정이 좋지 않구만? 지금 이순간은 기뻐해도 돼. 적들의 약점을 알아본 네 결단과 판단덕에 우리는 승리할 수 있었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네 덕분이야."

"...지금은 누구나 그렇게 싸우니까요."

내 표정이 좋지 않아보였는지 그는 밝게 말했지만 나는 차마 웃지 못하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화면에는 동생, 강도연의 모습이 보였다.

플레이어 혹은 유닛으로 추정되는 적들이 있는, 따로 빼돌린 별동대를 습격하여 궤멸시키는 모습이.

더 이상 저 가면은 안정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즉 저녀석은 지금 자신의 의지로 다른 군단병들처럼 저렇게 무심하고 기계적으로 적들을 죽이는 것이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압도적이다. 내가 수십명이 덤벼도 저 애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승자만 살아남는...그런 생태계니까..."

나는 겨우 정신을 붙잡았다. 이건 단순한 생존경쟁이라고 계속해서 되뇌었다.

"크흠, 그럼 좀 쉬고 있으라고. 나는 뒷처리를 맡지."

로버트는 눈치를 보더니 자리를 벗어났다. 차량에 나 혼자 남게 되었을 때. 몸을 시트에 기대었다.

"지금 내가 가진 골드가 그대로야. 달빛요정 생존자들을 처치하고 얻은 300G. 그말은 방금 전 우리가 관측했던 플레이언지 유닛인지를 죽이지 못했다는 뜻이겠지."

[그렇다]

나는 골드를 확인했다. 변화는 0, 이건 군단이 지상을 나온 이후로도 단 한번도 상대 유닛과 플레이어를 죽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약하면 도태되었을거고, 살아남았다면 강해졌을 것.'

이쯤되면 어떤 유닛이든, 살아남은 이상 일정 수준 이상은 된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우연찮게 싸울 일은 없다는 것이니 아마 군단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구에 유닛을 둔 플레이어들은 이득을 많이 봤겠네."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내가 아는 사례가 딱 두개 뿐이지만, 어쨌든 현재 이브가 있는 세상에 비해 내가 사는 이곳 지구에서는 지금 이순간에도 미친듯이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말은 즉 플레이어들이 골드를 수급하기 편하다는 뜻.

"척살권은 2장씩 제한이 있다지만 그래도 각 플레이어가 2개라면 양이 상당해.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사기야."

문답무용으로 제한 없이 적을 죽인다. 물론 '그것 뿐'이라고는 했지만, 애초에 그것 하나만으로도 개사기였다.

[한가지 말해주자면, 이 게임에 패치 따위는 없다. 처음 그대로 끝까지 간다]

"그러니까 밸런스가 충분하다? 분명 척살권에 쳐맞고도 수작을 부려 살아날 수 있는 놈들이 있다고 치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시스템을 두려워 마라. 오히려 넘어서고 이용할 생각을 해야 한다]

"...그정도도 못하면 자격도 없다는 건가?"

의도는 뻔해보였다. 하긴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장에서 승리한 이가 척살권을 극복하지 못할 것 같지는 않다.

당장 지창현도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부의 이야기이지, 나 같은 평범한 이들은 저항할 수 없는데.

[반대로 너 같은 이들에게 척살권이 쓰이겠나]

"그것도 그렇네."

살짝 마음이 풀린 나는 피식 웃었다. 수습이 거의 끝나갔다.

이제 지난번에 점령하지 못한 포인트를 다시 점령하고, 놈들의 본진을 계속해서 타격할 것이다.

"핵폭탄은 안써도 되겠는데? 찜찜하긴 했어. 혹시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다시 차에 탑승한 콕스는 여유를 되찾은 얼굴이었다.

"..."

행군은 계속되었다. 그나마 이미 승리를 거두어서인지 분위기가 다들 나쁘지 않았다.

'도망칠게 뻔하다.'

적들의 움직임은 계속 관측되고 있다. 예측은 계속 나오고 있지만 사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목숨을 보전하는게 우선이다. 유닛종이 절멸하면 플레이어도 죽으니까.

"패잔병들만 열심히 도망치지 본진은 별 움직임 없다는데?"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놈들은 본진에 박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게 말이나 되나 싶었던 그 순간.

"...뭐야."

로버트가 미친듯이 칙칙거리는 무전기를 빼들었다.

"적! 적이다! 적들이 몰려 오..."

"전부 전투 준비!"

무전기에서도, 저 밖에서도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

"서북쪽에서 한번 봤던 무기로군."

속에 자탄을 눌러담은 고성능의 확산탄. 그런 확산탄이 십수발.

그러나 상공에 떠있던 그는 도시로 꽂히던 그 미사일을 허공에서 무형의 힘으로 모조리 잡아챘다.

그리고 터트렸다. 그뒤 그 막대한 에너지를 하나로 응축해서, 그대로 허공에 날려보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건 이런 힘이 아니다.'

그가 눈을 반짝였다. 현재 그의 시야 한켠은 다른 생물과 공유하고 있었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마계의 토착종인 수많은 괴조 무리. 그중 한마리의 시야를 공유하는 그의 눈에 황무지를 가로지르는 인간들의 군대가 보였다.

"덮쳐서 쓸어버려."

독수리를 몇배로 키워놓은 것 같은 괴조들이 헬기와 전차를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괴조들만 준비한게 아니었다. 땅을 가로지르는 짐승, 땅을 달리는 짐승 등등.

마계의 모든 생물들이 한때 마계의 왕이었던 존재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이건 대체 무슨 마법이지?!"

"마법이 아니다 어리석은 놈아. 이건 권능이다. 오직 마의 정점에게만 허락된 권능."

지상에 내려 앉은 그는 눈이 휘둥그레진 코볼트 대족장을 비웃었다.

자신의 플레이어 로제스에게 전수 받은 마법이야말로 기적이라 믿었던 대족장은 생전 처음 보는 진정한 마왕의 힘에 말을 잃었다.

곁에선 놀들이 광선 병기를 들고 이곳을 정찰하던 무인기들을 하나둘 떨어트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네놈의 플레이어는 죽는다며 난리를 치더니 넌 멀쩡하군."

"그, 그분은 지금 몸을 피하고 계신다."

코볼트 대족장은 움찔거리며 겨우 대답했다. 그에게 시선을 둘 수가 없었다.

용사가 남긴 저주에 가까운 봉인을 풀고 제 힘을 되찾은 진정한 고위 마족의 격에, 유전자에 새겨지다시피한 복종의식이 다시 살아나 버렸다.

"지금은 눈앞의 싸움에나 집중해라."

그 모습을 본 그가 여유롭게 코웃음쳤다.

곧 코볼트와 놀들도 플레이어의 허가를 받아, 재정비한 자신들의 주력을 파견했다.

'멍청한 놈들. 마지막에 살아남는건 결국 우리가 될 것이다.'

그에겐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어리석은 오크집단이 전력을 강화한다는 짧은 생각으로 플레이어에게 받은 힘을 이용해 자신을 깨운 직후부터 나름대로 상황을 파악하고 어쩔 수 없는 동맹이라는 현 체제의 헛점을 파고들어 힘을 회복했다.

그는 자신을 비롯한 토착 마족 세력이 진정한 승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으며 그것을 위해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아아. 선대 왕이시여. 지금 이 마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옵니까."

"마수의 군주 가르틴. 군단을 쥐여줄테니 가서 인간들을 죽여라."

그는 자신처럼, 봉인당했던 수하 하나를 깨워냈다. 전신을 검은 깃털로 두른 이 반인반조의 수인은 오랜만에 본 선대 왕에게 예를 갖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온전히 되찾은 힘, 이 힘으로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쓸어버리겠사옵니다."

"...방심하지 않는게 좋을걸? 세상이 바뀌어서 아무리 강한 존재라도 일격에 보내버리는 불합리한 법칙도 등장했으니."

그는 예나 지금이나 충직한 신하의 모습에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 그게 무슨..."

"그러니 이것을 가져가라. 네 충성심을 지킬 수 있는 또다른 수단이 될 것이니."

그는 가르틴에게 반지를 하나 던져주었다. 부리를 딱딱거리던 가르틴은 그것을 받아 손에 끼우고는 단숨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인간들 중에도 유닛이 있습니...아니 있소. 그놈들 중 특출난 놈들도 있고. 가르틴 군단장 혼자선 부족하지 않겠소."

"부족할수도 있지. 그 부족함을 채우는게 너희 아니냐. 진정 천한 핏줄의 한계를 벗어나고 싶다면 알아서 발버둥쳐라. 너희도, 나도 그저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것일 뿐이다."

코볼트 대족장의 말에 그는 대놓고 웃었다.

차라리 지금이 좋다고 생각했다. 마계가 용사와 싸울때도 똑같았다. 단지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진정한 야생 그 자체였다.

'여신은 어디갔는가? 설마 이 여신이란 계집도, 다른 세상에 자기 유닛들을 만들어 놓고 희희낙락 하고 있는건가?'

결국 용사라는 불합리한 수단을 이용해 마계를 공격한 비겁한 짓을 자행하던 여신도 자신과 같이 우물안 개구리였을 뿐이었다는 것을 그는 이제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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