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혼돈과 영웅(3)
"그는 지금 어떻지?"
[그는, 그리고 그가 속한 군대는 지금 승리를 거두었다. 계속 진격하여, 거점을 구축하고, 놈들의 본진을 계속해서 타격할 것이다]
"나에 대한 이야기는? 칭찬은?"
[...조금 기다려라. 그는 지금 자신의 동료들에게 둘러싸여있다. 함께 싸운 그들 모두 그의 업적을 경외하고 칭찬하고 있지. 너와 함께한 업적을]
너와 함께한 업적. 그 말에 이브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신우가 의도한 바가 먹혔다는 뜻이었다.
이브는 신우가 자신을 필요로하며 도움을 구하고, 끝내 자신의 도움으로 그가 업적을 이루었을 때.
마치 그와 하나가 된것 같은 짜릿한 감각을 맛볼 수 있었다.
"그가 강해졌다는 것도 좋아. 내 덕이니, 내게 더 의지하겠지?"
[네가 판단하기로, 그의 수준은 어느 정도지?]
"그리 높지는 않지만 그런건 중요하지 않아. 내가 더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인간에겐 자신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는 힘도 있고."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지금 신우의 실력은 군단에 편입된다면 소모품으로 쓸 양산형 수준이었다.
형상력을 다룰 줄 안다고는 하나 현실의 전투란 데이터수치로 하는 숫자놀음이 아니었으니, 이브의 냉철한 계산에 따르면 사실 그 실질 전투력은 상위종에 견줄 수준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브는 그를 높게 평가하다 못해 과하게 올려쳤다.
[...]
"어서 빨리 게이트 관련 기술을 손에 넣어야겠어."
지금 한껏 들뜬 이브의 머릿속은 한가지 주제로 꽉 차있었다.
마계에서 신우가 상대하던 코볼트들은 분명 유닛이다. 그것도 그 플레이어가, 바로 이브가 있는 이 세상에 있다.
그러니 그놈들이 쓰던 게이트 기술. 그것들은 분명 이곳의 기술이었다.
사실 이미 관련된 증언도 확보해둔 상태였다.
이곳 세계의 마법사들은 꽤 먼 과거, 자기들이 레드리움이라고 부르던 세상에서 오랜 전쟁에 패배해 이주해온 이들. 이주한 그들은 골렘들을 동원해 세상에 바글거리던 파멸균들을 몰아내었다.
그들이 이곳에 어떻게 도달했는가. 바로 공간을 뛰어넘는 마법을 이용해서 왔다. 그 방법이 바로 게이트이며 그것을 연구하는 학회가 따로 존재할 정도였다.
'게이트는 극비 정보이고, 분명 극소수인 해당 학회가 아닌 이상 고위 간부들만이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했어. 게다가 스타스 학회의 마법까지 전수한다는건 다른 학회에 대한 지식도 있다는 뜻.'
이브는 동시에 플레이어로 추정되는 존재의 신원을 유추했다. 단숨에 후보가 좁혀졌다. 학회의 고위 간부 출신, 그것도 현역일 가능성이 높다. 학회 마법사의 증언을 바탕으로 추론하면 그렇다면 많아봐야 수백명 수준이다.
이브에게 그정도는 그리 많은 수도 아니었다. 전부 잡아서 죽인다는 계획도 아무렇지 않게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게이트 관련 정보는 모두 메나스. 그곳에 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게이트 관련 기술을 얻고 싶어도, 얻을 수 없었다.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게이트와 관련된 마법을 연구하는 학회의 이름은 아도스.
아도스 학회는 오직 대륙 중앙의 대도시, 메나스에만 본부를 두고 있다.
메나스는 이 대륙을 다스리는 대륙의회와 각종 마법사 학회의 본산이라는 정보 역시 있었다.
즉 알고 있어도 탐내기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쓰레기들이..."
금방 기분이 다운된 이브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지막히 혀를찼다.
당장 총사령관 오스틴이 보여주던 도발과 자부심이 뇌리에 선했다. 빨리빨리 모든걸 토해내서 싸우고 제깍제깍 죽어줘도 모자를 놈들이 끝까지 추하게 저항할게 뻔하니 답답한게 당연했다.
그리고 이브에겐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무엇보다 아직 이 세상 사람들의 전력을 알지도 못한다.
만족할 만큼 확장을 끝내도, 당장 원하는 기술을 먹는게 가능하단 보장이 없다.
"굳이 시간을 버릴 필요가 없지."
다시 옥좌에 앉은 이브가 차분히 상황을 살폈다.
그녀는 군단이 뻗친 모든 곳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었다. 급히 소집된 방위대가 사실상 전멸한 이상, 이 인근의 도시와 마을들은 무방비한 무법지대였다.
'병력이 조금 부족하지만 상관 없지. 전부 짓밟아버려.'
이브는 적군을 분쇄하고 양분을 보충한 초대형종을 비롯, 사방에 흩어져 있던 군단병들을 다시 움직였다.
저항할 힘을 잃은 인간들은 이제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지 않는 이상 전부 죽임당할 것이다.
[좋군. 그럼 남는 시간에는, 이곳 기사들의 방식을 참고해서 새롭게 연마한 무술을 그에게 전수하기 위한 영상을 찍으면 되겠군]
"..."
[왜 그런 반응이지? 이번 전투가 끝나면 그에게 얼굴을 보여주고 직접 소통하겠다더니]
순간 이브의 몸이 굳었다.
분명 자신의 입으로 했던 말이긴 했었다. 하지만 지금, 어째서인지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나, 나중에 할거야. 강도연이...오면."
[어째서지? 이젠 너도 휴대폰을 조작할 줄 아는데?]
"시끄러워!"
감정이 요동쳤다. 하고 싶은데 차마 못하겠는 이 기묘하고 요상한 감정에 이브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움찔거렸다.
'아직 완전하지 않아. 그러니까 조금만 더.'
[마음의 준비는 금방 끝내는게 좋을거다. 지금 강도연이 적들과 조우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인지, 흔들리던 이브의 감정이 빠르게 가라앉을 사건이 생겼다.
강도연은 지난번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 따로 맡은 임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임무를 위해 적들과 만났다.
'좋아. 그대로 실행해.'
이브는 미리 설계한 계획을 실행하라 명령했다.
기동성 좋은 병종을 따로 빼어, 본대에서 빠져나간 2천의 별동대를 저격하는 것.
숫자는 비록 몇십에 불과했지만 가장 강한 전력인 강도연을 비롯 상위종 여럿을 투입시킨 작전이었다.
"음?"
"나도 느꼈어."
그러나 강도연이 그들을 향해 접근할 때.
강도연도, 이브도 무언가를 감지했다.
외부와 연결된 영혼의 끈. 별동대의 누군가가 스트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
"빌어쳐먹을. 저건 또 뭐야."
이 사태의 원흉이 자신임을 깨닫고 심신이 지쳐 있던 로제스 레블랑, 그는 하늘을 보며 품위도 잊고 험한 소리를 내뱉었다.
안그래도 간헐적으로 군단병들과 전투를 치르며, 방금 전에는 자신을 마계의 전대 왕이라 소개하던 이상한 괴인과 굴욕적인 거래를 마친 참이었다.
그런데 지금 하늘에서 피폐해진 그의 심신에 결정타를 날릴 존재가 내리꽂고 있었다.
"저거..."
"부학회장님! 으아아악!"
속도를 줄이지 않은 그것들은, 엄청난 충격파와 함께 뭉쳐 있던 별동대의 한복판에 착륙했다.
'무슨.'
충격파와 흙먼지에 눈을 찌푸린 로제스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칠흑의 날개였다. 검은 깃털에 휘감긴 칠흑의 날개.
그러나 그 날개가 이내 검붉게 타오르더니, 칼날처럼 휘둘러지며 피분수를 만들었다.
"저, 적이다! 적!"
"진형을 갖춰라!"
기겁한 병사들이 서둘러 하늘에서 나타난 괴물들을 향해 무기와 마법을 겨누었다.
"쏴버려!"
로제스가 급히 명령했다.
갑작스런 기습에 당하긴 했지만 어쨌든 바글바글한 아군 한복판에 떨어진 놈들이었다.
무차별한 마법 폭사가 적들에게 쏟아졌다.
섬광과 폭발에 눈을 뜨기도 힘든 와중. 로제스는 긴장한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소용 없다. 놈들은...멀쩡하다]
하지만 마법 폭사가 끝난 그 순간. 그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글자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동시에 흙먼지가 걷히고 전신을 공명시킨 검붉은 베리어로 둘러싼 적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등갑에 날개를 집어넣은 상위종들이 서로 등을 맞대고 창을 전방위에 겨누고 있었다.
그 가운데 서 있는, 검은 날개의 주인.
이제 그녀가 쓴 가면은 호르몬계에 작용하지 않는다. 가면은 단순히 얼굴을 가리는 용도일 뿐.
순간 로제스의 눈이 그 가면속 번득이는 네개의 붉은 안광과 마주쳤다.
'죽는다.'
그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주변에 방어막을 치고 있는데도 그랬다.
그가 타고 있던 골렘에서 뛰어내려, 곁에 있던 동료 마법사의 뒤로 숨어드는데 걸린 시간은 채 1초가 걸리지 않았다.
바로 그 직후.
겨누어진 창에서,뻗은 손에서 응집한 에너지가 최대 출력으로 사방을 향해 뿜어지기 시작했다.
이 에너지 폭사는 마법이니 검법이니 하는 기교를 배우지 않았던 군단이 가진 오리지널 기술.
단순히 뿜어낼 뿐인 그 힘에 포위했던 수천의 병력들은 고스란히 노출되어 산채로 타버리고 폭발하며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이, 이건..."
충격이 가라앉은 자리, 단숨에 반 이상이 괴멸당한 현장. 기묘한 적막이 내려앉은 그 자리에 멘탈이 나가버린 사람들이 굳어버린 채 움직이지도 못하고 움찔거렸다.
"으아아!"
그 와중에, 평소 동고동락하던 동료가 검을 쥔 팔 하나만 남기고 증발해버린걸 보고서는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던 기사 하나가 몸을 일으켜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커헉."
그녀는 조금의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을 보이며 검을 갑옷으로 무장한 손으로 쳐내고, 기사의 가슴팍을 발로 걷어찼다.
단숨에 우그러진 흉갑과 함께 피를 뿜은 기사는 그대로 바닥을 구르며 쓰러졌다.
"으..."
"아아..."
순식간에 좌중에 공포와 절망이 번졌다.
아직 살아남은 이들이 반절은 되는데도, 복수심과 분노로 무장했는데도 고작 다섯에 불과한 적들에게 덤벼들 엄두도 못내고 있었다.
"부학회장님, 블레이클의 부학회장님은 어디 있지?!"
"강한 화력이 필요해. 그분이라면 가능하실거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강자를 찾았다. 분명 아직 희망은 있었다. 적은 아직 다섯이고 아군의 여력은 남아있었으며, 적들은 다시 한번 화력을 뿜어내기에는 부담이 있었으니까.
"부학회장님..?"
그러나 그가 있던 자리에는 처참한 고깃덩이가 된 시신들 뿐.
그가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린 자리에는 버려진 로브만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