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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84화 (84/254)

84화-혼돈과 영웅(2)

번쩍이는 스파크가 뇌전이 되어 허공을, 그리고 적들의 진영을 갈라버렸다.

단번에 수십의 적을 태워버리는 강력한 전격.

하지만 교란이 목적이던 후방과는 달리 정예병을 때려박은 이 전방지역 놀들과 코볼트들은 녹록치 않았다.

"윽.."

강력한 전격을 폭사하던 차지연에게 놀들이 쏜 광선 무장의 포격이 집중되었다.

서둘러 전격을 둘러친 그녀는 자신에게 쏘아진 광선공격을 아슬하게 막아내었다.

"척살권은 없나보군. 아직까지 우리 목숨이 붙어있는걸 보면 말이야."

크리스가 그녀의 곁을 지나치며 피식 웃었다.

그가 발을 구르자, 요동친 지면에서 튀어난 암석의 창들이 적들을 대량으로 쳐죽이고 찔러죽였다.

하지만 과거 단 두명의 S급 헌터에게 본진이 유린당했던 그들도 이제는 더더욱 발전했다.

"저게 뭐야. 이젠 숨길 생각도 없단거겠지."

어처구니가 없어진 크리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놀 하나가 탑승한 거대한 기계 하나가 철컹 거리는 소음과 함께 전장에 나타났다.

이족보행을 하는 전차만한 사이즈의 그 탑승물은 대놓고 자신의 강한 화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쏴!"

당연히 저격 대상이었다. 전차의 포탄과 대전차로켓등이 날아들어 폭발을 일으켰다.

그러나 곁에 있던 코볼트들이 시전한 중첩 베리어에 휘감겨 멀쩡하게 있던 탑승물이, 이번엔 손에 들고 있던 큼직한 포신에서 불을 뿜었다.

"안 돼..."

충격파에 얼굴을 감쌌던 차지연은 벌어진 참상에 이를 악물었다.

섬광과 함께 한순간에 펼쳐진 지옥도. 그녀가 그토록 막고싶어하던 일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기다려. 너만큼 정의감 넘치는 사람이 또 있으니까."

"지창현 지부장."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던 그녀가 침음했다.

지창현이 망설임 없이 검을 들고 뛰어들었다.

전신에 불길을 두른채 뛰쳐나가는 그의 검에서, 붉은 참격이 어지러이 흩날렸다.

베리어와 탑승물은 물론 그 주변을 모조리 베어버리는 일격. 그 순간적인 임팩트만 보면 1인 군단이라 불러도 손색 없을 정도였다.

그 일격이 지나간 자리엔 불길이 솟구치며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

지금 스타스 학회의 진법으로 강화된 일개 잡병 수준의 놀들도 기존의 C급 헌터 정도는 되는 전력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위력이었다.

"헌터시절, 불만 쓸때보다 화려함과 거창함은 줄어들었지만 난 지금이 더 강해보이는군. 탈 S급이야. 역시 누구나 성장한다는건가? 우리 둘다 덤벼도 힘들겠는데."

크리스가 그 모습을 보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사실 이제 기존의 등급놀이는 별 의미가 없어졌다. 스텝 업 헌터들인 에볼루션도 그렇고, 유닛이 된 헌터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고여버린 자신의 힘을 더 성장시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저놈들도 마찬가지인가?"

크리스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지창현을 향해 돌격해오는 검은 갑주의 흑기사. 저건 분명 놀이나, 코볼트가 아니었다.

[놈들이 사용하는 미개한 마법이나 구닥다리 유물과는 다른 종류...아마 이 땅의 토착주술인가? 척살권도 없어 보이고, 능력부족으로 한계에 닥치니 별 수를 다 쓰는군. 확실히 마무리를 지으라는게 플레이어의 명이다]

플레이어의 뜻이 뇌리에 울렸다. 그 말대로 지금 적들은 발악을 하는 중이었다.

최선을 다해 방어해보려 하지만 태생적인 종족값 차이가 너무 심했다.

지창현이나 크리스, 차지연등 일정 임계점을 넘은 존재들을 막기 위해선 그에 걸맞는 대적자를 준비하거나 압도적인 화력으로 밀어내야 한다. 하지만 상대에겐 지금 그런 여유가 없었다.

차지연은 다시 돌격할 준비를 하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괜찮을까.'

후방도 공격당했다. 그리고 후방에는 그가 있다.

사실 지금 당장 도우러 가고 싶지만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플레이어는 돌격을 명령했다.

*

"쓸모 없는! 머저리!"

"시, 시끄럽다. 좀 조용히 하시오!"

"대패, 대패! 막을 수 없다!"

어둑한 궁성 안,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던 놀이 방방 뛰며 소리를 빽빽 질렀다.

그 놀과 대면하던 코볼트의 대족장도 사실은 같은 심정이었다.

적들이 너무 강했다. 두 종족 모두 나름 능력 있는 플레이어에게 은총을 받았으나, 타고난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결국 노예 생활을 하던 최하급 마물이었고 상대는 발달한 지성과 문명을 바탕으로 한 세상을 오랜 세월 지배하던 지배종이었다.

'...세상도 무심하다.'

코볼트 대족장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자신에게 여러가지 마법을 알려주던 자신의 플레이어는 지금 굉장히 바쁜 상태였다.

위험에 처했다는건 알지만 지금 그를 도울 방법이 없었다.

계속 도움만 받았는데 그 은혜를 갚기는 커녕 패배만 하는게 현실이었다. 뼈가 시릴 정도인 그 무력감, 지성을 갖추고 나니 더더욱 와닿았다.

"하찮은 두 배신자 종족들이, 이제 와서 자기들 주제를 알았나보구나. 귀족의 저택은 지내기 편하더냐."

그러나 그때. 분명 둘만 있어야 할 이 공간에 누군가 스르륵 나타났다.

기겁한 대족장이 놀을 노려보았으나, 놀은 마찬가지로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멍청한 오해는 하지 마라. 내가 스스로 여기 온 것이니."

그는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눌러 쓴 후드 밑에서 히죽 웃은 입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도드라졌다.

"고위 마족!"

그 정체를 꿰뚫어 본 코볼트 대족장이 지팡이를 겨누자, 놀도 허겁지겁 품에서 꺼낸 권총을 겨누었다.

그러나 상대는 여유롭게 웃을 뿐.

"어리석은...어서 너희 두놈의 우두머리, 아니 그 '플레이어'라는 놈들에게 전해라. 나와 거래를 하겠냐고 말이다. 만약 거래에 응한다면 너희 같이 하찮은 '유닛'들을 통솔하느라 빠져버린 힘, 내가 채워줄 수 있지."

"그, 그걸 어떻게..."

"코볼트가 말을 하는건 역시 적응이 안되는군. 그냥 전하기나 해라. 한때 이 마계의 영광을 이끌었던 존재로서 하찮은 인간들 따위에게 이 땅이 짓밟히는걸 두고볼 수 없는 것 뿐이다."

그는 후드를 내리고 피식거렸다.

양 머리에 돋아있는 검은 산양의 뿔에 움찔한 그들은 그의 정체를 알아보고 굳어버렸다.

"마왕..!"

"전 마왕이다. 현역은 아직도 잠들어 있지."

그는 코볼트 대족장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지금 그분께서 말하셨소. 당신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그, 미개한 마계의 마법은 도움이 안된다고."

"흐, 웃기는 놈이로군. 하지만 그래. 어느 정도는 인정하지. 나도, 아니 이 마계 전체도 결국 우물안 개구리였으며 이 세상, 이 우주는 너무나 넓다라는 것을. 그러니 멍청한 코볼트야, 지금 당장 네 플레이어에게 전하거라. 네놈 역시 한줌 먼지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너희 세상에도 네가 모르는 재앙이 잠들어 있을지 누가 아느냐."

그는 여유롭게 히죽 웃었다.

코볼트 대족장은 당황했다. 모멸적인 말에도, 자신의 플레이어는 반응이 없었다. 마치 정곡을 찔렸다는 듯이.

"생각 잘 해야 할거다. 너희가 휘말린 그 운명의 소용돌이는 결국 무한 경쟁, 즉 살아남는자가 가장 강한 것이다. 쓸데 없이 자존심 부리지 말고 손을 내밀어라. 나와 거래하면, 분명 이득이 있을 것이다."

"일, 일단 듣고 싶다 하시오."

"우리!? 우리 플레이어도!"

코볼트 대족장도, 놀 대군주도 모두 플레이어의 응답을 수신했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웃었다.

"나는 게임에 속하지 않은 토착종으로, 게임의 룰에 자유롭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나는 그동안 마계 전역을 돌아다니며, 지금 그 지구인이라는 놈들과 싸우고 있는 마계의 종족들을 만나고 다녔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지. 나의 힘을 빌려주자고. 그 대가는, 너희들이 플레이어들에게 배우고 얻은 문물과 기술들이다. 각종 마법, 주술, 정령술, 검술, 창술, 입자 병기, 무공 등등."

"그, 그런..."

"그것들은 모두 나의 힘이 되었고 동시에 너희의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때 마왕이었던 몸, 아직도 이 마계 전역에 내 힘이 뻗쳐있다. 지금 당장 일으킬 수 있는 망령의 군대도 수십만에 동원할 수 있는 생물군단도 천지에 널려있다. 용사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시전한 마계전체의 봉인, 확실히 강대한 봉인이었으나 그 봉인은 이세계의 정령술을 익힌 일개 오크의 손에 뚫려버렸다."

이제 주도권은 완전히 그에게 넘어갔다.

마족과 마계를 대상으로 오랜 세월 유지되어있던 봉인이 이세계의 힘으로 간단하게 풀린 순간. 이제 마계 세력들도 지구의 연합군처럼 동원될 수 있는 토착세력이 생겨날 수 있었다.

한때 이 땅을 지배했던 고위 마족들이라는 세력이.

"살아남는게 우선 아니더냐. 쓸데 없는 경쟁은 관두고 가장 위험한 놈들부터 쳐내라."

그는 고개를 들고 허공을 향해 외쳤다.

코볼트 대족장이나 놀 대군주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들의 실세들에게 직접 전하는 말이었다.

[긍정한다고 말해라]

[받아들인다고 말해! 빨리!]

그리고 궁지에 몰린 플레이어들은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우선 지금 당장의 목숨은 살려줘야겠지."

거래의 성립. 그는 저택 밖으로 나가 허공으로 몸을 띄워올렸다.

그의 눈에 황량하고 척박한, 마기에 잔뜩 물든 풍경이 보였다.

그는 한때 마계의 군주, 마계의 주인이었다.

현역 마왕이 용사의 동귀어진 자폭기에 당해 마계 전체에 내려진 봉인이 깨어진 이 순간.

그는 과거의 힘을 일부 되찾았다.

'마기의 정령들이, 내 심장의 고리가, 단전에 축적시킨 마력을 증폭시킨다.'

그리고 그 일부의 힘을, 순간적으로 전성기 이상으로 폭발시킬 수 있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것은 이계의 침입자들이 제공한 기술들. 그것들을 노련하게 하나 둘 흡수해가는 마왕의 그릇은 그 마력을 기하급수적으로 증폭시켜갔다.

"너희를 해방시켜줄 주인이 명하니 마계여, 너희의 적들을 공격해라."

암암리에 움직이며 마계세력을 돕던 그가 대대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이쪽 전선의 코볼트와 놀이 약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제 전면에 나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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