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혼돈과 영웅(1)
[어찌되었든 군단은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시간을 번 셈이고, 목표치까지의 확장에 더 이상의 방해물은 없다]
"...일단은 한숨 돌리게 되었네."
화면에는 패퇴하는 인간들과 그걸 지켜보는 군단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위기인가 싶었지만, 이브는 언제나 그래왔듯 대비책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정말로 다 커버린 것 같아."
나는 쓰게 웃었다.
집채만한 크기의 초대형종을 처음 봤을때 느꼈다.
이브는 이제 내 도움 없이도 충분하다. 지금의 이브는, 내가 여러가지 소동물들이나 빵 같은 음식을 넣어주며 키우던 작은 군체가 아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충분히 저 세상을 먹어 치울 수 있는 강자였다.
[글쎄, 앞으로도 도움은 계속 필요할 것이다]
"그렇겠지. 단지 그거 고민하느라 내 머리가 더 아파질테니까."
물론 내가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지켜만 보는 것도 말이 안된다.
아직까지는 이브에 대한 내 영향력이 더 강하다.
하지만 지상으로 나온 이후 매일 엄청난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는 이브에게 이 영향력이 언제까지 유지 될지도 모르고, 비틀리지 않을거란 보장도 없다.
그러니 계속 '도움'을 줘야했다. 이름을 준것 처럼 내 영향력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 도움을.
"영상 기록은 끝났나?"
"아, 이제 끝났죠."
옆자리에 앉아 있던 용병단원 콕스가 슬쩍 입을 열었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그는 내가 지금까지 떠들던게 영상기록을 위해서인 줄 알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놈들도 소극적이란 말이지. 며칠 전엔 승기를 잡았는데도 말이야."
"아마 기다리는거겠죠. 저희처럼."
콕스의 의문에, 창 밖을 쳐다보던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현재 우리의 적인 놀과 코볼트. 놈들도 유닛이었다.
그러니 시간을 끄는게 이상한건 아니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더 변칙적이고 강해질 수 있다는 뜻이니까.
당장 우리 연합군도 시간을 들여 재정비하며 수호자 연합의 도움을 받아 성장했다.
서로 성장하면 상대를 이긴다고 생각하고 있는 가운데, 이제 그것을 증명해야 할 때였다. 지금 우리는 적진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기다린다라. 그럼 좀 후회하겠는데."
콕스가 내 말에 피식 웃었다. 동시에, 굉음을 내는 무언가가 저 높은 상공 위를 가로질렀다.
연합군이 새롭게 동원한 무기는 미사일. 그것도 국제법상 금지된 확산탄이 가득 들어차있는 것들이다.
게다가 여차하면 핵탄두까지 장착 가능한 그 미사일이 허공을 가로질러 적진을 타격하기 위해 날아가는 중이었다. 듣기론 이미 핵탄두도 주둔지에 와 있다고 했다.
"습격이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놈들도 반격을 시작한 것 같았다.
차량이 급정거함과 동시에 무전기에서도, 저 밖에서도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총성과, 전차가 쏘는 포성까지 들리고 있었다.
"내리자. 다행히 전방인 것 같은데."
우리도 우리 일을 시작했다. 우리 일은 당연히 에볼루션 소속 연구원들의 호위.
이제 내 무기가 된 검을 챙겨 차에서 내린 나는 무심코 차지연이 있을 전방을 확인했다.
"아 이런 씨...재수도 더럽게..."
"온다! 자리 잡아!"
일단 전투 태세로 자리를 지키고 서긴 했지만, 우리는 습격당한 지점에서 먼 후방지역이라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작정한듯한 놈들의 습격은 전방위적이었다.
당장 우리가 있던 바로 코앞에, 공간의 비틀림이 생기더니 자그마한 게이트가 나타났다.
"쏴!"
그 게이트 안에서 흐릿한 형체가 보이는 순간. 대기하던 병력들의 화기가 불을 뿜었다.
코끼리도 단숨에 넝마로 만들 화력. 하지만 제일 먼저 나타난건 큼직한 방패를 든 놀들이었고, 놈들이 든 방패는 희미한 푸른빛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놈들이..."
"놈들이 쏟아져나온다!"
집중사격이 막히자마자 방패를 앞세운 놈들이 마구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내 눈에 지팡이를 휘두르는 코볼트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저 모습이, 이브가 상대하던 마법사들의 모습과 겹쳐보였다.
"사격 계속 하세요!"
"어..?!"
나는 콕스를 두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나뿐만이 아니다.
부족한 헌터전력을 보충할 수호자 연합의 수련생들이 앞으로 나서, 총탄을 무시하고 들어오는 놈들을 상대했다.
"큭."
휘둘러진 방패를 피하고, 검을 내질러 베어버린다. 이제 내 움직임도 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다.
"내가 이상한건지. 아니면 정말인건지 모르겠는데."
이를 악문 나는 검을 휘두르면서도 위화감을 떨치지 못했다.
"이놈들, 아무리 봐도 내가 아는 마법을 쓰는 것 같은데!"
[지금 이브에게 문의하는 중이다]
검을 들고 덤벼들던 또다른 놀의 머리를 쪼개버렸다.
놈들의 포지션이 너무나 신경쓰였다. 일정한 진형을 갖추고 움직이는 이 모양새가 낯익었다.
게다가 일반 잡병으로 분류하는 놈들인데도 힘이 우리와 맞먹는 것 같았다.
'스타스 학회.'
나는 이 진법을 알고 있었다. 이브가 상대했던, 그리고 이제는 역으로 배워서 쓰는 마법 중 하나.
분명 일정한 진법을 만들어 그것으로 발현하는 집단전술마법이었다.
"이, 이놈들 분명 장비도 없는 놈들인데..."
"밀린다!"
마법의 보조를 받는 놀들은 자기네 플레이어가 준 장비도 없이 우리를 밀어붙였다. 정보가 없는 아군은 크게 당황하여 피해가 속출하고 있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상할거 전혀 없다. 만약 놀들에게 마법을 걸어주는 이 코볼트들의 플레이어가 지금 이브가 상대하고 있는 마법사들 중 하나라면 내 적이다.
"저 코볼트들을 저격하라고!"
아군도 당연히 코볼트들이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걸 알고 있다. 누군가 쏜 대전차로켓이 소총탄을 튕겨내던 베리어를 부숴버리고 코볼트 하나를 폭사시켰다.
하지만 소용 없다. 저 코볼트들 중 진짜를 찾아서 저격해야 했다. 진법의 핵심이 되는 진짜를.
[회로의 복합연결. 그 힘으로 다수의 인원을 단번에 강화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회로에, 중심이 되는 단 하나의 중점이 있다. 그 중점이 사라지면 모든 회로가 끊긴다]
이브도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알고 있으며, 그대로 전달받았다.
"이브에게 말해. 이번엔 내가, 네 도움이 필요하다고."
[녀석이 기뻐하며 긍정했다. 어느정도로 기뻐하는지 나중에 꼭 화면으로 봐라]
이브는 망설이지 않고 내게 도움을 주었다.
이 상황을 단순한 말로 전달 받는 것으로, 이브는 단숨에 상대의 진법을 역산하여 해답을 알려주었다.
'저놈이다.'
이브가 말해준 조건에 부합하는 놈이 내 눈에 띄었다. 진법의 중점.
한발자국 뒤에 있는 놈은 교묘하게도 다른 코볼트들의 베리어까지 대신해서 받으며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저걸 부수려면 최소한 대구경의 포탄은 있어야 할것이다.
"저놈입니다. 저놈을 죽이면, 놈들이 두르고 있는 힘이 풀릴겁니다. 다른 애먼 놈들 저격하다 다 쓸립니다!"
"강신우씨가 그, 그걸 어떻게 압니까?!"
나는 곁에서 함께 싸우던 특수부대원을 붙잡았다. 전투복에 대위 딱지를 붙이고 있는 이 군인은 원래 포병의 포대장이었지만 재능을 인정받아 수호자 연합에서 가르침을 받고 특수부대로 재편성된 인원이었다.
동시에 나와 면식이 있던 사람이기도 했다. 내 대련 상대기도 했었으니까.
"...함께하지 못한다면 혼자서라도 가겠습니다."
얼떨떨해하는 그의 반응에 얼굴을 굳혔다. 지금 하나하나 설명할 시간 없었다.
"가겠습니다. 방법이 있다면."
다행히 그는 내 진심을 알아줬는지 홀린듯 내 말에 따라주었다. 나는 순식간에 모여든 군인들을 보고 순간 움찔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길을 뚫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나는 명확히 내 뜻을 전달했다.
내가 이들에게 지시를 내려도 되나싶었지만 지금은 그런거 따질 때가 아니었다.
"물론입니다."
"대위님, 이 사람을 믿을 수 있는..."
"지금은 방법이 없어. 그리고 강신우씨 실력은 충분해."
당연히 일부 반발이 있었지만 대위를 비롯해 이들 중 일부는 나와 면식이 있었으며 나와 대련을 해보았고 나한테 깨져본적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럼 가죠."
1초도 낭비할 수 없다. 이대로 밀려서 화망이 깨지면 그대로 쓸려버리고, 보병들의 화력이 없다면 우리가 살아남는다 한들 이 많은 놈들을 처리하는건 불가능했다.
그러니 그 전에 진법의 중점이 되는 코볼트를 죽여야했다.
"이브에게 전부 전해. 지금 내가, 네 도움을 받아서 무슨 일을 하는지!"
[그 의도가 있나?]
"우리의 연결은 쌍방이라는걸 알려주는거지."
나는 검을 고쳐쥐고 돌격했다.
진법의 강화를 받는 바글바글한 놀들이 단숨에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그에 맞춰 내 몸안에 쌓인 힘이 공명했다. 지창현이 알려준 수련법을, 군단이 오직 나만을 위해 개량해준 심법인 공명법.
이것으로 나는 남들보다 더 빠르고 강하게 힘을 쌓았다. 적들과의 충돌 직전 나는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끼익..."
"키엑."
힘을 실은 검에 단숨에 몇 마리의 놀들이 토막나 쓰러졌다.
어설픈 검술에 흘리는 놈들도 있었지만 문제 없었다. 그런 놈들은 내 옆에서 뛰는 동료들이 처리해줬으니까.
"하지만! 우리 힘으로는 놈의 베리어를 깰 수 없습니다!"
"방법 있습니다."
다급한 외침에 나는 품에서 검붉은 광석 하나를 꺼냈다.
이걸 지금까지 하던 것처럼 단순히 던진다? 그래서는 저 중첩베리어를 부술 수 없다.
이번에도 나는 이브의 도움을 받았다.
군단의 상위종이 형상력을 사용하는 방법은 동력기관에서 딜레이나 계산 없이 단숨에 힘을 끌어오는 것.
나도 그 방법을 모방했다. 기존에 내가 가진 힘에 더해, 지금 쥐고 있는 광석에 저장된 힘을 내 몸으로 받아들였다.
"신우씨 검이..."
내 검이 검붉게 불타올랐다. 내가 익힌 공명법의 가장 큰 장점은 서로 다른 이질적인 힘을 배척하긴커녕 오히려 공명시켜 증폭시키는 것.
그야말로 모든걸 먹어치우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군단의 정체성에 걸맞는 힘이었다.
"뒤져 이새끼들아!"
나는 온힘을 다해 검을 뿜어냈다.
군단병들이, 그리고 동생 강도연이 하던 것 처럼 뿜어진 검붉은 참격이 지면을 가르며 적의 몸을 베리어째로 갈라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