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침략과 침식(11)
"으, 으아..."
지축을 뒤흔드는 진동, 시야를 가득 채우며 달려오는 집채만한 검은 갑각의 짐승.
그것만으로 위압감이 있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거체의 돌격에 진형이 단번에 흐트러졌다.
"다, 다들 자리를 지켜라!"
"저게 대체 무슨! 우리가 떠나온 레드리움의 퇴화지룡들도 저렇게 크지는 않았소!"
지휘관들이 서둘러 병력을 통제했지만 힘들었다. 애초에 파멸균을 몰아내고 지상을 장악한 이들은 그 이후 오랜 시간 평화에 물들어 있었다.
이주하기 전 지독히 싸우던 시절의 전쟁교본등이야 남아있었지만 그걸 시전할 이들은 전쟁경험이 전무했다.
"포격! 포겨억! 마도직사포!"
다급해진 총사령관이 골렘 위에서 로브를 펄럭이며 지휘했다. 황급히 진형을 바꾼 마법사 포대가 이번엔 마법진의 방향을 정면을 향해 겨누었다.
"발사! 발사아아!"
그렇게 쏘아진 탄환은 곡사로 쏠 때보다 더 크고 단단하게 응축한 마탄이었다.
사거리를 대폭 깎아먹은 대신 그 위력을 극대화시켰다. 분명 두꺼운 성벽도 일격에 박살낼 위력이었다.
그렇기에 총사령관 역시, 지금 쏘아낸 직사포가 저 짐승들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을거라 확신했다.
'하찮은 미물들...이...'
그러나 확신은 확신일뿐. 현실은 그의 마음과는 달랐다.
"대체 어떻게?"
"그, 그게...저게 대체..."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곁에 있던 스타스 학회의 간부를 돌아보았다.
다만 경악하고 기겁한건 무심코 고개를 젓는 스탁스 학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 지금 내가 보고 있는게 대체 뭔가!"
결국 이성을 잃은 총사령관이 고성을 터트렸다.
맹렬히 돌진해오던 저 거대한 짐승들에게 분명 포탄이 명중했다. 뜨거운 충격과 함께 폭발을 일으키며 터지는 것도 분명 보았다.
하지만 어느새 검붉은 마력을 두르고, 하나의 창이 되어 달리는 짐승들은 조금의 타격도 없이 거대하고 단단한 머리를 휘두르고 있었다.
저 기묘한 진법과 마법. 분명 스타스 학회의 주특기였다.
"으, 으아아아!"
"전부 도망쳐!"
결국 충돌도 하기 전에 순식간에 진형이 붕괴되었다.
당연하게도, 지금 수준으론 저런 괴물들이 미친듯이 달려오면 무슨 수를 써도 막아서는게 불가능했으니까.
"아."
총사령관은 나지막히 탄성을 흘렸다.
뒤로 돌아 미친듯이 도망치는 사람들만 보이는 가운데 저 앞에서 터져나온, 충격파와 함께 분수처럼 퍼지는 저것은 새빨간 핏물과 한때 사람이었던 고깃조각들이었다.
그렇게 본대는 산채로 갈려버렸다.
"아아악!"
"이, 이거 놔라!"
멈출 줄 모르는 돌진이 쓸고간 자리, 생존에 성공한 이들은 곧바로 다른 짐승들의 습격을 받았다.
억센 근육을 가진 네발 짐승들이었다. 놈들은 정신 못차리는 사람들을 공격하여 마구잡이로 학살했다.
"살, 살려주시오!"
하지만 특이 행동을 하는 놈들도 있었다.
놈들은 몇몇 마법사들을 죽지 않을 정도로만 공격해 피칠갑으로 만든뒤, 질질 끌어 후방으로 빼내고 있었다.
"큭, 이놈들이! 감히 마법사를!"
그 광경을 보고 놈들이 마법사를 납치하려 한다는 사실을 안 총사령관이 격노하며 지팡이로 땅을 찍었다.
그는 대지와 관련된 마법을 연구하는 학회출신.
곧 땅에서 튀어나온 돌기둥들이 마법사들을 납치하려던 놈들을 모조리 날려버리고 꿰뚫었다.
'설마 스타스 학파의 마법을 가져간 것도...!'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딜 봐도 비명지르는 아군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괴물들이 단순한 짐승무리가 아니다라는 것을 그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어지러운 전장에서, 돌진했던 초대형종들이 다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이를 악문 그는 허리를 꼿꼿히 피고 자신을 직접 상대하기 위해 온 존재를 노려보았다.
"네놈은 좀 특별해 보이는구나. 우두머리냐?"
그는 지팡이를 겨누고, 자신을 찾아 온 상위종을 노려보았다. 갑주의 틈에서 빛나는 6개의 눈이 무심히 번득였다.
상위종이 손에 들고 있던 검붉은 창을 겨누었다.
이제 그 자세는 예리하고, 날카롭다. 잡아먹은 포로들 중에는 창술을 수련하던 기사단 역시 있었으니까.
"음...?!"
그때 그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끼고 움찔했다.
어느새 공기중에 퍼진 기묘한 무언가.
"크으...크아악!"
검은 혈관으로 몸을 덮은 병사 하나가 눈마저 검게 물들이고 그를 향해 덤벼들었다.
군단이 다수를 제압할때 가장 효율적인 병기를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같잖은 수를 쓰는구나. 역시 네놈들은 파멸귀의 후신인가!"
그는 지팡이의 끝부분으로 달려들던 병사의 명치를 찍어 그대로 날려버렸다.
그리고 지팡이를 쳐들고 마력을 끌어모아 지면을 내리쳤다.
강력한 마력풍이 전장을 휩쓸었다. 그 여파로, 그 방어력은 극도로 취약한 감염균들이 모조리 사멸해 버렸다.
"비록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 해도, 네놈들은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과거 우리에 멸절당했던 것 처럼 다시 이 지상에서 쫒겨날 것이다."
흰 수염을 휘날리던 그는 눈을 번득이며 상위종을 향해 손가락질 하곤, 짓씹듯 내뱉었다.
마치 상위종의 눈 뒤에 배후가, 이브가 지켜보고 있다는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 처럼.
생전 처음으로 죽기전 발악이 아닌 이런 도발을 받아본 이브의 입꼬리가 살짝 움찔거렸다.
"와라 괴물아. 나, 세클라드의 오스틴 슐츠가 80년간 수련한 마법이 네놈 따위에게 막히겠느냐."
그는 지팡이를 휘두르며 마법을 시전했다.
상위종은 당연히 그 틈을 주지 않고, 빠르게 움직여 그의 목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그는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단숨에 주문을 취소하고 고개를 젖혀 창을 피했다.
동시에 빠르게 시전할 수 있는 보호막 주문을 시전했다.
삼각형의 푸른 보호막이 튀어나와, 상위종의 검붉은 베리어와 충돌했다.
"비록 내가 여기서 죽어도 학회와 의회엔 나보다 강한 이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너는, 나보다 약하다. 마법을 얕보지 마라."
그는 서로 상쇄되어 부서진 보호막 너머, 훤히 드러난 상위종의 가슴에 손가락 끝에 끌어모아 응집시킨 암석 탄환을 쏘아냈다.
관통력에 집중한 인명 살상용 마법이 갑주를 부수고 단숨에 상위종의 동력기관을 부숴버렸다.
"허."
그는 쓰러진 상위종의 시체를 보며 비틀거렸다. 소모한 심력이 너무 심했다.
만약 조금만 판단이 늦었다면, 상대가 제대로 된 마법전에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었다면 첫 일격에 목을 꿰뚫렸을 것이다.
"...그래도 한놈은 줄여야 하지 않나."
멍하니 중얼거린 그가 몸을 돌렸다.
그는 이미 살기를 포기했다. 지금 달려오는 저 거대한 짐승들 때문이었다.
그가 아무리 현자급 마법사라도, 질량 자체가 무기인 거대생물을 단신으로 모조리 상대할 순 없었다.
'한놈만이라도.'
그렇기에 하나라도 줄이겠다는 생각만으로 주문을 시전했다.
저 거체의 몸에 아무리 강한 마법을 박아봤자 효과는 없다. 그러니, 다른부분을 공략한다.
이것이 그의 생각이었고 그 생각을 실현할 마법이 지팡이 끝에서 튀어 나왔다.
"그렇지."
거대한 몸중 하나가 기우뚱 하더니 그대로 기울어져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마법을 이용해, 초대형종이 발디디려는 지점의 땅을 진득한 늪으로 바꿔버렸다.
그 엄청난 무게덕에 그 함정에 단숨에 빠져버린 초대형종이 허우적거리며 땅속에 잠겨갔다.
"이걸로...충분하길."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털썩 꺾으며 눈을 감았다.
고작 한마리를 처리했을 뿐이다. 이제 그를 포함해 남은 이들은, 그대로 짓밟힐 것이다.
점차 가까워져 오는 거대한 진동을 느끼며 그는 이를 악물었다.
"안 됩니다!"
"크헉..."
그때, 누군가 달려들어 치여죽기 직전의 그를 들이받듯 덮쳐 구해내었다.
"안 됩니다! 진상을! 진상을 밝혀야 합니다! 의원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케흑...커헉..."
초대형종들이 머리 위를 지나간 자리, 기회를 보다 뛰어들었던 레이나가 흥분한 채 그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그, 그만..."
"블레이클의 부학회장 로제스 레블랑! 그자가 이 사단의 원흉입니다!"
"그만 흔들게!"
결국 그녀가 머리로 들이받은 가슴을 부여잡고 콜록거리던 오스틴이 지팡이로 그녀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리곤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는 그녀의 곁에서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다시 말해보게. 레블랑이 뭘 어쨌는...아니, 일단은 자리부터 피해야겠군."
혀를 찬 그가 기본적인 확성 마법을 시전하여 퇴각명령을 내렸다.
레이나가 그를 부축하여 몸을 빼내는데 사력을 다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초거대종은 상승한 돌진력만큼 방향전환등이 늦었다.
극히 일부의 병력을 수습한 오스틴은 그렇게 생존자들을 이끌고 허겁지겁 몸을 뺐다.
군단병들은 그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아깝게 되었네."
[...왜 쫒지 않지? 급성장을 쓰면 급히 쓸 병력정도는 만들 수 있다]
"어차피 모조리 몰살하는건 힘들고, 무엇보다 감히 날 모욕했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브는 그들의 뒤를 쫒지 않았다.
[이상하군. 모욕한게 기분 나쁘다면 쫒아야 하는것 아닌가?]
"안돼. 그렇게 해서는, 온전히 되갚아줄 수 없어. 저놈이 다시 제 힘을 낼 수 있을때 다시 한번 싸워서 짓밟을거야. 그리고 단순히 감정문제는 아니야. 놈들을 더 자극해서 모든걸 뽑아낼거야."
포로로 잡아 고문하는것 외에도 경험을 얻을 방법은 많다. 이브는 이번 전투로도 충분한 경험을 쌓았다.
그것으로 상대를 한계까지 몰아붙여서 정보를 뽑아낸다는 결론을 내렸다. 위기에 처한 상대야 말로 말그대로 모든 힘을 쥐어 짜내니까.
그리고 그렇게 습득한 그들의 기술과 전술로 그들의 생명에 종지부를 찍는다는게 이브의 계획이었다.
[오만하다고는 생각 안하나? 그들을 얕보는 것인가?]
"오만한게 아니라, 계산한거지."
아직 미숙한탓에 간혹가다 감정의 격류를 보이긴 하지만 이브의 근본은 철저한 계산과 예측. 가능성 없는 싸움은 애초에 처음부터 걸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