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80화 (80/254)

80화-침략과 침식(9)

"으극...흐하아!"

어둑한 지하 연구실의 좁은 창고 안. 이곳에 진땀을 흘리며 몸을 버둥거리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강철 같은 의지와 분노로, 팔에 얼굴을 마구 비비던 레이나. 지금껏 감금당해있던 그녀는 마침내 입에 물려진 재갈을 벗어내는데 성공했다.

"로제스...오르네!"

그녀는 천인공노할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심지어 자신을 공격까지 한 부학회장과 연구소장의 이름을 짓씹었다.

대체 뭐에 당한건지 알 수도 없이 당해버렸다.

씩씩거리던 그녀는 고깃덩이마냥 매달려 있던 몸을 버둥거렸다. 양 손은 수갑에 채워진채 위로 들려 벽에 묶여 있었다.

지금 이걸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은 한가지 뿐이었다.

가까스로 몸을 바로세운 그녀가 사슬을 붙잡고, 로프를 타고오르듯 그대로 공중제비를 돌아 천장에 발을 디디고 사슬을 무릎에 끼웠다.

그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후들거리는 팔로 버티던 그녀는 수갑 연결부의 볼트를 이로 물어뜯어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관리가 잘 되지 않았던 녹슨 수갑의 볼트는 금세 덜커덕 거리며 흔들렸다.

"악!"

수갑이 풀린 순간 힘이 빠진 그녀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돌바닥에 떨어졌다.

꿈틀거리던 레이나는 욱신거리는 몸을 겨우 일으켰다. 마력봉인수갑덕에 막혀있던 마력의 흐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화염탄을 쏘아내 잠긴 창고 문을 박살내고 밖으로 나왔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거지?'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다는건 알고 있었다.

전기충격에서 깨어난 직후, 희미하게 지상에서 들려오던 끔찍한 비명과 고성소리는 분명 들었으니까.

하지만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 누가 감히 학회 연구소장의 저택을 습격한단 말인가? 도적? 아니면 학회에 반기를 품은 모종의 집단?

"하하..."

그러나 레이나는 비틀거리며 지상에 올라와, 그 모든 가능성을 부정했다.

도적도, 반란 집단도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만드는건 절대 불가능하니까.

그녀는 힘이 풀려 털썩 주저 앉았다.

화창한 햇살이 난장판이 된 저택 1층 내부를 환히 비추고 있었다.

애초에 이 저택이 3층짜리 대저택인걸 감안하면, 완전히 붕괴하듯 박살난 이 처참한 폐허를 만들 수 있는 이들은 한정적이었다.

"이건..!"

그때 거대한 마력의 파동이 희미한 바람을 타고 그녀의 몸을 간질였다.

벌떡 일어난 그녀는 서둘러 일어나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부서진 지붕의 파편을 엉금엉금 기어 올라갔다.

'마법사의 눈..! 그것도 저런 대형의!'

저 멀리 보이는 창공에 무언가가 보였다.

푸르게 빛나고 있는 마법의 눈이 안구를 도록도록 굴리면서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그것도 무려 4개씩이나.

그녀도 저 마법에 대해 알고 있었다. 저정도 규모로 시전하기 위해서는 말그대로 '군대'가 동원되어야 한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거지?'

안색이 창백해진 그녀가 서둘러 땅에 내려와 마침 고여있던 빗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기습당해 기절하고, 감금당했던 이틀 사이 세상이 뒤집혔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채.

"가자."

스스로의 뺨을 때린 그녀는 이내 걸음을 옮겼다. 이미 갈 곳은 정했다.

연구소장의 저택이 습격당했는데 바로 옆의 도시 리헬름이 멀쩡할리가 없다.

무슨 일이 터졌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일단 지금 이정표가 되어주는 저 눈이 있는곳으로 향하면 될 것이라는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통신구..!"

저택을 벗어나려던 그녀가 금이간 수정구 하나를 집어들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이 아는 식별번호의 수정구로 모두 연락을 돌려봤지만, 연락을 받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레이나는 그대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

"놈들이 지금..."

"동북 방향에서도 새로운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계속 주시해. 눈을 더 띄울 순 없나?!"

이곳은 주둔지 한복판, 마법사의 눈을 발견한 레이나가 서둘러 이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을때.

이곳에 급히 집결한 1만의 병력은 기껏 모인 주제에 호기롭게 출전하여 적들의 기지를 짓밟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많소. 역시 군을 쪼개서, 각 지역 방어부터 해야 하오!"

그 이유는 마치 그들의 약점을 알고 있다는듯 사방으로 퍼져 내륙을 향해 더 깊숙히 파고드는 적들 때문.

여기 급히 모인 1만 병력 대부분이 이 지역에 연고를 둔 이들이었다. 자신의 고향과 집을 습격하려는 놈들을 놔두고 적진으로 진격하라는 중앙의 명령에 곧이곧대로 따르기는 힘들다는 뜻이었다.

"이런 제길. 하지만 우린 놈들의 목적도, 정확한 숫자도, 정체도 모르오. 시간을 끌었다간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른다고!"

총사령관으로 파견된 이는 금사로 치장된 로브를 걸친 사람으로, 대륙 의회 출신의 마법사.

위기상황시 파병한다는 협정에 따라 각 마법사 학회들은 마법사들을 파견하긴 했지만 서서히 그 권력을 키워가던 그들이 의회출신 지휘관의 말에 순순히 복종하는 건 아니었다.

"뭘 그리 고민하오! 어차피 놈들의 움직임은 전부 감지해내서 알고 있는 것을. 어서 통신을 날려 방비를 갖추라 명하고, 각개격파하는게 답 아니오!"

그중 유독 거품을 무는 이가 있었으니 블레이클 학회의 부학회장 로제스였다.

그날 밤, 레이나를 기절시킨 뒤 연구소장의 저택을 떠났던 그는 기적적으로 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인근 마을에서 습격소식을 들은 그는 기겁을 하며 일단 도망치려다가, 상부의 지시를 받고 어쩔 수 없이 모집된 군에 합류한 상태였다.

'도대체 뭐지? 검은 괴물들이라니, 파멸귀라니? 파멸귀는 이미 멸종한 것 아니었던가?'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혼란스러움에 로제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니, 사실 그는 짐작가는 바가 하나 있었다. 본인이 무참하게 짓밟은 한 소년의 간절한 구원요청.

지금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들려는 괴물들이 달빛요정들을 학살하고 그 미궁에서 기어나온 것이라면.

'절대 숨겨야한다. 어, 어차피 리헬름의 생존자는 한명도 없이 다 죽었다니까.'

흠칫한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학회 지부가 하나 통째로 날아간 것 따위, 세상이 위기에 처한 것 따위는 지금 자신의 신변을 가장 중시하고 있는 그에겐 신경쓸 가치도 없었다.

"어서 계산해서 보고하시오. 지금 가장 위급한 지역이 어디이며, 방위가 진정 불가능한 것인지!"

총사령관이 결국 학회 마법사들의 의견을 일부 수용했다.

군대의 일부를 떼어, 방위가 힘든 지역에 파견하겠다는 명령을 내렸다.

"우리는 놈들의 모든 동향을 알 수 있고 규모도 알 수 있소. 거기에 실시간으로 통신도 가능하지. 유기적으로 움직이면 충분히 가능하오. 그 사이 본대는 저 벌레놈들의 둥지를 공격할 것이오."

"그, 그럼 내가 그 별동대를 이끌겠소!"

로제스는 냉큼 손을 들어 자원했다. 그의 속내를 모르는 다른 이들은 모두 감탄했다. 본대와 따로 떨어져 움직이는게 훨씬 위험하다는 생각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블레이클의 로제스 레블랑. 당신이 이곳에서 지시하는 곳으로 가서 적들을 막고 시민들을 구하시오."

총사령관은 그에게 직통으로 연결된 수정구 하나와 2천명의 병력을 딸려주었다.

자칫하단 오히려 손해만 볼 수 있는 두마리의 토끼 잡기. 인간측은 이렇게 승부수를 던졌다.

근거는 압도적일 것이라 판단되는 자신들의 정보수집 및 전달체계였다.

적들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관측하고, 그에 맞춰서 움직일 수 있다는.

[좀 아쉽게 되었군. 의도대로 놈들이 갈라지긴 하지만, 2천과 8천으로 그리 큰 덩어리가 떨어져 나가진 않았다]

"상관없어."

그러나 그들은 한가지 사실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았다.

이브는 둥지에 만들어둔 옥좌에 앉아 눈을 반짝였다.

현재 군단의 시선은 그들의 움직임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한가로이 나는 새, 땅을 기는 풀벌레등 군단이 뿌려놓은 정찰병들 역시 마법사의 눈 못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가 서로의 움직임을 전부 보고 있다한들, 이 세상 그 어느 통신기기도 군단의 군체의식을 이길 수는 없을 테니.

"오...이런 미친."

"가, 갑자기 왜 그러시오 톰슨!?"

"지,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거지?"

상대도 자신들을 보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본대가 진군을 계속했다.

당연히 일종의 감시탑 역할을 하는 마법사의 눈은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마법사의 눈을 유지하는 마법사 중 하나인 톰슨은, 자신의 시신경과 연동된 마법사의 눈에 보이는 광경에 경악했다.

"끔찍한...끔찍한 둥지가 있소."

"그, 그건 이미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소! 놈들의 본거지로 보이는 이상하고 괴기한 둥지가..."

"그런 수준이 아니오!"

"으, 으아악!"

"저게 뭐지?!"

톰슨의 고함과 함께 같이 마법사의 눈을 유지하던 다른 마법사들도 일제히 놀라 비명을 지르거나 기겁했다.

어느정도 진군한 그들의 눈에 보이고 있는 것은 더 이상 거점둥지 정도가 아니었다.

푸르른 산천초목을 모조리 집어 삼키고 검게 물들이고 있는 거대하고 광활한 둥지.

군단의 만능세포가 무한정 배양되고 있는 끈적이는 점액질 웅덩이부터, 썩어 문드러진 것 같은 나무들이 세계수의 위용에 걸맞는 크기로 자라고 있는 그 모습들에 모두가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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