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79화 (79/254)

79화-침략과 침식(8)

"크허억..."

일격, 아직은 어설프기 짝이 없는 검이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사실 남들과 비교하기 힘들었다.

이브가 오직 나만을 위해 만들어준 힘으로 나는 나와 대련하게 된 모든 이들을 때려눕혔다.

"어딘가 변하셨습니다."

"이제서야 정신을 차린거라고 하죠."

놀랍다는 듯 입을 연 지창현의 말에도 차마 표정을 풀기가 어려웠다.

나는 내 검에 얻어맞아 검을 놓친 장교출신 수련생에게 인사하고 대련장을 벗어났다.

"제가 보기엔, 정신을 차렸다기 보다는 다른 이유가 생긴 것 같군요."

"...다른 이유라니요?"

"스승님께서도 그렇게 말하십니다. 지금 강신우씨의 검에는 짐이 달려 있다고. 사명, 의무, 뭐 그런 것 말입니다."

"짐이라."

그의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제 내게는 변명할 수단이 없었으니까.

고작 17살 먹은 동생이 스스로 싸우겠다고 선택한 길을 내 눈으로 직접 본 이상, 나도 싸워야했다.

"10년 전엔 어린애였으니 어쩔 수 없다는 핑계가 있었죠. 이제는 어른이 되었고, 날 도와주는 이들도 있습니다. 기회는 잡아야죠. 무력한건 싫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단순히 검을 휘두르는게 아니라 그 검에 진실된 자신의 의지를 담으라는게 스승님의 가르침이니 강신우씨 당신은 벌써 그만큼 앞서나가는군요."

지창현은 웃으며 박수를 쳤다. 솔직히 그가 검에 대해 뭘 말하는지는 아직 감이 잡히지 않았다.

군단과 동생일등 내 진짜 사정을 모르는 그는 아마 살짝 다른 방향으로 오해한 것 같지만, 사실을 말할 수 없는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제 곧 출전합니다. 준비해 두시길."

지창현은 그대로 나를 지나쳐 다른 사람들에게 향했다.

출전, 말 그대로 연합군은 다시 한번 공세에 나선다. 아마 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전투를 벌일 것이다.

적들의 전력도 대충 알아내었고 수호자 연합에게서 훈련을 받게 된 이들이 연합군 내에 새로운 전력으로 편성되었으니까.

어쩌면 이건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철저한 개인전 데스 게임이던 게임이 점차 세력전의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

이래서야 기존 강자들의 노름판일줄 알았던 이 게임판이 내 생각 이상으로 질질 끌릴지도 모른다는 것까지 생각이 미쳤다. 필요에 의해 서로서로 교류하며 계속해서 강해질 것이다.

"지금의 나 수준이면 군단병을 상대하는게 가능한가?"

[...상위종 말이냐?]

그냥 한번 중얼거린건데 어째 떠오른 글자에서 감정이 읽히는 것 같다. 나는 그냥 대답을 듣는걸 포기하고 짐을 챙겨 자리를 떴다.

"이번엔 나도 함께해. 양측이 제대로 마음을 먹은만큼, 이제 정말로 전면전이야."

"플레이어는 아무 말 없던가요?"

"아마 다른 곳에 신경쓰고 있겠지."

막사에서 만난 차지연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플레이어가 유닛으로 거느린 스텝 업 헌터들은 지금 연합군과 긴밀히 공조하며 전세계에 퍼져있다.

군단의 규모가 커지고 여기저기 살펴볼 곳이 많아진 나도 정신 없을거라는 말에는 백번 공감했다.

"솔직히 말하면, 너는 싸우지 않았으면 하는데..."

"어쨌든 절 이용해 먹으려고 가르쳐 놨는데 플레이어가 두고 볼까요? 그리고 저도 싸울 수 있어요."

"제약이 걸린건 아니잖아. 플레이어가 아니라 순수한 내 마음이야. 하긴 지금은 별로 가치가 없지만."

허탈히 중얼거린 그녀가 고개를 떨궜다. 이쯤되니 궁금해졌다.

플레이어와 유닛의 관계는 절대적이지 않다. 즉 목줄이나 마찬가지인 제약을 받아들인건 그녀 본인이라는 뜻이다.

"제약을 걸지 않으면 내게 힘을 주지 않겠다고 했거든. 어차피 그가 원하는 바와 내가 원하는 바가 같으니 나는 강해질 수 있다면 상관 없다고 생각했어."

"그 원하는 것이란건."

"마물들을 죽여서, 사람들을 구하는 것."

그녀는 담담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어찌보면 수호자 연합의 사상과 참 잘 들어맞는 생각이었다.

"마물들에겐 좋지 않은 감정이 있어."

"...그렇죠. 아마 대부분이 그럴걸요."

얼핏 듣기는 했다. 그녀도 자기 가족 중 하나가 10년전 그날 마물에게 당했다던가.

그녀가 동생이 당한날 찾아간 내 이야기를 듣고 분노하고 위로하며 복수를 해주겠다며 불탄것도 그런 공통점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후회는 안해. 장기말처럼 쓰이는건 힘을 얻었으니 그에 맞는 대가를 치룬다고 생각할거야. 놈들은 유닛이기 이전에도 사람들을 해치던 괴물들이야."

입술을 깨문 차지연이 전의를 불태웠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얼굴 너머로 그녀는 볼 수 없는 화면을 띄웠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내 유닛인 군단도, 이브도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찰병의 시선으로 화면을 돌리니 상대 진영의 모습이 보였다.

수많은 인간들이 집결해있다. 우리는 아직까지 저 세상의 유닛이나 플레이어는 만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저들에게 미궁에서 기어나온 군단은 어떻게 보일까.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는, 군단이 마계에서 기어 나온 침략자들인 마물들과 같아보이지 않을까.

"그냥 싸우는거죠."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미 선, 악에 대한 생각은 이미 많이 바뀌었다.

생존경쟁에 선악은 없다. 그저 잡아먹고 잡아먹히는게 이 세상의 법칙.

설령 군단이 인간들을 적대하지 않는다한들 군단이 세상을 침식해 들어가면 그들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

그러니 그냥 서로 마음껏 증오하고 싸우면 된다.

서로의 목숨을 건 사냥에서 죄책감 같은건 가질 필요가 없다.

"네 말이 맞아. 그놈들이랑은, 그냥 싸우는거지.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그냥 내가 원하는 바를 위해서."

차지연이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웃었다.

"저기..."

"크, 크리스 씨랑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였나요?!"

나는 대놓고 내 손을 만지작 거리는 그녀의 행동에 당황했다.

"무슨 소릴 하는거야. 그 녀석은 본국에 이미 약혼자가 있어."

물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장에서는 사람들 모두 평소와는 다른 감정선을 갖고 있다는걸 지금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 온 이후, 아니 처음 유닛이 된 이후 늘 내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미련이 남거나 후회할 짓은 절대 안하려고."

몸을 기울인 그녀의 얼굴이 책상을 넘어 다가왔다.

차마 입을 못뗀 나 대신 그녀를 멈춰세운 것은, 밖에서 다급히 그녀를 찾는 에볼루션 관계자의 외침소리였다.

*

[그가 속한 세력이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지금도 매우 바쁘게 움직이고 있지. 아마 빠르면 내일, 늦어도 이틀 안으로 그도 출전할 것이다]

"그딴건 상관 없어. 그보다 누구지? 감히 누가 그의 감정을 흥분하게 만들었지? 이젠 대충 구분할 수 있어. 이건...이건 전투나 긴장등으로 인한 흥분이 아니야."

[그것이 중요한가? 네게는 그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몰라도 결국 그는 평범한 사람이다. 아무리 딸 같은 존재라도 얼굴도 모르는, 직접 대화도 안해본 존재보다는 동족이자 서로 통할 수 있는 이성이 더 끌리겠지]

"아니야!"

발을 구른 이브가 형상력이 담긴 고함을 내질렀다.

그 격렬한 분노에 근처 둥지 전체가 뒤틀리며 요동쳤다.

"어, 어서 그에게 얼굴을 보여주고 대화도 해야겠어. 그러면 날 봐줄거야."

[...대화를 할수나 있을지 모르겠는데]

이브는 애써 목소리를 무시했다.

안타깝게도 지금 그와의 소통에 온전히 집중할 수는 없었다.

집결하기 시작한 인간들의 군세가, 가장 가까운 거점둥지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 어쩌지?"

마찬가지로 거점둥지 중 한곳에 대기하던 강도연이 대응 방법을 문의했다. 이브는 빠르게 계산을 시작했다.

"내가 말했었지. 인간들은 쓸데없는 감정에 자꾸 휘둘린다고.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어."

계산 자체는 금방 끝났다. 이브는 흩어져 있는 군단병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한 덩어리로 뭉친 놈들이 천천히 진군하며 전면전을 요구하고 있지. 하지만 우리 목적은 시간을 끄는 것. 그러니 굳이 놈들의 의도에 말려들 필요가 없다."

이브가 내린 명령은 철저한 후방 교란과 게릴라였다.

이미 이곳 인간들의 감정과 행동 패턴, 그리고 처한 상황등 모든 정보를 빼낸 후였다.

그들이 구원 활동을 마냥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브는 후방의 마을이나 도시들을 계속해서 습격하여 결국 지켜야할 것들이 있는 그들이 가진 명분부터 부숴버릴 생각이었다.

게다가 설령 이 계획이 실패해도 상관 없었다.

후방 교란은 그저 선택지 중 하나일 뿐, 실패하면 그대로 모여서 싸우면 그만이었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그에게 내 얼굴을 보여줄거야. 선물과 함께."

"그, 그런 말은 굳이 안해도 될 것 같아."

이브의 말에 식겁한 강도연이 태클을 걸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놈들이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주지 않는 이상 우리가 이겨."

"그러니까 그런 말은..!"

[명령을 받은 군단병들이 놈들의 본대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져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백km 이상되는 전선의, 수백군데에서 벌어지는 동시다발적인 움직임이다. 이걸 알아채지 못하는 이상 확정타는 막을 수 없다. 하지만...놈들에게도 아직 여력은 충분해 보인다]

강도연의 불길한 직감은 들어맞았다. 군단이 움직임을 보이는 즉시, 뭉쳐 있던 인간 진형의 본대에서 저 높은 상공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반투명한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는 그것은 거대한 마법의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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