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침략과 침식(7)
'무슨 문제라도 있나?'
"어. 있어."
가면을 벗은 강도연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파괴당한 마을에 자리잡은 군단의 둥지.
흡수와 분석기능은 배제하고, 오직 소화분해 기능에만 집중한 일종의 거점기지였다.
이런 거점기지들은 양분 삼을 유기체들을 투입하면 그것들을 분해해 양분으로 치환해 군단병들에게 보급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왜 내게 정지 명령을 내렸지? 분명 나보고 나서서 싸우라고 했잖아!"
'그랬지.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어.'
"상황?"
항의하던 강도연이 당황해 움찔거렸다.
'그는 네가 싸우는걸 바라지 않는 것 같았거든.'
군단은 정보의 통제를 풀어, 그녀에게 직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알려주었다.
놀란 강도연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해갔다.
"이브."
'무슨 말인지 알겠지.'
멍하니 중얼거린 그녀가 지끈거리는 머리에 눈을 찌푸렸다.
그녀를 전투에서 제외한건 군단이 아닌 신우의 뜻이었다. 군단은 단순히 그 의지를 접수하고, 그 부탁을 들어준 것 뿐.
오히려 군단은 그녀를 전선에서 빼는걸 탐탁찮게 생각하고 있었다.
'솔직히 이해할 수 없어. 약해서 상처받을까 걱정이라면 그저 숨고 피하는게 아니라 싸워서 강해지는게 맞아. 도망쳐봐야 영원히 도망칠 뿐이니. 하지만 그가 원한다면...따라야지.'
"그럼 내 빈자리는. 나보다 강한 개체는 없잖아."
"만들면 돼."
"..!"
강도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이 거점둥지를 만드는데 쓰인 신목의 줄기.
신목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 거점둥지에 비축된 모든 에너지를 들이부어, 세포를 과속분열시켜 급성장시켰다.
사실 이런 생산법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 수준의 비효율을 자랑하지만 먹이가 풍부하다 못해 넘쳐나는 지금은 그냥 감수했다.
곧 나무 줄기에서 사람의 형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체, 검은 장발, 몸에 박힌 동력기관등.
"앞으로는 내가 직접 싸워. 지휘개체 운용은 군체의식의 부담이 좀 커지지만 어쩔 수 없지."
순식간에 자신의 육신을 만들어낸 이브가 바싹 말라버린 신목을 부수고 지면에 착지하며 강도연을 보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아..."
분명 싸움이 두렵고 거북한건 사실이었다. 다른 세상 사람이든 어쨌든 자기와 똑같이 생긴 인간들을 죽인다는 행위에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이렇게 배제당하자, 강도연은 어째서인지 가슴이 아렸다.
"이상하네. 왜 그런 감정을 품지?"
"...빠지기 싫어."
군단 그 자체인 이브는 단숨에 자신의 일부나 마찬가지인 강도연의 감정을 알아쳤다.
그걸 알고있는 그녀도 숨기지 않고 자신의 본심을 말했다.
"넌 지금 두려워 하고, 망설임도 가지고 있지.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투지와 욕망을 가지고 있어."
"맞아."
"모순적이군. 역시 순혈 인간의 감정선은 비효율적이고 쓰레기야. 복잡하고 뻔뻔해서, 자기 자신의 발목을 잡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이브가 가면을 쓴 얼굴을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그러나 강도연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나는 오빠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10년전부터 그랬어. 무력하게 당하는건 이제 싫어. 나는 강해져서, 내게 소중한 걸 지킬거야...누군가를 죽여서라도."
"..."
흔들리던 마음이 이 순간을 기점으로 동요를 멈췄다. 마치 가면을 썼을 때 처럼. 하지만 지금 강도연은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이브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계산을 시작했다.
[그의 부탁과, 당사자의 의지 사이를 저울질 하느냐. 넌 무엇을 우선할거지?]
"답은 이미 나왔어."
이브는 금세 계산을 끝냈다. 사실 군단의 입장에서, 하나뿐인 서브마인드를 후방에서 놀게하는건 애초에 그리 끌리지도 않았다.
"네 의지를 증명해. 의지, 인간이 가진 그나마 쓸모있는 힘을 사용해서."
"증명하라고?"
"지키기 위해 싸우겠다며.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곳으로 이동해. 놈들이 감히 우리 거점을 공격하려하니 군단장, 지금 당장 출격해 놈들을 전부 죽이고 우리의 둥지를 지켜."
이브는 강도연의 뇌리에 지금 이곳에서 수백km 떨어진 곳의 상황을 보여주었다.
그곳에도 거점 둥지가 있었다. 지금 그 둥지로 향하는 한무리의 군세가 있었다.
"하, 하지만 너무 멀잖아! 시간이 부족해!"
"말했을텐데. 네 의지를 증명하라고. 넌 그의 동생이기 이전에 내거야. 강해지는 것도, 내가 정해."
"으읍!"
이브는 자신의 몸을 움직여, 강도연을 덮쳤다.
말그대로 껴안았다. 애정행각 따위는 전혀 아니었다.
"아흐...아아아악!"
눈을 부릅뜬 그녀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미친듯이 비명을 질렀다.
이브가 만능세포로 구성했던 자신의 육신이 붕괴함과 동시에, 강도연의 몸에 진득하게 달라붙으며 그 안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온 몸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고통은 감염균이 희생자의 신경계를 주무르며 고문하는 것과 비슷하다.
'견뎌내면 힘을 얻고, 견디지 못하면 도태되리라.'
이브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녀의 정신에 속삭였다.
천혼술은 현재 군단이 동력기관을 이용해 형상력을 발현하는 기본적인 매개였고, 그 천혼술은 본인의 의지와 혼의 격으로 작동한다.
아무리 동력기관을 주렁주렁 달아주어도 사용자의 의지가 나약하다면 효율이 없다.
덩치를 이만큼이나 키운 초생물인 이브 본인이야 아무 문제 없지만 강도연은 아니었다.
어쨌든 강해지려면 스스로 자격을 증명해야했다.
'이겨낸건 너지만 어쨌든 남들은 얻지도 못할 힘을 떠먹여줬어.'
영원할 것 같은 고통의 시간이 끝났다. 현장에 혼자 남게된 강도연이 개조된 몸을 일으켰다.
외견상 달라진 부분은 거의 없다.
하지만 체내에 잠든 만능세포의 수가 거의 두배가 되었다. 즉 심장을 대체하는 동력기관의 크기도 두배가 되어, 출력이 두배로 상승했다는 뜻.
"흐아아..."
뜨거운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인 그녀의 등에서, 검은 깃털에 쌓인 거대한 날개 한쌍이 고속으로 뿜어져나왔다.
날개의 관절부에서도 검붉은 광석이 번쩍였다.
'아직 완전한 증명이 끝난건 아니야. 가서 적들을 막아봐.'
그녀는 단숨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날개만 달린게 아니었다. 등허리의 갑주에 만들어진 구멍을 통해 엄청난 속도로 추진력을 내뿜었다.
"선택의 시간."
이를 악문 그녀는 스스로 중얼거렸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모든 것을 가질 순 없다. 그러니 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뭐, 뭐냐!"
"하늘에...으아악!"
단숨에 현장에 도착한 그녀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땅에 착륙했다.
그 충격파로 일어난 흙먼지와 함께 거점둥지에 접근하던 이들이 우당탕 바닥을 굴렀다. 둥지 근처에 그 어떤 군단병도 없었다.
이브가 전부 뒤로 물린 것이었다. 이 자리는 오직, 강도연을 위한 시험의 장.
'이들은 나의 적, 군단의 적.'
검게 물든 눈에서 붉은 안광을 번득인 그녀가 가면을 쓰지 않은 채 고개를 들어 당황하고 기겁한 그들을 보았다.
"여자..?"
"괴물이라고! 죽여!"
당황한 그들이 관성적으로 각자의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그녀도 선택을 내렸다. 괴물, 그 말에 백번 공감했다.
'난 괴물이다.'
그녀가 순간 칼날처럼 얇아진 자신의 날개를 휘둘렀다.
검붉은 기운에 휘감긴 날개가 칼날처럼 휘둘러진 순간. 사방에서 피분수가 뿜어졌다.
"으아아!"
그 일격에서 운좋게 살아남아, 검을 들고 자신에게 덤벼들던 병사의 목을 갑주에 덮이고 날카로운 손톱이 돋은 손으로 잡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힘을 주었다.
"끄윽."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목이 부러진 시체가 축 늘어졌다.
순간 그녀는 자신을 죽이려들다 끝내 팔다리를 자르고 부숴버린 푸른 슈트의 붉은 십자눈과 숨이 끊어진 병사의 얼굴을 겹쳐보았다.
그 당시의 고통과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으, 으아..."
"도망쳐!"
압도적인 광경에 남은 이들이 그대로 몸을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정보를 숨기는건 기본중의 기본.'
이브는 당연히 둥지를 찾아낸 이들을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강도연은 이를 악물고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녀가 한번 움직일 때마다, 사람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져갔다. 그녀의 감정을 읽은 가면이 자꾸만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충분하군. 적어도 방어시킬때는 문제 없이 싸우게 만들 수 있겠어.'
하지만 그녀가 도망치던 마지막 상대의 등에 손을 꽂아넣어 관통시켰을 때.
이브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방어...시킬 때라니?"
'슬슬 적들이 진심으로 뭉치는 것 같거든.'
군단은 숨을 몰아쉬는 강도연에게 지금 사방에 퍼져 있는 정찰병들이 가져 온 데이터를 보여주었다.
이제 군단의 정체가 드러난지 만 하루가 되어간다.
그동안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지역단위로 구조활동이나 벌여오던 인간들이, 나름 빠르게 뭉쳐 군대를 소집했다.
'시간을, 최대한 시간을 끌어. 모든 역량을 침식과 소화, 둥지확장에 소요하고 있으니 지금은 미리 생산한 병력만으로 막아야하니까.'
군단은 그 도전을 받아주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