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침략과 침식(6)
"뭐야. 생각보다 별거..."
"방심하진 마라 잭. 다들 정비해라. 분명 남은 놈들이 있다."
첫 충돌에서 승리를 거둔 기사들이 단장을 중심으로 모여서 전열을 재정비했다. 그런 와중에, 이 진법의 핵심이 되는 젊은 마법사는 말에서 내려서 무언가를 살피고 있었다.
"뭘 살피고 있습니까 아레스."
"조금 특이해서 말입니다."
"특이하다?"
"파멸귀들에 대한 옛 기록들은 모두 영상으로도 남아 있습니다."
마법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선 자신이 공부한 옛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파멸귀들은 기본적으로 산채로 물들인 희생자들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짐승도 포함되죠.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 세상에 이렇게 생긴 생물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그가 군단병 하나의 머리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확실히 검은 갑각을 마치 기사의 갑주처럼 두르고 있는, 짐승인지 곤충인지 갑각류인지 알 수 없는 그 모습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순간 모두의 입이 다물어졌다. 오직 자신들을 죽이겠다는 살의를 품고 전력으로 달려오던 그 붉은 안광들이 뇌리를 스쳤다.
"처음 놈들이 나타난게 고대의 미궁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변화가 있었나보지요. 한물간 고대의 생물들에게 우리가 질리 없습니다."
그러자 방금전까지 긴장하라며 다그치던 기사단장이 오히려 호탕하게 웃으며 심각한 분위기를 환기했다.
하지만 스타스 학회의 마법사 아레스는 그 말에도 회의적이었다.
'단 하룻밤만에 일대 전체가 동시에 타격당했다. 물론 지금 처럼 단순한 짐승들이라면 곧 진압되겠지만.'
나름 촉망받는 학회 출신이기에 주워들은게 있었다. 그중에는 한밤중에 수많은 통신구로 날아든 구원요청이 날아들던 당시의 상황도 포함되었다.
습격당한 도시 리헬름을 다스리는 시청이나, 해당 도시에 지부를 둔 블레이클 학회의 연구소장은 물론 도시에 있는 개인 마법사들, 인근 마을들에 머물던 마법사들까지.
그의 선배는 분명 모두가 울부짖는 그 광경을 단 한번도 본적 없는 끔찍한 지옥도라고 표현했다.
'애초에 멸종판정을 내린 파멸귀가 맞기는 한건가?'
"이건? 모두 경계해라!"
도통 풀리지 않는 의문을 품은 아레스가 다시 말에 오르려는 그때.
무언가를 감지한 기사단장이 마창을 안장에 껴두고 검을 뽑아들었다.
'온다.'
"땅이 진동한다!"
땅이 뒤흔들리는걸 감지한 아레스가 눈을 부릅뜸과 동시에 기사들도 경악하며 마구 날뛰는 말을 통제하려 애썼다.
도주하기 늦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들 필사적으로 고삐를 움켜쥐고 말위에서 버티는게 전부였다.
"밑이다!"
누군가 땅에서 일어나는 이변에 대해 소리쳤다.
마구잡이로 뒤틀리는 땅 속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기사단장의 나지막한 탄식과 함께, 폭발음이 터지며 그들이 딛고 서 있던 지면이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아레스는 충격에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타고 있던 말과 함께 허공으로 튀어오른 그는 이내 강한 충격과 함께 바닥에 부딪혔다.
충격으로 찡 울리는, 흐려진 그의 시야에 더 높이 치솟은 말과 기사들도 보였다.
'커헉..'
입안에서 진득하고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무언가 나타나 그림자로 그의 몸을 덮었다.
땅속에서 반쯤 모습을 드러낸 거대하고, 단단해보이는 몸을 가진 또 하나의 괴물.
암반을 부수고 땅을 파는데 쓰는 억센 두 팔 중 하나가, 발톱을 세운채 그를 내려찍기 위해 들어올려졌다.
피해야하지만 욱신거리는 몸은 쉽게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정신 차려!"
휘둘러진 그 억센 손에서 그를 구해낸 것은, 몸을 날린 기사단장이었다.
터져나오는 충격파에 함께 땅을 구른 기사단장은 정신을 못차리는 아레스의 뺨을 연신 두들겼다.
"당신은 진법의 핵심. 지금 당신이 정신 못차리면, 여기 있는 전부가 죽습니다."
"네...네!"
그 이글거리는 눈에 짓눌린 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자리 잡아라!"
기사단장은 살아남은 기사들을 통제했다. 이를 악문 기사들 모두 검을 들고 자리에 섰다.
다시 한번 선두에 서 있던 공격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기사들은 괜히 자리를 갖추고 서 있던게 아니었다.
'마력을 가진 기사들을 축으로 삼아. 회로를 그린다. 방어 8진.'
중심축이자 핵심인 마법사 아레스가 진땀을 흘리며 마법을 시전했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인 기사들의 움직임에 호응해, 그들을 이용한 마법사 1인이 펼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어막을 펼쳤다.
"큭!"
"버텼다!"
그들 모두 죽음 직전의 순간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 결과는 강한 충격과 함께 튕겨나간 적의 공격.
"공격진으로!"
동시에 기사들이 다시 한번 위치를 조정했다.
수백, 수천번 이상 반복해서 합을 맞춰 발현하는 뼈에 새긴 움직임이었다.
이번에는 방어막 대신, 그들의 몸에 타오르는 마력의 불길이 휘감겼다.
"돌겨어억!"
기사단장이 그 상태로 앞장서서 튀어나갔다. 몸에 두른 강화효과가 사라지기 전에, 적을 베어야했다.
'효과가 있다!'
후방에 남은 아레스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평범한 창칼로는 씨알도 안먹힐 저 거대하고 두꺼운 갑주가 베이며 피를 뿌렸다.
동료의 도움을 받아 허공으로 날아오른 기사단장이 머리에 검을 내리찍는 것을 끝으로, 괴물의 몸이 서서히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반색한 아레스는 서둘러 기사들에게 달려갔다.
"마법 준비하십시오. 아직 안끝났습니다."
그러나 기사단장은 오히려 더 긴장을 끌어올리며 손으로 저 앞을 가리켰다.
"저게 대체..."
아레스는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중얼거렸다.
군단은 어느정도 성장한 이후 만능형 병사들은 효율을 이유로 양산을 중단했다.
대신 만능형 병사들은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하여 상위종 군단병으로 개조되었다.
만능이라는 장점에, 화력부족이라는 단점을 형상력으로 채운 것.
지금 그 상위종 군단병 3인조가, 가까스로 승리를 거둔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그중 가운데 있는 것은 가녀린 체형의, 검은 단발을 찰랑이는 존재.
"자리 잡아! 호위대형!"
감히 상대를 분석하고 평가할 여유가 없던 기사들이 다시 한번 기민하게 움직였다.
이번에는 대상을 지키면서 싸우기 위한 대형이었다.
숨막힐 것 같은 긴장과 침묵. 상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측에 자리한 군단병들이 4개의 팔에 검을 천천히 뽑아들었다.
가운데 서 있던 강도연도 검을 들었다. 검붉게 타오르는 검에 모두가 기겁했다.
"선공하겠습니다!"
상대는 고작 셋뿐이지만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아레스가 주문을 쏘아보냈다.
급히 만든 주문이지만 무시할 수준은 아니다.
"이럴수가."
그러나 쏘아낸 푸른 마법의 창은 그들이 생성해낸 검붉은 베리어에 손쉽게 막혔다.
턴을 넘겨받았다는 듯 이번엔 군단병들이 움직였다.
"온다!"
기사들은 방어대형을 갖추고 상대를 맞이했다.
땅을 박찬 상위종 군단병 둘이 4개의 검에 꼬리까지 휘두르며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놈들이..."
미리 갖춰둔 진형 속으로 빨려오다시피한 적들을 응징하기 위해 기사들은 사방에서 달려들며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단 하나의 검격도 닿지 못했다. 애초에 빨려들어온게 아니었다.
찰나의 순간, 서로 등을 맞대고 스치듯 검과 꼬리를 휘두른 것 만으로 기사들의 팔다리가 베이고 토막나 피분수를 뿜었다.
"끄헉...끄흡.."
기사단장은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꼬리를 붙잡고 피를 토해냈다.
그의 몸이 그대로 들려서, 상위종과 눈이 마주쳤다. 갑주 속 6개의 번득이는 안광과 이제 생명이 꺼져가는 분노에 찬 눈이.
"그 합격...분명..."
죽어가는 그는 적들이 난입해서 쓴 합격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원전보다 비교할 수 없이 발달하고 조밀했지만, 분명 한 기사단이 자신들이 주특기로 수련하던 합격술이 분명했다.
물론 군단에게 그 의문을 해소해줄 이유는 전혀 없었다. 부릅뜬 눈에서 생기가 사라진 그에게서 빼먹을 정보가 없다고 판단한 상위종은 그대로 꼬리를 휘둘러 그의 시체를 던져버렸다.
그는 죽어 날아가는 순간에도 검을 꼭 쥔채 놓지 않았다.
이제 남은건 원래 목적으로 하던 마법사, 아레스 뿐.
"혼자 죽진 않겠다."
모든 기사들이 쓰러진 그 순간. 굳게 마음 먹은 아레스가 자폭할 마음가짐으로 주문을 발현했다.
그걸 본 상위종은 아레스를 향해 팔을 겨누었다.
그리고 아차하는 순간 팔뚝에서 발사된 큼직한 독가시 하나가, 그의 가슴팍에 틀어박혔다.
이미 자폭에 두번이나 당해본 경험이 있는 군단이 똑같은 짓에 세번은 당하지 않을 작정으로 계획한 것이었다.
"끄어..."
독가시를 중심으로 몸에 퍼져가는 감염균에 저항하지 못한 아레스의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군단은 움직이지 못하게 된 그의 몸을 그대로 회수했다.
협력하지 않는 이상 죽지도, 미치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고통 받을 것이라는 걸 모르는데도, 그는 절망감에 마구 몸부림쳤다.
'네 몸은 이제 네 것이 아니야.'
그러자 속삭이는 듯한 누군가의 의지가 몸을 장악한 감염균을 통해 뇌리에 마구 꽂혀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