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침략과 침식(5)
[네가 화났다는걸 알고 있다]
"그래? 차라리 잘 된것 같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 안을 빙빙 걸었다.
일단 이성부터 챙겼다. 군단은 감히 일개 인간의 감정으로 다루려 해서는 안되는 존재였으니까.
내가 왜 화가 났고, 무엇을 부탁하려는지 오해의 소지가 없이 확실하고 명확하게 전달해야했다.
[지금 군단도 굉장히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넌 왜 화가 난 것이지?]
"...순간 참을 수가 없었어."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몰려왔다.
내가 화를 낼 입장인가? 전혀 아니었다. 군단의 성장, 그리고 그 성장을 통한 '우리'의 안위를 위해 난 줏대없는 소시민답게 군단의 살육행위를 애써 묵인하고 인정했다.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것도 군단의 탐식이나 비틀린 집착이 나에 대한, 그리고 내 주변에까지 뻗치는 것 뿐.
하지만 이 모든 이해와 인정은 순전히 군단이 자기 자신의 성장과 양분을 위해서라는게 전제였다.
"양분을 위해서, 성장을 위해서 죽이는건 그냥 넘어갔어. 근데 내가 좋아할만한 외모를 만들고 싶어서 여자들을 잡아 산채로 분해해 데이터를 수집한다는게 도저히 참을 수 없었어."
[어째서지?]
"자기 자신을 위한게 아니라 나를 위해, 나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거잖아!"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이건 내가 멍청한게 맞았다. 어차피 그들의 말로는 분석당하든 양분으로 쓰이든 결국 죽음으로 똑같다.
그러나 나는 참 이기적이게도, 나 때문에 사람을 잡아 죽인다는 사실은 차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유약해서야 왜 관조자가 군단의 자아가 성장할 때까지 날 패싱했는지 알것 같았다.
"영상을 찍어야겠네. 내 진심을 전할 수 있게, 일단 오해는 풀어야지."
나는 공기계를 만지작거렸다. 어차피 찍을 생각이긴 했는데 마침 지금 당장 필요한 일이 터져버렸으니까.
그저 내 말을 대리해서 전하게 하는 것 보다, 영상을 찍어 보내는게 내 마음을 전달하는데는 훨씬 효과가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기회에 한번 시도해 봐야지. 사소한 것부터 하나씩. 과연 군단이 내 말을 어떻게 들어줄지."
휴대폰을 설치한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행동을 혼내는 것도 아니고, 길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서로 소통하는 것 뿐이다. 믿는 구석은 지금까지의 행보로 군단이 나를 꽤 좋아한다는 것.
"어...일단 알아 듣는다고 생각하고 말할게. 너한테...하는 말이야. 지금 놀랐을 내 유닛, 군단에게."
그리고 이 영상은, 내가 처음으로 군단에게 직접 건네는 첫 소통이 될 것이다.
*
"왜 이렇게 느려!"
둥지, 지금 군단은 답지 않게 초조한 상태였다.
자신의 감정이 군단 전체에게 영향이 간다는걸 알고 있음에도 차마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혼자이자 다수인 이 거대한 존재에게 이렇게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이는 이 우주에 하나뿐.
그리고 군단은 지금 그 하나뿐인 이가 자신에게 보낸 영상편지가 미궁 최하층에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분히 기다려라]
"미리 말해줘! 화면도 바로 꺼버렸다며. 그, 그가 나 때문에 화난거야? 그것만 말해!"
수많은 사람을 잔혹하게 죽이면서도 조금의 동요도 없던 존재가 허공을 향해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 마구 소리를 지르며 발을 굴렀다.
[내가 전하는건 의미가 없을 것 같으니, 직접 봐라]
그때 지하 둥지에 그가 하사한 휴대폰이 도착했다.
도저히 기다릴 자신이 없었던 군단이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지상에 있는 육신은 그대로 두고 휴대폰이 있는 최하층의 둥지 세포 일부분을 과속성장시켜, 눈과 귀를 만들었다.
흐물거리는 촉수에 눈알과 귀가 달린 끔찍한 모양새였지만 외향같은건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대로 촉수를 이용해 휴대폰 액정을 두드려, 서둘러 영상을 재생했다.
"네 탓이 아니야."
그리고 영상속 그가 군단에게 하는 말이라고 못박은 뒤 내뱉은 첫마디가 이것이었다.
"그러니까...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었어. 사람은 말이지, 원래 남이 자기 때문에 죽는걸 좋아하지 않아. 특히, 나는 더더욱. 안좋은 기억이 많거든."
그는 자신이 왜 화가 났었는지 설명해주었다. 군단은 자신도 모르게 그 말에 동조했다.
무엇보다 이미 '인간'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분석이 진행된 상태였다.
군단에게도 군단의 본성이 있듯, 인간에게는 인간의 본성이 있으니까.
"인간을 죽이지 말라는건 아니야. 단지 외모를 만들기 위해서 그러지는 말라는거지. 예전에도 말했듯, 나는 네가 스스로 만든 모습이 제일 좋을 것 같으니까."
"스스로 만든 모습."
그도 군단이 몸을 만들려 한다는건 이미 강도연의 증언으로 알고 있었으니, 의심하지 않은 군단은 촉수를 끄덕끄덕 흔들었다.
그 모습에는 그가 혹시라도 자신의 명령을 무시할까 잔뜩 걱정하고 우려했던 반항적인 모습은 없었다.
"언제나 네가 제일 중요해. 네 의견을 존중하고 네 본능도 인정해."
'내가 중요해. 날 인정해.'
그는 패도적인 군단의 앞길을 막지 않으면서도 만일을 대비한 최소한의 영향력은 갖기를 원했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가 끼치는 영향력이 군단이 가진 본성보다 컸다. 군단에게는 백마디 말보다도, 네가 가장 중요하단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직접적인 소통을 못하던 그동안 혹시 모르게 품고 있던 불안함을 싹 날려주는 말이었다.
"네게 선물을 주고 싶은데."
'선물.'
"부를 수 있는 이름을."
이름. 그 한마디에 순간 군단의 모든 것이 움찔했다.
군단에게 이름 개념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이름이 무엇인지, 그 의미가 어떤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단지 지금까지 관심주지 않은 것은 감히 자신에게 이름 붙일 존재는 없었기에. 설령 누군가 자신을 특정한 지칭으로 부른다 한들 인정할 생각도 없었기에.
만약 그런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깊숙히 관여하고 있던 그 사람 뿐이기에.
"생겨났다는 군단의 자아에게. 네 이름...이제는 이브(Eve)라고 부를테니, 빨리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길."
그는 나름 며칠간 끙끙거리면서 고민한 이름을 말해주었다.
평범한 대학생이던 남자가 의미있고 거창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이름들 중 고른 것은 결국 조금은 평범하고 무난한, 사람에게 붙을만한 이름.
[마음에 드느냐]
'당연히.'
군단의 감정이 금세 바뀌었다. 지금 이순간, 그 어느때보다 기분이 좋아졌다. 그 어떤 선물보다도 값진 선물이었다.
[그렇다면 전장에 집중해라. 슬슬 인간들의 반격이 시작되고 있다]
영상은 거기서 끝났다. 동시에 군단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파죽지세로 뻗어나가던 습격, 그동안 계속 당하기만 하던 현지인들이 군대를 모아 본격적인 저항을 시작했다.
"죽여라!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고대의 마귀, 파멸귀(破滅鬼)들을!"
이곳에서 꽤 떨어진 지역에서 한무리의 기사들이 번쩍이는 갑옷으로 무장한채 말을 달려 마을을 습격해온 군단병들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이름 얻은지 채 몇 분 안되어, 새로운 이름을 얻었군. 파멸귀는 파멸균을 부르던 저들의 용어다]
"저들이 과거에 지상에서 몰아낸 파멸균들도 결국 우리의 일부가 되었으니 상관 없지. 그렇다면 복수의 기회인가."
군단, 이브는 그들이 자신을 지칭하는 호칭에 이제는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이름은 이제 하나로 고정되었으니까. 오히려 이 성스러운 이름을 저들이 부르게 놔둘 생각도 없었다.
'전부 죽여.'
그와의 소통으로 꿈만 같은 시간을 보내던 군단의 감정이 다시 차갑게 내려앉았다.
전쟁을 벌일때는 살육 기계가 되어, 그저 뜨거운 분노와 광기만을 내뿜는다. 오히려 이쪽이 군단의 진짜 모습에 가까웠다.
4발짐승을 베이스로한 중형 군단병들이 돌진해오는 기사들을 향해 땅을 박차고 내달렸다.
동시에 기사들이 쳐든 마창이 앞으로 겨누어졌다.
"진법 가동."
서로 살의를 품고 달려들며 충돌을 채 십여초 앞둔 상황. 안광을 번득이면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군마에 필적하는 덩치를 가진 흑갑의 괴물들을 보면 누구나 두려울 것이다.
그때 진형의 가운데 있던 사내가 팔을 쳐들었다. 그 손에는 마창이 아닌 끝에 보석이 박힌 짧막한 완드가 하나 들려 있었다.
"회로 연결. 출력 극대화."
그가 쳐든 완드가 빛나며 하나의 주문을 그렸다.
주문은 푸르게 빛나는 선을 그리며 작동했다.
이 주문회로의 기준점이 되는 점들은 다름아닌 함께 달리고 있는 기사들. 선이 연결된 그들의 몸이, 서로의 마력을 공유하며 푸르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기사들은 물론 군마까지 강화시킨 주문덕에 날카롭게 끝을 세운 진형은 단단히 결속되어 하나의 푸른 창이 되었다.
앞을 막을 모든 것을 부수고 쳐낼 강력한 거창이, 온 힘을 다한 기합과 함께 망설임 없이 달려들던 덩치큰 괴물들과 그대로 충돌했다.
"큭..."
"버텨!"
터져나오는 충격파는 무슨 폭탄이 터진 것 처럼 지축을 뒤흔들었다.
자욱한 흙먼지까지 동반한 그 충돌에서 충격과 연기를 뚫고 나온 것은 여전히 진형을 유지하고 있는 기사들이었다.
자신들보다 더 무겁고, 크고 단단한 적들을 말그대로 갈아버린 채.
'마법을 이용한 새로운 전투 방식. 호위하는 이들을 점으로 이용해 유기적으로 강화하고 움직이는 진법을 연구하는 스타스 학파.'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군단의 감상평은 심플했다.
'사용자를 보는건 처음이군. 갖고 싶어.'
그리고 이어지는 명령에 인근 숲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이들이 따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