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침략과 침식(4)
"이거 하나만 말해봐."
[뭘 말이냐]
"척살권을 방어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나?...뭐 척살반사권, 반사무시권, 무지개반사 이런 말장난 하자는건 아니지?"
[당연히 그런건 없다]
터무니 없는 말이었는지, 녀석도 순순히 대답을 해주었다.
물론 그래도 이해하기 힘든건 사실이었다. 그런 시스템적 방어수단이 없다면 지창현은 어떻게 그렇게 담담한 것인지.
대상을 가리지 않는 시스템적 권능인 척살권은 플레이어에게도 두렵지만 어쨌든 가장 위험한건 유닛아닌가. 육체가 없는 유령인 레이스도 찢어버리는 물건이었다.
플레이어야 몸을 숨기면서라도 단순히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지만 유닛은 구조상 반드시 앞에 나설 수밖에 없는데.
[그놈이 했던 말이 틀리지 않다. 게임은...게임일 뿐이다]
"절대적이지 않다라는걸 말하고 싶은건가?"
나는 쓰게 웃었다. 척살권 같이 시스템에 내장된 게임적인 힘은 분명 상상도 하기 힘든 것이었다.
세상과 세상을 이어주고, 집단과 개인을 강제로 연결시키며, 그 어떤 강자도 저항하지 못하고 목숨을 빼앗는 힘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시스템이 절대이고 진리인가?
[이 우주에는, 이 시스템을 뛰어넘는 힘들도 많다. 척살권은 그저 대상을 한번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그 죽음이라는게 무엇이냐. 육신의 활동이 정지하고 혼을 육신에서 이탈시키는 것을 보통 죽음이라 하지 않느냐]
"그러니까 그 상태를 극복할 수 있다면, 즉 무슨 편법을 써서든 죽음에서 돌아올 수 있다면 척살권은 두렵지 않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다만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군단도 척살권에서 자유롭다. 군단은 하나이자 동시에 다수. 개체 중 하나가 죽는다 한들 그것은 자신의 일부가 떨어져나갈 뿐이며 혼이 이탈하는 순간 연결이 끊겨 본신에는 타격이 없다.
기존의 가치관과는 달리, 죽음이라는 것이 어쩌면 내 생각보다 별거 없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이 머리를 스쳤다.
"불합리한데?"
내 입에서 지창현이 달고 사는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그나마 절대적이고, 밸런스를 잡을 수 있을줄 알았던 시스템의 힘도 벗어날 수 있다면 애초에 결과는 정해진 것 아닌가.
[너무 안심하진 마라. 편법이나마 잠시 벗어날 수 있는건 그 프로세스가 단순하고 명확한 척살권, 그것도 유닛 정도가 한계일 것이다. 게임에 저당잡힌 플레이어들의 혼은 벗어날 방법이 없다. 그리고 세상은 원래 불합리하며 현실은 게임이 아니다. 경쟁을 극복하지 못하고 도태되면...그대로 죽는게 세상의 진리다]
녀석은 또다시 원론적인 이야기로 받아쳤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애초에 이 게임의 목적은 살아남기 위한 경쟁.
그것도 매우 불합리한 경쟁이었다. 밸런스 패치 따윈 고려하지 않는 현실의 싸움에서 패자는 승자를 위한 경험치만 될 뿐이다.
기분이 그리 편치는 않았다. 결국 창작물 같은 기적적인 성장스토리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못박힌 이 상황에서, 내 유닛은 성장이라는 단어 그 자체였으니까.
"...화면 열어."
괜히 찜찜한 기분만 남기고, 늘 그렇듯 남는 시간에 혼자 막사에 남아 군단을 살폈다. 내가 지켜보는걸 모르는 군단은 지금도 한창 활동하는 중이었다.
군단이 인간을 죽이는 것도 이제는 덤덤하게 보는 가운데, 지금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저 아이에게 도대체 무슨 이름을 주어야 할까라는 것이었다.
되도록 의미 있고 예쁜 이름을 줘야 할텐데.
*
[그가 네가 개량해준, 형상력을 발현할 수 있게 단련하는 심법인 공명법을 익혀 그 성과를 인정 받고 성장하는데 성공했다]
"기뻐했어?"
[...그렇다. 어쩌면 다음 영상에 그에 대해 언급할지 모르겠군]
"다음 영상에."
신우가 지금 지켜보고 있다는 걸 모르는 군단은 오늘 그에게 있었던 일을 전해듣고 기분이 살짝 좋아졌다. 그가 주위에 인정 받았다느니 하는건 중요한게 아니었다.
그가 자신의 선물을 마음에 들어하고, 좋아하는가. 오직 그것 뿐이었다.
"그를 강하게 만들어줄 선물들을 구상중이야. 분명 더 좋아하겠지."
[그것은 옳은 판단이다. 그가 강해져야지만 너도 안전하니까]
군단은 지상으로 올라온 이후, 훨씬 더 다양하고 많은 지식을 습득하는데 성공했다.
직접 먹어치우고 분석한 데이터는 단순히 보고 듣는 것 이상의 재산이 되었으며 설령 먹어서 얻지 못하는 것들도 습득하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아아악!"
"말해..말한다고! 우선 동북방향으로 선을 그린뒤 거기서..."
이곳은 군단이 자신의 둥지로 만들어버린 숲의 한가운데.
한때 푸르른 산천초목이 자리했던 이 일대는 이제 이따금씩 박동하는 검붉은 육벽과 하늘 높이 치솟은 검갈색의 기괴한 나무들만이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었다.
어딘가 뒤틀린 그 거대한 나무들이 태양빛을 가리고 있는 그 밑부분. 군단병들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알들이 자리한 나무 줄기에,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이 반쯤 파묻혀 있었다.
"으끅...끅..."
체내로 침투한 감염균에 의해 극한의 고통을 맛보며, 군단의 의도대로 지식을 비롯해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토설하고 있는 그들은 모두 마법과 관련된 이들이었다.
지금 군단은 마법 지식들을 뽑아냄과 동시에 사회 상류층인 그들에게서 겸사겸사 이 세상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별로."
그 흔한 새소리 하나,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오직 비명과 괴성뿐인 이곳에서 손에 화륵거리는 불덩이를 띄워본 군단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포로들을 잡아와 심문하고 들을 걸 들어냈지만 아직까지는 만족스런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개나소나 배우는 하급 마법은 위력부터가 배울 가치가 없었고 나름 실력있는 마법사의 마법도 효율면에서 걸렸다.
이미 부소장이 시전하던 고위 마법을 본 군단은 적어도 그정도 수준의 마법을 원했다.
[하루만에 도시 하나, 23개의 마을, 2만명에 달하는 인간들을 사냥했다. 그리고 그 사냥은 계속해서 진행중이지. 인간들은 이미 우리의 존재를 알아챘고, 분명 그에 맞는 대응책을 마련할거다]
"지금 보내둔 병력은 그저 시간을 끄는 것 뿐이야. 우리 정체도 제대로 모르는 인간들이 우리의 확장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군단은 시선을 저 앞으로 돌렸다. 현재 쉬지않고 모든 식생을 먹어치우며 확장을 진행중인 이 둥지와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
처음에 최대한 살려두면서 모은 뒤, 추가적으로도 한번에 뿜어낸 수만에 달하는 군단병들은 파죽지세로 퍼져나가며 전방위적인 지역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있었다.
그 앞뒤없는 포악하고 과격한 진격에는 시선을 끌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패닉에 빠진 인간들의 온 시선들이 그곳들로 돌아간 사이, 이 일대를 방해 없이 전부 먹어치울 예정이었다.
그리고선 이 넓은 숲과 땅을 전부 군단의 세포로 덮어버릴 생각이었다.
"둥지를 더 넓히고 막대한 에너지를 손에 넣으면, 효율문제로 땅속에선 하지 못했던 것들도 마음껏 할 수 있으니까."
지금 군단의 머릿속에는 습득했던 인간의 지도를 바탕으로한 일대의 항공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비행종들을 풀어 단숨에, 정확하게 만들어진 그 항공지도 안에는 서서히 검게 물들어가는 대륙 구석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스스로 계산한 바에 따르면 일단 이 구석탱이 땅만 전부 먹어치워도 매일 같이 수백만마리의 중형 군단병을 뽑아낼 수 있었다.
또는 기존에 시도해보지 못했던 여러 조합을 시도해보는 것도 가능했다.
'상급 마법을 익힌 학회의 마법사를 반드시 잡아와. 그 외의 놈들은 전부 죽여서 양분으로 삼는다.'
군단은 지금 전선에 나가있는 군단병들에게 다시 한번 지시를 내렸다.
이런 최소한의 안정화를 위해서는 교란 작전이 반드시 필요했다.
'마법사 학회, 그리고 대륙의회.'
이제 현지에 어떤 강자들이 있는지, 그들이 어떤 구조로 권력과 힘을 갖고 휘두르는지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들의 강함을 전해들은 군단은 최소한의 손실로 승리하기 위해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힘으로 짓눌러 터트릴 때까지 성장하기 위해, 최대한 그들을 혼란에 빠트리는것이 최우선 목적이었다.
[마법사들, 혹은 무술을 익힌 강자들을 잡아오는건 이해하겠다]
"살려주세요...살려..."
"이, 이거 놔...!"
[그럼 저들을 잡아오는 이유는 뭐지?]
그때 둥지 한복판에 한무리의 사람들이 끌려오기 시작했다.
감염균을 이용해 신체를 조종하여 억지로 걷게 만든 그들은 힘 없는 비명을 지르며 둥지에 도착했다.
공포와 절망에 물든, 신분의 고하와 출신의 성분을 무시하고 선별되어 끌려온 그들은 모두 현지의 여인들이었다.
일대의 각지에서 끌려온 그녀들의 공통점이라면 모두 가임기의 젊고 신체 건강한 사람들이라는 것.
"당연히 분석을 위해서지."
[...대체 무엇을?]
생산과 소화흡수, 분해분석을 모두 처리하던 군단의 둥지도 덩치가 커지며 그 역할을 세분화하여 분할했다.
군단이 그녀들을 전장에 마련한, 빠르게 유기물을 소화하여 군단병들에게 급여하는 둥지가 아닌 분해와 흡수와 분석을 통해 데이터를 축척하는 둥지인 이곳으로 끌고 온 이유는 단순했다.
"히이익!"
"안 돼!"
촉수가 발목을 휘감고, 둥지의 육벽에서 점액을 분비해 그녀들을 덮쳐갔다.
죽임당해 둥지에 투입되어 소화액에 녹아가던 남들과는 달리 혹시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녀들의 실낱 같은 희망이 완전히 부숴지는 순간이었다.
"싫어...싫..."
산채로 파묻히며 점액에 덮인 몸이 경련하듯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현장에서 소화되어 양분이 되든 이곳에서 분해되어 분석당하든 죽는다는건 똑같은 결말이었을테지만, 그 처절함의 궤가 달랐다.
[그가 과연 이런 것을 좋아할것 같으냐. 이런 방법으로 데이터를 쌓아 조합하여 아름다운 몸과 얼굴을 만든다면]
"처음으로 하늘을 보고 느꼈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건 생물로서 당연해. 강도연도 그가 예쁜 여자를 보면 좋아한다고 했어."
군단은 당연하게도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어?"
그러나 그 순간.
군단은 스스로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심장 따위 동력기관으로 대체했지만 평소 극심한 감정의 변화가 생기면 강도연이 무심코 하던 짓을 배운 것이었다.
"어째서?"
당황한 군단이 움찔거렸다. 이렇게 군체의식 전체가 요동칠 정도로 크게 당황한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가 분노하고 있어. 혹시 공격당한건가?!"
[아니, 그는 지금 이 광경을 전부 보고 있..보기 시작했다. 몸을 숨길테냐]
머리에 울리는 관조자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침착했다. 기겁한 군단은 허겁지겁 곁에 있던 신목의 줄기로 뛰어가, 자신의 육신을 그 안에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