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침략과 침식(3)
군단병들은 쉬지 않는다. 낮과 밤따위는 없다. 망설이지도 않는다.
명령을 받으면 그대로 들이받아, 에너지가 다 떨어지거나 주요 기관이 파괴당해 움직이지 못하게 될때까지 몰아친다.
지금 내 눈앞에도 그 광경이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숲과 평원을 뒤덮은 군단병들이 마치 검은 해일처럼 쏟아져내리는 모습을.
그들이 받은 명령은 당연히, 살아숨쉬는 모든 '적', 즉 인간들을 죽이는 것이다.
[물론 현재 생산한 군단병들은 단순한 시선끌기에 불과하다. 이미 군단의 침식계획은 미궁에서 시작하여 이 세상을 먹어치울 것이다]
"그 계획이 대체 뭐지?"
[우선 첫번째는 현지 식물들을 소화흡수하여 얻은 데이터를 이용해 이 세상의 표면 전체를 군단의 몸으로 뒤덮는 것이다]
화면이 돌아갔다. 미궁 근처, 이곳은 이미 군단의 침식을 받아 일대 전체가 뒤틀리고 있었다.
푸르르던 초목은 그대로 으스러져 소화되어 양분으로 치환되었고, 그 자리에 새로운 존재가 싹을 띄웠다.
[달빛요정들이 애지중지 여기던 신목과, 동굴에서 번성하던 대형 진균, 그리고 기존 식물들의 결합체. 그 능력은 지면의 모든 것을 빨아들여 흡수하고 태양빛을 에너지로 바꾸는 것이다]
싹을 틔운 그 식물, 아니 식물인지도 애매한 그 생물체가 급격한 속도로 뻗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런것이 수십개. 지금도 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싹을 틔운 이파리마저도 검은색이었다. 광합성을 할필요가 없었으니까.
엽록소를 이용하여 광합성을 하는 것 보다, 에너지의 종류를 치환하는 형상력을 가진 신목의 힘을 이용하여 내리쬐는 태양빛을 그자리에서 양분으로 바꾸는게 더 효율적이었다.
군단이 원본보다도 자유롭게 다루는 저 신목의 힘은 정말 무시무시한 힘이다. 농사 같은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화산이 뿜어내는 열기는 말그대로 에너지 저장고이며, 만약 견딜 수 있는 튼튼한 몸을 만드는게 가능만 하다면 지각을 뚫어 저 깊은 땅속까지 파고들어가 이 행성이 품고 있는 힘까지 빨아쓸 수 있다는 거니까.
"광합성...아니 광합성 비스무리한 능력을 통해 포식하지 않아도 대량의 에너지를 얻을 방법을 깨달았어.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건가?"
[그렇다. 이미 군단에게 포식이란, 단순히 배를 불리는 것이 아니니까]
"하..."
나는 얼굴을 감쌌다.
파죽지세이자 과격한 군단의 성장을 지켜보며.
그리고 어지러이 흘러가는 내 주변 상황을 들으며 몇가지 길을 정하긴 했다.
그 첫번째가 나, 그리고 내 주변만큼은 군단에게서 안전해야 한다는 것.
군단의 탐식을 차마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군단에게 무차별적으로 희생당하는 그쪽 세상의 희생자들을 불쌍히 생각해도, 결국은 성장과 약육강식이라는 생태계의 법칙이라고 인정하면서 넘어갔다.
하지만 만약 군단이 지구에 와서 그런 짓을 하려 한다면. 나는 당연히 막아야만했다.
나는 사람이고, 결국 사람들이 모여 만든 이 사회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생물이었으니까.
[지구인들은, 아니 정확히는 네 사람들은 먹지 마라? 군단이 그 부탁을 들어줄거라고 생각하나?]
"지금까지는."
두번째가 이것이었다. 군단이 내 의도를 알아채고 그에 따라줄 것인지.
지금까지 군단은 미궁속에서 오직 나와 소통하며 지냈다.
그러나 지상으로 올라와 보이는 행보를 보면 분명 뭔가 감흥을 받은게 분명했다. 앞으로 어떤 영향을 받고 어떤 방향으로 성장할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나도 뭔가 해야했다. 지상에서 만나는 이들이 군단을 물들이기 전에, 나의 색으로 먼저 물들여야 했다.
그것은 분명 단순한 선물로는 안될 것이다.
그럼, 그걸 대체 어떻게?
"스승님께선 지구인들을 위해 개량해주신 이 수련법에 딱히 이름을 붙이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어째서죠?"
"저희는 출신상, 영원히 남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훗날에는 사람들이 이 수련법을 배워서 자신들만의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길 바라신거죠. 이름이 없는건 그때문입니다. 스승님께선 이름이 붙는 순간 그 형태가 고정된다고 하셨기에."
다음 날. 내 수련을 봐주던 지창현의 말에 나는 무언가 실마리를 얻은 것 같았다.
"그만큼 이름이 가진 힘이 대단하거든요."
그의 말에 순간 움찔했다. 이름, 그러고보니 군단은 이름이 없었다.
나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심지어 군단이 자아가 생긴 이후에도 쭉 군단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이름을 선물한다면 그 사람은 절 좋아할까요."
"만약 자신이 바라고 있었다면 당연하겠죠. 그 기쁨과 행복은, 저는 상상하기 힘들군요. 상상해 보십시오. 부모님이 우리에게 이름을 선물해주실때 우리가 어른이었다면, 당연히 기뻐하지 않았을지."
내 질문이 뜻밖이라는 듯 지창현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나는 그와의 대화를 통해 군단에게 내 영향력을 넓힐 한가지 방법을 정했다. 어딘가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
"표정이 급격히 밝아지셨는데, 고민이 해결되신겁니까."
"일단은 그런 것 같네요."
"그렇다면 수련에도 성과가 있겠군요."
씩 웃은 지창현이 두꺼운 돌을 한손으로 들어 내 앞에 던졌다.
이 돌을 맨손으로 격파하는게 그가 내게 준 테스트였다.
의도는 자신이 알려준 수련법을 이용해 내가 익힌 천혼술을 강화하라는 것.
나는 그 두꺼운 돌 앞에 섰다. 마음은 평온했다.
사실 수박 겉핥기로 배운 천혼술은 이미 버린지 오래였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힘은 그 누구도 모를 힘이다.
"해보겠습니다."
나는 주먹을 쥐었다. 동시에 내 심장을 기준으로 그동안 내가 쌓은 힘이 발현되었다.
군단이 오직 나만을 위해서 개량해준, 나 같은 일반인에게도 힘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심법. 그러니 익히는데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그대로 주먹을 내질러 그 큼직한 돌을 부숴버렸다.
나 스스로도 내 힘에 놀라 움찔할 정도였다.
"어...대단하시군요. 고작 며칠만에."
"아니, 아닙니다."
놀랐는지 눈이 커진 지창현의 모습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건 온전한 내 실력이 아니었다.
"설마 이렇게 빠를줄은 몰랐는데...아무튼 앞서나간 사람들과 함께 바로 검을 잡는걸 시작하셔도 될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한 사정을 알턱이 없는 그는 박수를 치며 나를 칭찬했다.
그가 말하는 검을 잡는다는건, 나처럼 이제 기초를 벗어난 사람들에게 검을 가르친다는 뜻.
실제로 정의와 대의라는 명분으로 무장한 수호자 연합은 이미 이 연합군 내에도 빠르게 세력을 늘려가고 있었다.
연합군도 자기네들 내부에 특수전이 가능한 헌터급 병력을 만들어 주겠다는데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지창현을 포함한 수호자 연합의 유닛들은 그렇게 선발한 재능있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힘을 가르쳐, 형상력을 발현해 싸울 수 있는 전사 집단을 양성하는 중이었다.
"분명 빠르게 배우실 겁니다."
"...그렇겠죠."
늘 희미하게 웃고 있는 지창현은 항상 여유로워 보였다.
처음에는 거리낌없이 정체를 밝히고 대놓고 활동하는 지창현 세력과 그 플레이어를 걱정했지만 그건 내 기우였다.
오히려 그들은 명분까지 챙긴채 자신들의 세력을 일반인들에게까지 넓혀갔다. 이제 그들이 처음 만든 수호자연합의 위상은 에볼루션이나 연합군과 맞먹는다.
이것이 처음부터 계획된 의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나같은 놈이 걱정할 상대는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몸을 추스른 연합군이 다음주부터 다시 활동을 개시합니다. 에볼루션도 움직이죠...역시 신우씨도 움직이실건지."
"아마 그러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 전에 기초는 배워야겠군요."
그날 수련은 거기서 마무리한 지창현이 잠짓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도 머릿속으로 일정을 되짚었다. 비록 크게 한방 맞기는 했지만 해당 사령부는 다른 곳처럼 궤멸당한 것도 아니었다.
병력을 보충하고 다시금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전체적인 방향은 거의 바뀌지 않았지만, 이번엔 미사일과 각종 화학 무기까지 비공식적으로 동원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속한 에볼루션 역시 당연히 이 전투에 참여한다.
와중에 이미 전쟁을 겪었음에도 빼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각자의 사명감과, 프로정신으로 무장한 이들이었으니까.
"참전하십니까?"
"저 말입니까? 당연히."
나는 헤어지기 직전 지창현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듣기로, 무시무시한 무기가 있다고 들었는데. 절대 막을 수 없는 그런."
"있죠. 문답무용, 그아무리 강한 존재라도 죽일 수 있는 불합리한 수단이 말입니다."
"두렵지 않으십니까?"
그는 내가 척살권을 말한다는걸 알아차렸다.
척살권은 내가 알기로 현재까지는 대응 불가능한 확정적인 죽음이다. 어그로가 끌린다면 당연히 날아들게 뻔하다.
당연히 플레이어든 특별한 유닛이든 조심스럽게 행동하는게 맞았다.
"이 역시 스승님의 가르침입니다만, 바꿔 생각해 보십시오. 척살권은 그저 단 한번의 치명타일 뿐이니까."
그러나 지창현은 척살권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살짝 당황한 나는 그렇게 말문이 막혀버렸고, 그사이 그는 휑하니 가버렸다.
"진정한 대의를 이루기 위해서 이 게임에 휘둘리지 말라는게, 제 스승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결국은 현실이며 현실에 절대라는 말은 없다고요."
대신 그는 의미심장한 한마디 말을 남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