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심연의 괴물(7)
"허억...헉.."
거친 숨이 폐부를 찔러댔다.
그 좁고 거친 개구멍을 빠져나온 이후에도 조금도 쉬지 않고 달렸다.
다리는 떨어져 나갈 듯 아프고, 온 몸의 근육도 비명을 질렀다.
'더, 더 빨리 알려야...'
하지만 소년은 근육이 찢어지는 고통에도 이를 악물고 몸을 움직였다.
지금 자신에게 가족은 물론 동족 전체의 운명이 달려 있음을 알기에.
어둑한 심연에서 기어나오는 괴물들로 쑥대밭이 된 도시와, 침통한 얼굴의 대족장이 자신의 어깨를 잡으며 부탁하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반드시...'
군단이 이미 안정화를 끝내고 신우와 소통하며 잠시 정비 기간을 갖고 있을 때.
고개를 저은 소년은 그 소식을 모르는 채 오직 위로 올라가는 것만 생각했다.
그들이 그곳에 터를 잡은건 과거 조상들의 유적이 그나마 온전히 남아있었기 때문, 윗층계에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목적을 위해서는 굳이 이 위에 있는 수십개의 층계를 전부 주파할 이유가 없었다.
"으아앗!"
헉헉거리던 소년이 비틀거리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쿵쿵 거리며 달려와 앞을 가로막은건 가슴의 핵을 빛내고 있는 골렘.
하층계의 골렘들과는 달리, 이 인근의 골렘들은 파멸균과의 전투를 명받지 않았다.
"치, 침입! 지금! 우리 위험!"
소년은 웅크려든채 마구 외쳤다. 본인들의 언어가 아니라, 틈틈히 알아본 인간의 언어였다.
소년을 짓밟으려던 골렘이 행동을 그 순간 멈추었다.
잠시 적막이 흐른 뒤.
"타, 타라고..?"
골렘은 소년에게 자신의 손을 펼쳐 내밀었다.
웅웅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이내 마음을 다잡은 소년은 골렘의 손 위에 스스로 올라탔다.
"딱히 볼 것도 없군. 하긴 이미 몇 년 전에 정리 끝난 곳 아닌가."
눈치는 전혀 보지 않는 따분함 가득한 말투, 그는 애초에 자세히 살펴 볼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그, 그렇습니다 부학회장님. 그래도 이번에 저희 지부에서 고대 미궁에서 발견한 여러 생물종을..."
"그리 끌리지 않는군. 애초에 그 미궁, 이미 주인이 따로 있지 않나. 그만 돌아가지."
"예...?"
그의 말에, 잔뜩 긴장해서 대기하던 사람들은 살짝 당황했다.
거물인 그가 직접 온다고 해서 준비한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대청소는 물론 바닥이며 벽을 칫솔로 윤기나게 닦느라 수많은 이들이 고생했다.
그런데 지금 그가, 한번 슥 둘러보곤 그대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하지만 부학회장님..! 아직 저희의 연구 성과들을 자세히 살피지 못하셨습니다!"
"으음?"
그때 발끈한 누군가가 앞으로 나섰다.
새하얀 로브를 연구복으로 입고 있는 젊은 여인이었다. 모두가 앞에 나선 그녀를 보고 기겁했다.
"레이나 연구원."
그는 그녀의 명찰을 보고 이름을 읽었다. 그리고 이내, 피식 웃었다.
"난 충분히 봤네. 애초에 여기에 깊게 파고들만한게 뭐가 있단 말인가? 난 어제 시장도 만나고 왔지. 도시 전체가 별볼일 없더군. 지금 다른 학회들과의 경쟁이 치열한데, 이런 한적한 곳에서 한직에 밀려난 이들의 연구에 투자할 시간은 없네.
"그치만..."
"날 붙잡고 싶다면, 그리고 중앙으로 올라오고 싶다면 아주아주 획기적인 소재가 있어야 할거야."
거침없이 말을 내뱉은 그는 수행원들과 함께 몸을 돌렸다.
뼈를 때리는 팩트폭력에 현장에 있던 모두가 굳어버렸다. 억울하고 분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이 세상을 통치하는 학회에 속한 마법사에게, 학회의 뜻은 곧 법이고 진리였으니까.
"내 말이 틀린가? 레이나. 자네의 능력이 출중했다면 그 연구들, 이미 중앙에서 내게 보여주지 않았을까?"
"아닙...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그녀를 보던 놀라움의 시선들은 적의와 짜증으로 바뀌었다. 그녀가 괜히 나서서, 부학회장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크흠, 이제 정말로 가시지요 부학회..."
"큰! 큰일났습니다!"
그러나 그때 들어온 소식이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그래. 이제 좀 흥미가 생기는군. 안 그런가 소장?"
"그, 그렇습니다! 이게 대체..."
부학회장은 히죽거리는 입꼬리를 숨길 수 없었다.
졸지에 함께 있던 학회의 마법사들이 모두 모여들어 북적거리는 이곳은 바로 고대 미궁의 입구라고 알려진 한 동굴의 입구.
몸에 특이한 문양을 그리고 있는 한 뾰족귀의 소년이 무서운지 덜덜 떨면서 그들 한가운데 서 있었다.
"하지만 좀...분명 토착종인 달빛요정들은 저희를 극도로 경계하여 제대로 된 연구조차..."
"소통은 됩니까?"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연구에, 즉 소재에 목말라있다.
특히 연구성과로 출세 경쟁을 해야하는 이런 변방의 마법사들은 더더욱.
"그래도 몇몇 단어를 더듬더듬 말하긴 했습니다. 지금은 겁이 나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긴 한데."
"웃기는군. 이름이 무엇이냐."
경계용 골렘을 조작하던 마법사의 증언에 코웃음 친 부학회장은 지팡이로 소년의 가슴팍을 가리키며 말했다.
"옐슨."
그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그들이 오기 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소년이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마법사들 모두 그동안 신비에만 감싸여 있던 이종족의 입에서 인간의 언어가 나오자 놀라 웅성거렸다.
"좋...다 옐슨. 왜 너희가 먼저 제시한 상호무관여조약을 어기고 우리의..."
"침입! 지금! 우리 위험! 밑에서 괴물들, 오다!"
부학회장은 대표로서 침착히 질문을 이어가려 했으나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옐슨은 다급히 자기 할 말을 쏟아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순간에도, 자신의 동족들이 죽어나가고 있기에.
"그게 무슨..."
"도움, 도움 필요. 도움!"
적어도 그 간절함과 절박함만은 모두에게 전달되었다.
당황한 마법사들 사이에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레이나도 있었다.
"다들 조용! 아무래도 이 일은 절대 가벼이 여길 수 있는 일이 아닐 것 같네. 비서 실장, 우선 저 애를 데려오도록."
어수선한 분위기에 부학회장이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치자, 얕은 충격파가 일대로 퍼져나갔다.
"저 녀석을 말입니까?"
"그럼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을건가?"
"아, 아닙니다!"
그가 눈을 부라리자 기겁한 비서가 허겁지겁 옐슨의 손을 낚아채 질질 끌듯이 데려왔다.
당황한 옐슨이 뭐라뭐라 소리쳐도 그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현장의 마법사 모두가 궁금해하는건 사실이었으나, 감히 학회를 거스를 순 없었기에.
"부학회장님! 증언을 듣자니 지금 그들의 상황이 많이 안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또 자네로군 레이나 연구원. 일개 연구원이면 자신의 본분에 힘쓰게. 어련히 알아서 할까."
결국 이번에도 나선건 레이나였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그는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부학회장님. 그렇다면 일단 시장에게 연락은 하겠습니다. 어서 조사대를 파견해서..."
"아니, 그만두게."
그렇게 자리를 벗어난 직후 자신에게 알랑방귀를 뀌는 소장의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옐슨은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의 말을 불안한 표정으로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예? 하지만."
"소장, 자네도 슬슬 중앙으로 오고 싶지 않나? 여기 마침 좋은 연구 소재가 있는 것 같은데. 예를들면 토착고대생물종의 해부학이라던가. 어떤가? 끌리지 않나?"
씨익 웃은 그가 갑작스레 소장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순간 안색이 창백해진 소장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나는 말이지, 아직도 연구가 급해. 그리고 자네들은 몰라. 내가 대체 얼마나 큰 짐을 짊어졌는지 말이야. 에잉."
그러고선 갑자기 낄낄 웃더니 자기 혼자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사람들은 잠시 멈추고 그를 쳐다볼 뿐이었으나, 정작 지금 남들을 당황시킨 그의 신경은 온통 다른 곳으로 가 있었다.
'멍청한 놈들. 이제 겨우 초보적인 주문이나마 배워 쓰고 있으니. 하지만 종족 전체가 미약하나마 재능이 있으니 조금만 더 발달시켜 대규모 집단 마법이 가능해진다면 판도를 바꿀 수 있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시야 일부에는 지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둑하고 척박한 땅에 족히 수만마리는 되어 보이는 생물들이 무리를 지어 생활하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인지, 놈들은 화들짝 놀라 모두 바닥에 엎드려 경외를 표했다.
자신들에게 지식과, 현안을 주는 신을 위해서.
"일어나라. 그럴 시간이 없으니.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의 명령에 놈들은 다시 일어나 제할일을 시작했다.
자신을 만나기 전에는 그저 짐승에 불과했던 저 미천한 생물들의 존속에 자신의 목숨이 달렸다는 사실은 언제나 그에게 압박을 주었다.
"아슈크루드놈들이 준 물건은?"
[지금 준비가 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앞서 걸으며 일을 처리했다. 이 일은 계속 신경을 써야 했지만 절대 남들의 눈앞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연구하고 탐나는게 많아도 일단은 내가 살아야 할 것 아닌가."
그는 화면을 둘러 보며 히죽 웃었다.
자신의 유닛들. 어딘가의 인간들은 코볼트라고 부르는 녀석들이 나무궤짝에 귀중히 담은 물건들을 가지고 특정 장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신비로운 이세계와의 교류는 그의 힘과, 사회적 지위에 큰 도움을 주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