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심연의 괴물(4)
신목은 달빛요정들의 근본, 모든것이나 마찬가지. 수십년의 시간을 들여 가까스로 저만큼이나마 키워냈다.
그러나 그 신목이, 지금 산채로 분쇄당하며 고꾸라지고 있었다.
신목을 부수고 튀어나온 저 끔찍한 또하나의 나무는 절대 요정들의 신목이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와이트는 자신의 몸에서 빛을 잃어버린 문양을 보고 허탈히 중얼거렸다.
이제 더 이상 항전의 의미가 없었다.
이 불합리한 전쟁에서 그들에게 남은건 죽음뿐이고, 그 방법이나마 선택할 수 있다면 행운일 것이다.
와이트는 검을 지팡이 삼아 부들거리며 일어섰다.
'끝도 없이 몰려오는 파멸균과 맞서던 조상들이 느끼던 감정이, 이런 것이었나.'
저항할 수 없는 재앙에 대한 절망과 체념.
그는 검을 적장에게 겨누었다.
함께 싸우던 전사들은 모두 죽었다. 그러나 지금 그를 둘러싼 수많은 괴물들은, 그를 덮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와라. 네가...이 괴물들의 여왕이었구나."
그는 자신의 마지막을 결정했다.
적어도 이 괴수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존재에게 흠집하나라도 내기 위해서였다.
적은 강했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그 어떤 적보다 빠르고 힘이 셌다.
한쪽 팔이 뜯겨나가고, 배에 구멍이 난 상태로는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그는 앞으로 발을 디뎠다.
"커헉!"
하지만 그렇게 말하자마자 곁에서 서 있던 군단병들이 그를 덮쳤다.
거대전갈을 베이스로한 중형 군단병의 독침에 꿰뚫려 허공에 들린 그의 눈에서 억울함이 스쳤으나 금세 생기가 사라졌다.
'감히 내 위에 그 무엇도 있을 수 없는데.'
그가 마지막 순간을 존중 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순살 당한 이유는 만약 그가 안다면 탄식할 정도로 굉장히 사소한 것이었다.
"너무하잖아...적어도 마지막 정도는..."
강도연이 가면을 반쯤 벗고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면을 써도 기억은 남는다. 마치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 처럼 감흥 없는 기억이긴 하지만 어쨌든 자신의 기억이라는 자각은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와이트가, 달빛요정들이 보여준 처절함과 절박함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이 생태계이고, 자연이지. 한낱 개미떼도 우리보다 잔혹하고 한낱 들개무리도 우리보다 과격할 수도 있다.'
물론 군단에게 그런건 고려 대상조차 아니었다.
살기 위해 싸우고, 패자는 죽으며, 승자는 성장한다. 그것은 군단의 본성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생물들이 따르는 법칙이기도 하기에.
자신이 품은 감정이 위선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강도연도 그 이상 입을 열지는 않았다.
'마무리를 지어라.'
군단의 마지막 명령이 떨어졌다.
다시 가면을 쓴 강도연은 군단병들을 이끌고 이미 점령이 끝난 도시 내부로 진입했다.
보이는건 여기도 저기도 시체, 시체, 시체 밖에 없었다.
물론 그 시체들 역시 군단에게는 동일 질량의 양분이었을 뿐. 수습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이 공간 역시 군단의 둥지가 될 것이고 요정들의 시체도, 군단병들의 시체도 그상태 그대로 소화될 것이니.
[흩어져 도시를 수색하던 군단병 일부가 다른 곳으로 향하는 통로를 발견했다]
"여기는 일종의 광산이었나?"
그 와중에 군단은 도시에서 다른 곳으로 향하는 통로 하나를 발견했다.
공유되는 정보로 그곳을 본 강도연이 그곳의 정체를 특정지었다.
채굴 도구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고, 군데군데 반짝이는 광석들이 암반에 파묻혀 있었다.
이건 누가봐도 광산이었다.
[군단처럼 신목의 힘을 자유롭게 조작하지 못하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신석을 얻었는지 알게 된 순간이었다]
'이건 상당한 수확이야. 유기체 몇백kg 보다도, 농도 짙은 신석 몇개에 담긴 에너지가 더 크다'
군단병 하나가 맨손으로 광석 하나를 잡아 뜯었다. 이 광산 안에서 군단의 감지기관을 쓰면 희미하게 존재감을 발하는 광석들을 더 찾아낼 수 있었다.
강도연은 이 광산의 끝에서, 군단이 밑층계에서 벽을 뚫고 나와 연결한 또다른 공동들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발견한 주문으로 막혀있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지금은 이곳보다 먼저 처리할게 남았군.'
끝을 확인한 이상 더 볼건 없었다. 군단은 시선을 돌렸다.
무슨 짓을 벌일지 아는 강도연은 눈을 질끈감고 다시 가면을 썼다.
"죽여...죽여라! 죽여!!"
자긍심 하나만큼은 자신있다고 생각했기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대족장은 끌려나오면서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사악한 지옥의 벌레들...끔찍한 심연의 마물들아!"
도시 전체에 그녀의 절규가 울려퍼졌다. 사실 신목이 눈앞에서 터져나가고 동료들이 찢겨죽는걸 본 그녀는 이미 반쯤 미쳐있는 상태였다.
혀는 깨문지 오래였다. 단지 군단이 미리 투입한 감염균으로 억지로 생명을 붙여놓은 것 뿐.
'좀 조용히 만들어야지.'
그 절규가 마음에 안들었던 군단은 그녀의 몸에 투입해 현재 전신을 장악하고 있던 감염균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하아악..!"
단숨에 전신에 검은 핏줄이 올라온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파들거렸다.
소리를 지르려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제 내 목소리 들리겠지. 네 뇌, 네 폐, 네 심장...전부 내 손안에 있어.'
"아..아아..."
'아는걸 전부 말해.'
감각을 조달하는 전신의 신경계가 직접적으로 조작당하며 강하게 자극당하는 그 끔찍한 고통은 최악의 고통이라던 작열통 그 이상.
미쳐있던 정신도 돌아오게 만드는 그 상상도 못할 고통에 몸부림치던 그녀는 자긍심이고 증오심이고간에 편해지기 위해 있는 사실 없는 사실 전부 토설하기 시작했다.
"그, 그래서...지, 지상의 인..."
"인간..."
'인간?'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군단은 줄기층의 골렘들을 누가 파견했는지 알게 되었다.
*
"솔직히 좀 신기하지 않습니까? 제가 대학다니던 십여년 전만해도 외계인은 상상이나 창작물 속의 존재들이었습니다. 물론 그 외계인들이 게이트 열고 튀어나오는 괴물들이었을 줄은 예상도 못했죠."
"그때는...다 그랬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 우주는 그보다도 더 넓고 복잡했습니다."
지창현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곳은 직전의 알파 거점 전투에서 큰 피해를 본 연합군 본대가 일시적으로 후퇴한 첫 주둔지의, 으슥한 구석에 만든 일종의...도장이었다.
나는 그곳에 그와 단둘이 있었다.
"저 마물들 따위보다도 더 대단한 외계인들이 많죠. 저희보다도 더 발달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저희를, 인간을 믿습니다."
"인간을요? 죄송하지만 제 동생을 해친 것도 결국 같은 사람입니다."
"...그건 맞습니다."
내 표정이 좋지 않았는지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강신우씨.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을겁니다. 좋은 사람도 많다는 것을요. 제가 인간종 전체를 믿어달라는건 아닙니다. 분명 우주적인 대의를 위해 일하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을 믿어달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스승님처럼요."
"모두 그분께서 가르쳐 주신 것들입니다. 우린 할 수 있다고."
그는 지금의 자신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유닛이 된 이후, 가르침을 받아 눈을 뜨고 더 강해졌다고 했다.
솔직히 믿기는 힘들었다. 플레이어의 목적이 생존과 성장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이.
하지만 지창현과 그의 동료들, 그리고 플레이어는 이미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체 그들이 무슨 '종족'으로 묶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진짜 성향인가?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줄 때입니다."
그가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눈을 빛냈다.
나는 인간의 가능성이라는 말에 슬쩍 시선을 돌렸다.
시야 한쪽에 펼쳐진 화면 속, 그곳에선 전쟁에서 승리한 군단이 포로를 심문하고 마침내 지상에 인간들이 산다는 정보까지 알아내었다.
과연 군단은 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어쨌든 인간종은 나와 동족이라 볼수도 있다. 그런것도 고려할까?
[군단이 새로운 먹잇감을 찾았다. 스스로를 더욱 성장시킬 수 있는, 참으로 거대하고 가치있어보이는 먹잇감을]
"..."
역시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지금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걸 알고있기에 육신을 꺼내지 않고 있지만 나는 군단이 무슨 결단을 내릴건지 알 것 같았다.
하긴 애초에 나도 기대는 안했다. 당장 나부터가 군체의식도 없는 인간종이 단순히 종족의 이름 아래 전부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아무래도 뭔가 방법이 더 필요해 보였다.
하다못해 선물을 더 준다던지.
아니면, 선물보다 더 좋아할만한걸 주던지.
"지부장님. 연합군 사령관께서 지금..."
"이런, 잠시 갔다와야겠습니다."
그때 지창현이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며 나를 두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 모습이 참 낯설었다. 물론 그는 S급 헌터, 스스로가 사회 신분상 상류층인데 고위직을 만나는게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 그는 S급 헌터가 아니라 한 단체의 대표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어플, 그리고 플레이어와 유닛들의 다툼 속에 희생당하는 힘 없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그리고 강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설립된 전세계적인 단체.
실제로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지창현의 플레이어는 자신의 유닛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주고 그 가르침을 재능을 가진 일반인들에게도 전파하라 명했다고 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지만 실제로 그 단체는 잘만 굴러가고 있었다. 아니 영웅이라 불리며 추앙받고 있었다.
그 행위들이 순수한 선의인지 고도의 정치적 행동인지 의심부터드는건 나도 최근 몇달 새 심하게 찌들었다는 증거겠지.
"그는 내가 차지연과의 관계로 이미 어플을 알고 있을거라 확신했지. 하지만 어플을 탐탁치 않아하면서도 어플에 대해서 일반인들에게 발설하지는 않은건가?"
[합리적이지. 어플의 존재가 드러나면 귀찮아지는건 너희다. 이 게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굳이 발설할 이유가 없다. 설령 발설한다한들 얻을 수 있는게 뭐가 있지? 그들의 분노? 욕받이?]
"그러네."
딱히 할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하긴 지금 내 입장에서 남들 걱정해봐야 별 소용이 없다. 지금은, 지창현이 가르쳐주겠다는 기술을 전수받고 일단 강해지는게 먼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