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심연의 괴물(2)
[알고 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들의 언어, 습성, 삶의 방식, 전투 방법 등등 전부 다]
"파훼법은 많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는다."
군단은 히죽 웃었다. 과거, 그들과 전투를 벌였을 때는 효율이니 어쩌니 해도 결국에는 정면승부를 봐야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세계의 괴물을 잡아먹는 등 급격하게 성장한 군단은 이 미궁안에서 자유롭고 강하다.
심지어 상대는 이미 몇번이나 상대해본 이들이었다.
군단은 리매치에서 진적이 없다. 상대의 약점을 째고 후벼파는게 특기다.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누를수도, 그들을 농락하고 두려움에 떨게 만들어 천천히 잠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유닛이 아니잖아...!"
강도연이 참담한 얼굴로 겨우 한마디 전했다.
"그래서, 뭐."
그러나 이미 모든 계산을 마친 군단을 설득할 수는 없었다.
결국 단 한마디로 설득을 포기한 강도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선 자발적으로 가면을 썼다.
'감지된 적들의 숫자는 고작해서 수천 남짓. 몇군데에서 어떻게 공격하면, 단숨에 방어를 무너뜨릴 수 있을까.'
이의를 제기한 서브마인드의 설득을 끝낸 군단은 행복한 계산을 시도하고 단숨에 답을 내놓았다.
현재 보유한 군단병의 규모와 적들의 수준, 상황과 지형들을 고려한 최적최강의 전술을.
군단은 군단병들을 나누었다.
그렇게 나누어진 병력의 덩어리는 정확히 열 세덩이.
투입된 한방 병력은 인간 이상 크기인 중형 이상의 병사만 오천 이상. 게다가 여차하면 그 열배 이상을 한번에 쏟아부울 자신도 있었다.
마치 거대한 물이 미물들을 쓸어버리듯, 물량을 앞세운 초단기 결전이 이번에 준비한 비장의 한수였다.
"군단장. 너는 정면에서 가장 단단한 방벽을 뚫어. 대신 선물을 주지."
군단은 강도연에게 새롭게 얻은 개념으로 만든 특별한 병사를 하나 주었다.
군단에게 마법적 지식은 전무하다. 하지만 만능세포를 이용해 육체조직을 만드는건 쉽다.
[골렘의 개념을 가져 온 새로운 병기가 등장했다]
골렘의 몸으로 쓰였던 돌덩이들에, 스멀스멀 뻗치던 나무 뿌리 같은 촉수가 엉겨붙더니 이내 모양을 잡기 시작했다.
곧 가슴 정중앙의 동력기관을 바탕으로, 전신으로 뻗어나간 촉수로 몸을 이루는 돌을 조종하는 병사가 등장했다.
"비효율적이군."
다만 예상한대로 그 효율은 그리 좋지 않았다.
단지 이런 병사를 새롭게 만든 것은 사냥감들에게 절망을 주기 위해서였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던 군단에게 달빛요정 생존자 도시란, 저 위로 나아가기 전에 몸을 풀어볼 스텝 중 하나였을 뿐이었으니까.
*
"진동이..!"
"다들 무, 무기 들어!"
회의장이 난장판이 되었다. 실제로 쿵쿵 울리는 진동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막사를 박차고 나온 와이트는 검을 들고 거점 정면을 노려보았다.
"이...놈들!"
그의 눈에 적들이 보였다. 칠흑의 물결이라고 부를만한 검고, 어둡고 소름끼치는 군단의 행진이 정확히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이럴수가!"
"인간놈들의 마도병기야! 그놈들이!"
"인간놈들 따윌 믿는게 아니었어!"
달빛요정들은 모습을 드러낸 적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선두에서 쿵쿵거리며 몰려오는 거인들은 그들도 알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아니야. 그럴리가 없어.'
하지만 와이트는 배신감에 치를떠는 부하들을 보면서도 다른 생각을 품었다.
'인간놈들의 병기가...저렇게...'
눈이 파르르 떨리고, 검을 움켜쥔 손에 손잡이를 으스러질듯 힘이 들어갔다.
'저렇게 소름끼칠리가 없어.'
그는 가장 경험많고 노련한 전사였다.
그래서 스스로의 직감을 믿었다.
지금 자신들을 향해 몰려오는 저 괴물들은, 어쩌면 파멸균이나 지상의 인간들조차도 견줄 수 없는 존재들일지도 모른다고.
"강궁을 준비해라! 놈들의 약점은 가슴의 빛나는 핵이다! 신석을 부수면 정지시킬 수 있다!"
그는 서둘러 지시를 내렸다. 이미 골렘의 파훼법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전사들은 그의 지휘를 일사분란하게 따랐다.
그들의 표정이 결연했다. 모든 것을 걸고 죽음마저도 각오한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기세였다.
과거 군단이 만났던 생존자들과 같다. 어쨌든 그들에게 이곳은 종족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서 반드시 지켜야하는 곳.
"신목이, 조상들이 함께하신다! 발사!"
와이트의 지휘아래 수비용으로 설치한 거대한 발리스타가 발사되었다.
단순한 발리스타는 아니었다. 끝에, 희미한 마력을 머금은 강력한 일격.
"터졌다?"
쾅!, 그리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대형화살들이 적들의 몸에 꽂혔다.
그 우레와 같은 굉음에 모든 이들이 적들을 쓰러트렸음을 예상했다.
"좋았어! 단숨에 해치..."
"뒤! 뒤를 봐! 도시가..!"
그러나 위풍당당 걸어오던 적의 골렘들을 반파시키고 쓰러트려 환호하기를 잠시.
와이트는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무언가 무너지는 굉음에 철렁한 가슴을 안고 뒤를 돌아보았다.
유독 거대하던 굉음은 골렘을 쓰러트려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안 돼에에!!"
그가 절규에 가까운 고함을 질렀다.
눈에 보이는 것은 우르릉 하고 무너져 내린 싱크홀에서 기어나오는, 펑 하고 터진 벽과 천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괴물들이었다.
"와이트님! 놈들이 돌격해옵니다!"
"벼, 병력을 나눈다!"
선택지 자체가 없었다. 그들은 결국 모두 막아야만 했으니까.
"제가! 가겠습니다!"
"오로테, 가장 강한 힘의 전사."
그들 중 하나가 자신 있게 앞에 나섰다.
고개를 끄덕인 와이트는 그에게 전사들을 딸려주었다.
"가서 반드시 막도록."
그리고 그를 보내어, 땅굴을 파고 침투한 적들을 막으라고 보내었다.
이가 뿌드득 갈렸다. 다시 돌아선 그의 눈에 분노가 가득했다.
"우리는, 반드시 이곳을 사수한다."
앞만 보는 그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곳을 향해 행진하는 적들에게, 골렘들은 그저 방패막이였을 뿐.
수많은 짐승과 괴물의 모양새를 하고 있는 놈들 가운데 약간 왜소한 체구를 가진 누군가가 있었다.
"다들 자신을 가져라. 우리는 신목의 가호를 받는 전사들이다. 신성한 힘을 다루지 못하는 저깟 괴물들 따위, 우리의 검으로 일격에 베어버릴 수 있다!"
그는 휘하 전사들을 독려했다.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그들은 이미 신목을 어린나무 이상으로 키워내었다.
그들이 어릴적부터 몸에 새기는 문양은 신목의 마력과 공명하여 증폭된다.
신목의 가호를 받는 달빛요정의 전사는 강하다.
온 세상을 점령한 파멸균의 숫자가 조금만 적었더라면, 각개격파 당하기 전에 미리 미리 연합군을 결성했더라면 어쩌면 미래가 달라졌을 정도로.
"저건."
하지만 특수한 힘을 사용할 수 있는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와이트의 눈이 흔들렸다.
선두로 걸어나와 검을 치켜든, 가녀린 선을 가진 굴곡있는 여체.
그녀가 쳐든 검이, 팔뚝 및 허벅지에 붙은 광석들과 함께 불타오르더니 이곳을 향해 겨누어졌다.
'최대 출력 폭사.'
현재의 군단이 가진, 형상력을 사용하는 단 한가지 기술.
바로 조금의 딜레이 없이 최대출력의 에너지를 참격이나 광선의 형태로 한선과 한점에 폭사하는 것.
애초에 동력기관을 직접 이용하는 이상 계산이니 영창이니 하는 다른 기술은 필요도 없었다.
그냥 이 기술이, 가장 강하고 가장 빨랐다.
"으아아악!"
"막아!"
통로의 어둠을 가로지르는 타오르는 섬광.
강도연의 검에서 뿜어진 거대한 섬광이 경로상에 있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기겁한 달빛요정들이 허겁지겁 치켜든 방패에 부딪혔다.
'방어 무력화.'
그 직후 벌어진 폭발이 전열에 있던 달빛요정 대다수를 흔적도 없이 증발시켰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단숨에 무너져 내린 적들의 진형에, 군단병들이 그대로 돌진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방어지에서 제대로 자리도 잡지 못했으니 그냥 찍어 누른다면 결과는 뻔했다.
"막아. 반드시!"
그러나 그들은 처절했다. 그만큼 간절했다.
이를 악물고 몸으로 군단병들을 가로막았다.
분명, 그들이 가진 힘은 일개 생존자 무리에 비하면 강했다.
끊임없이 개량을 반복하는 군단의 갑각이 전력을 다하다못해 없는 힘까지 쥐어 짜내는 검과 창에 베이고 뚫렸다.
다만 그게 전부였다. 그들이 앞선다고 말할 수 있는건 그 간절함 하나가 전부였다.
이빨과 발톱에 몸이 뜯겨나가는 희생자들의 비명이 사방에서 울려퍼졌다.
"너희는...대체 뭐냐."
"..."
처절한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에서, 와이트가 강도연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크학."
그녀의 검을 받아친 와이트는 묵직한 힘에 당황에 비틀거렸다.
동력기관 5개를 모조리 운용하는 그녀의 육체능력은 이미 초월적이며, 그것을 움직이는데도 조금의 비효율이 없었다.
"일개 괴물년이, 그정도의 경지에 오르다니..."
와이트는 전신에서 검붉은 기운을 뿜어내는 그녀를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녀가 뿜어내는 힘은 그가 그토록 바라며 수련했던 경지 중 하나였으니까.
그녀의 몸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모르는 그로서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