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심연의 괴물(1)
"으윽."
강도연은 해괴한 느낌에 얼굴을 찌푸렸다.
파고든 뿌리들이, 그 속에 깃든 에너지를 남김 없이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소모되어 빛이 약해진 그녀의 동력기관들이 다시 완전히 충전되더니 빛을 되찾았다.
'남은건 둥지에 던져.'
그녀뿐만이 아니라 다른 군단병들도 에너지를 보충했다.
그 사이 손에서 뻗어나왔던 뿌리들은 금세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게 전부가 아니야."
'맞아. 일단 병력을 나누어 '가지'들을 청소해.'
골렘들과 한번 겨루어본 군단은 병력을 나누었다.
선두에 선건 형상력을 다루는 상위종의 군단병.
놈들의 움직임이 둔하고, 핵을 파괴하면 예상외로 별거 없다는걸 알아챈 이상 굳이 에너지를 과투자할 필요도 없었다.
[저 골렘들은 철저하게 단 하나의 적, 즉 파멸균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놈들이다. 그렇다면 파멸균이 사라진 세상에, 누가 새로운 주인이 되었을까]
'저 골렘이란 놈들을 만든 놈들이겠지. 어떤 놈들이든, 얻을게 많을거야.'
군단의 기분이 살짝 업되었다.
어쩌면 앞으로 새로운 유형의 적들을 상대하게 될 것 같았으니까.
그 새로운 유형의 적은 상당히 똑똑하고, 발달하고 강할 것 같았다. 먹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근거 없는 허세도 아니었다. 골렘을 작동시키던 핵을 분석한결과 현재 군단이 알고있는 천혼술의 마나석 세공법에 비해 그리 수준이 높지 않았다.
군단은 효율 문제로 굳이 광석에 2차 가공을 하지는 않지만 그정도는 알수 있었다.
이정도 수준이라면, 할만하다고.
'더, 더 빠르게.'
둥지화와 소화흡수는 덩치가 커질수록 더더욱 빨라졌다.
그만큼 식생을 잡아먹고 절멸시키는 속도도 빨라졌다. 조금의 자비도 망설임도 없는 포식.
그 끝은 오직 위로 올라가는 것 뿐이었다.
그는 분명 지키기 위한 싸움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었다.
'나도 지키기 위해 싸워.'
그리고 군단은 자기 나름대로 그 의도를 해석했다.
그를, 그리고 그가 지키고 싶은 것을 지켜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해져야한다. 그러니 더더욱 싸우고, 잡아먹고, 진화해야했다.
["그를 위해서."]
*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줄기층 쪽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니."
"분명해요 와이트님. 제가 확실하게 봤어요. 진동에 민감한 여섯다리땅쥐들이 집단으로 도망치는걸!"
"옐슨, 네가 똘똘하다는건 알고 있지만 말도 안되는 주장이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뾰족한 귀가 까딱거렸다.
귀를 까딱거리는건 그가 탐탁치 않아할때 나오는 습관 중 하나였다.
"줄기층에는 놈들의 병기들이 철통 같이 경계를 서고 있다. 너는 모르겠지만, 그 거대한 돌인형들은 상당히 강하다. 무엇보다 파멸균들은 절대 그것들을 못이겨."
"하지만 분명..."
"대족장께서 과거 놈들과 맺은 협정은 아직 유효하다. 그러니 너 같은 아이들은 걱정 말고 수련에 힘써라."
그는 문제를 제기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태도가 단호했기 때문인지,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인채 터덜터덜 자리를 떠났다.
"그래도 기특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저런 아이들이 훗날 훌륭한 인재가 되는 것이고."
"와이트님처럼요."
"...아부는 그만두게."
그는 곁에 있던 부하의 말에 헛기침을 했다.
다만 금세 얼굴을 굳혔다.
뒤로 돌아선 그의 눈에, 수많은 발광석으로 밝게 유지되고 있는 커다란 도시의 모습이 보였다.
그 도시의 중앙, 적어도 10m는 되어 보이는 나무 하나가 그 꽃과 잎을 찬란히 피우고 있었다.
"다만 부끄러운 것이 사실이지. 옐슨 같은 어린아이들에게, 왜 우리가 여전히 이 땅속에 갇혀 살아야 하는지 설명할 때마다."
"그 건방진 놈들이..."
"진정하게 레얌. 그들은 우리 조상을 내쫓은 인간들과 '다른 곳에서 온' 인간들이라잖나."
"하긴 그렇습니다. 그 멍청한 놈들은 결국 파멸균에 모조리 당해버렸으니까요."
순간 발끈했던 부하는 이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저희는 언젠가."
"맞네. 지상으로 나가야지."
그들의 눈이 반짝였다.
지상으로 나간다. 그리고 잃어버린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다.
단 한번도 잊어본 적 없는 종족의 염원이었다.
"그럼 와이트님. 순찰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부하들이 자리를 떠났다.
와이트는 계속해서 멍하니 도시를 내려다봤다.
'하지만 지상으로 가기 전에, 다른 동포들부터 찾아야한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가까스로 생존해가던 소수의 달빛요정들은 외부에서 온 존재들의 도움 덕에 겨우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들은 파멸균이 상대할 수 없는 병기들을 이용해 미궁을 청소해갔고, 그틈에 달빛요정들은 흩어져 있던 동족들을 한데 모아 겨우겨우 이만큼의 세력을 재건했다.
그것이 무려 수십년 전의 일.
하지만 과거의 영광에 비하면 이것도 새발의 피에 불과했다.
미궁 저 깊숙한 곳까지 흩어진 동족을 찾는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어느정도 안정되고 서서히 인구를 불리며 물자를 비축해 나가도, 까마득한건 여전했다.
"신목이시여. 부디 동포들을..."
"와이트님! 크, 큰일났습니다!"
그러나 그때.
불과 몇분 전 순찰을 나간다던 이들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낀 그는 허리에 찬 검을 움켜잡았다.
"무슨 일이냐. 설마 그들이 우릴 배신한 것인가?!"
그는 가장 경계하고 있던 가능성을 생각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그들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는건 지금 지상을 점령하고 있는 그들이니까.
"그, 그게 아닙니다. 우선 그자들의 마도병기들도 모조리 파괴되어 있었고 또..."
"뭐라..?"
횡설수설하는 부하의 말이 어어질 때마다, 그의 눈이 점점 더 커져갔다.
"어서 뛰어라!"
"여차하면 주문을 써 입구를 봉쇄해야 한다. 서둘러!"
그래도 꽤 오랜시간 평화를 유지해오던 도시가 발칵 뒤집혔다.
바쁘게 움직이는 전사들이 갑옷과 무기를 찾아 무장한 뒤 도시를 지키기 위한 방어 거점으로 이동했다.
주민들 역시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함께 싸울 준비를 마쳤다.
어차피 여기서 도망가봤자 살 수 있는 곳은 없었으니까.
"전사장. 이게 무슨 일입니까."
"대족장님. 상황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을 지휘하기 위해 애써 진정한 와이트는 본인이 전달 받은 상황들을 설명하기 위해 도시의 중진들 앞으로 나섰다.
그들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었다.
비교적 최근에는 안정된 평화를 누리고 있다지만, 몇몇은 파멸균과의 치열하고 처절한 싸움을 실제로 겪은 원로들이었다.
그만큼 뼈에 새겨진 두려움은 떨치기 힘든 것이었으니.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저희는 과거, 숨어 살던 이들이 아닙니다."
그 모습들을 본 와이트는 이를 악물었다.
훗날을 위해서라도 종족 전체에 새겨진 이 패배본능을 타파해야지만 반등할 수 있을거라 굳게 믿었다.
"설령 파멸균이 다시 몰려와도!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겁니다."
"그, 그들에게 먼저 연락해야 하지 않겠소? 듣자니 아군 탐색꾼들만 상한게 아닌, 그들의 마도병기들도 당했다면서!"
"크...당연히 그럴겁니다."
와이트가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수긍했다.
이건 자존심이 상해도 어쩔수 없었다.
그들과는 계속해서 협력 관계를 갖고 어느 정도 득도 봤으니까.
"하지만 가장 중요한건 저희들의 힘으로 이 땅을. 이 도시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저희의 힘을 보여주어야 차후에 있을 만남에서도 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한 성장이 아니었다. 언젠가 다시 지상으로 나가기 위해서.
그것을 위해서는 그들에게 얕보이지 않을 힘을 길러야했다.
"믿습니다 전사장. 우리의 저력을 보여줘야 합니다."
뜻을 알아차린 대족장이 신뢰의 뜻을 밝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진들을 설득한 와이트는 그길로 무장을 챙겨 서둘러 현장에 복귀했다.
"그래서, 대체 적이 누구지?"
그러나 아직 그들은 적의 제대로 된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한 참이었다.
"일단 문제가 터진 곳은 바로 이곳, 줄기층. 정찰을 나갔던 병력들은 이곳과 이어진 통로에서 산산히 부숴진 잔해와 핏자국을 발견했다 했습니다."
"마도병기의 가슴팍에서 신석을 뽑아가고 탐색꾼들의 시신을 숨겼다 했다. 혹시 지성체의 짓인가?"
와이트는 막사에서 다른 이들과 회의를 가졌다.
우선 종합한 정보는 적들이 있으리라 추정되는 곳은 이곳과 가지로 연결된 줄기층.
정기적으로 외부를 탐사하는 임무를 맡은 탐색꾼들이 거점으로 삼은 곳이기도 했다.
"대비도 충분히 해두었으니, 추가적으로 정찰하는게 어떻겠습니까?"
"그게 좋겠군. 여차하면 몸을 뺄 수 있게 몸이 날랜 사람들로 하여금..."
그는 말을 하다말고 멈췄다.
그의 눈에, 저 한구석에서 바쁘게 이동하고 있는 작은 생명체들이 보였다.
다리가 6개라 여섯다리땅쥐라 불리는 생물종.
특유의 작은 덩치로 골렘들의 목표물에서는 벗어난 그놈들이, 지금은 계속해서 더 깊숙한 곳을 향해 도주하고 있었다.
"레얌."
"예, 전사장님."
"혹시...지금 진동 안느껴지나?"
순간 식은땀을 흘린 그는 감각을 집중한 채 조용한 목소리로 부하에게 물었다.
마력을 극대화한 그의 감각은 이미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