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얽히고 설킨(4)
"큭..."
큼직한 폭발. 나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나름 정예로 보이던 놀은 그대로 폭발에 휩싸여 죽었다.
나는 분명 보았다. 놈이 방패로 쓰던 그 푸르스름한 에너지.
다른 놈들은 조잡한 냉병기로 무장한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놈들이 있었다.
어떤 세상의 어떤 물건인지는 몰라도 플레이어에게 하사품을 받은 특별한 녀석들이 분명했다.
"...지금은 일단 잘 받을게."
나는 품에 숨긴 휴대폰의 진동과 함께 나타나는 광석들을 받아 챙겼다.
군단은 지금 나를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도움을 주고 있다.
이렇게라도 싸워서, 내 의도를 알려야 했다.
한번에 전달할 수 있는 군단광석의 한도는 3개였다.
게다가 이거 하나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생체에너지가 어느 정도인지도 안다.
한발한발이 결코 가볍지는 않은 일격이다.
"?!"
나는 그것들 중 하나를 주둔지 방벽 바로 위에서 개짓거리를 벌이고 있는 코볼트를 향해 온힘을 다해 던졌다.
아까부터 보고 있었는데, 저 코볼트가 놀들에게 강화주문 비스무리한것을 걸어주고 있었다.
당연히 기관총이든 수류탄이든 소총이든 온갖 저격이 날아들었지만 놈은 방어막으로 스스로를 보호했다.
놈들이 대놓고 돌진해오면서 자주포의 포격에도 어찌어찌 버티던것도 저런 주문을 쓴 덕일 것이다.
"으아악!"
"또 폭발이..!"
연달아 이어진 폭발에 아군들이 주춤거렸다.
결국 들어있는 에너지를 한번에 폭사해 폭발한다 원툴이지만 일단은 거슬리던 방어막과 코볼트까지 죽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쟁이었다. 수만의 군세가 서로 붙는 대전쟁.
나는 꾸물거리며 끊임없이 몰려오는 놈들을 보고 순간 주춤거렸다. 급히 만든 조잡한 담장 따위는 놈들이 금세 타넘었다.
"전방이 뚫렸...지금 당.."
"뭐? 뚫려?"
거기에 더해 곁에 있던 통신병의 무전기에서 들리는 소리가 우리에게 더 큰 절망을 주었다.
'각오해야 한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여차하면 여기서 완전히 패배할 수도 있다.
현재 적들은 두개 세력이 연합한 상태였다.
우리가 놀, 코볼트라고 부르던 고블린급의 하급 마물들.
하지만 지난번 만난 고블린들이 보여준 것 처럼, 놈들은 유닛이며 그덕에 종족특성과 플레이어의 도움을 받았다.
아직 그 힘의 끝이 어딘지는 모른다.
한가지 확실한건 저놈들에게도 무슨 강력한 지휘체계가 있는지 지금 기관총과 폭탄세례를 뚫어가며 동족의 시체를 밟고 꾸역꾸역 몰려오고 있다는 것.
너무나 단순하면서 확실한 전략이었다.
하사품과 주문으로 무장한 놈들의 특수전력을 막을 헌터전력이 너무 부족했다.
놈들은 그렇게 특수전력들을 앞세워 몸을 비틀며 화망을 뚫고 침투해 병사들을 학살했다.
"이자식..."
나는 기관총 사수를 해치려던 놀 하나를 걷어차고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놈도 자기 몸에 수작을 부린 상태다. 내 가슴까지 밖에 안오는 작은 키로도 신체를 강화한 나와 힘이 비슷했다.
가까스로 팔을 뿌리친 나는 그나마 더 긴 다리를 이용해 놈을 걷어찼다.
그리고 계속 들고 있던, 놈들에게서 빼앗은 검으로 마구 내리쳤다. 죽을 때까지.
이렇게 하나 처리하긴 했지만 솔직히 가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여러분, 물러나야 합니다! 놈들이 너무 많아요!"
"하, 하지만..."
나는 어서 군인들을 뒤로 물리자고 했다. 현장 지휘관은 뭐하는건지 아직까지 후퇴하란 말이 없었다.
"하지만 헌터님. 저희는 자리를, 포를 지켜야 합니다. 계속 사격해야 합니다."
내 말에 누군가 나섰다.
중사딱지를 붙이고 있는 전포사격통제관. 그는 이미 누구것인지 모를 피로 흥건한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그것이 저희 임무입니다. 저희는 군인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려도 눈은 떨리지 않았다.
나도 직감했다. 선택의 시간이었다.
저 마물놈들을 다 쳐죽일 때까지 이들과 함께 싸워야 하는지, 아니면 이대로 도망칠지.
물론 예비군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이곳에서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다. 사실 원래 용병도 아니다. 불과 한달 전 시험 치던 일개 대학생에 불과하다.
"...제가 지목하는 놈들 먼저 쏴주세요."
찰나의 적막 끝에.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일개 대학생이 진정한 전사가 되는 순간이군]
"헛소리 하지마! 이건..."
[그게 네 본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느냐]
달려가며,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내가 전사? 얼토당토않는 이야기다.
강제로 플레이어가 되어 이 게임에 휘말리지만 않았어도.
[그날 이후 쭉 꿈꿔오지 않았느냐. 힘이 생긴다면 싸우고 싶다고]
"하. 네가 뭘 안다고 떠들어."
나는 검을 들고 덤벼들던 놀 하나의 머리를 그대로 쪼개버렸다.
그동안 숨겨온 비밀을 들킨 것 처럼 얼굴이 화끈거리고 기분이 더러웠다.
녀석의 말이 틀린건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내가 현실을 일찍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것 봐. 저런 놈들을 내가 어떻게 이겨. 개죽음 아니냐?"
헛웃음이 나왔다. 정작 먼저 뛰어든건 난데.
내 앞에 우글거리는 적들이 보였다.
"다 비켜!"
그때 그들이 나타났다.
나 같은 놈보다는 진짜로 영웅이라는 칭호가 어울릴만한 사람들이.
뜨겁고 거대한 불길이 몰아쳤다.
그 불의 장막은 단숨에 적들을 덮쳐들었다.
어설픈 강화주문 따위는 일격에 태워버리는 불의 힘.
대한민국 S급 헌터 지창현. 티비속에서나 보던 인물이 방금 내 옆을 스쳐지나갔다.
*
"놈들이 왜 갑자기 도주했을까? 아무리 S급이 하나 껴있었다지만 지원 온 헌터들은 고작 열둘이었는데."
"그 이유를 듣고 왔지."
부상병 수습이 한창인 주둔지 한복판.
로버트가 어딘가 다녀오더니 초췌한 얼굴로 복귀했다.
"우리 상관들. 알지? 크리스 베이커, 차지연, 그 두사람. 지원이 도착한 직후 그 두사람이 자기들 팀을 이끌고 놈들 본진을 쳤어."
"다, 단 둘...아니 고작 한개 분대 이끌고?!"
모두가 기겁했다. 그리고 그들의 무모함에 혀를 내두르며 용기에는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나는 차지연, 아니 그녀를 움직이는 플레이어의 의도를 파악했다.
'놈들에게는 아직 S급 헌터에 준하는 강자가 없다.'
이 미친 게임은 밸런스 폭망이다. 그 어떤 플레이어든 유닛이든 처음 주어지는 자신의 파트너를 바꿀 기회는 없다.
놀과 코볼트는 어쨌든 근본이 최하급 마물.
아무리 장비를 쥐여주고 주문을 알려줘도 집단이라면 모를까 개체 하나당의 강함은 그리 강하지 않다.
'굳이 지창현 일행이 지원 올 때까지 기다린건 보나마나 척살권 때문이겠고.'
지금 시점에서 보유할 수 있는 척살권은 아마 두개? 세개? 어쩌면 전혀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타겟팅이 헷갈리도록 굳이 지창현을 기다렸다 들어간 것이다.
성공하면 빈집털이 개꿀파밍, 척살권에 다굴 맞고 실패해도 그놈 입장에서는 장기말 두개를 잃었을 뿐이니.
대체 뭐하는 외계인일지 모르겠지만 대단하다.
"어디가나?!"
"...조금 쉬러요."
"으응, 일단 오늘은 푹 쉬고."
내 표정이 좀 많이 안좋았는지 로버트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다만 내가 향한 곳은 막사가 아니었다.
"..."
사망자들의 시신을 수습한 곳. 흰 천에 덮인 이들이 적어도 수백은 되어 보였다.
나는 그 수많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발견했다.
생전에 쓰던 검이 반으로 부러진 채 곁에 유품으로 놓여 있었다.
[스쳐간 인연일 뿐 아닌가?]
"네가 인간이 아니란건 알겠다."
슬프지는 않았다. 윤수아 그녀는 말그대로 스쳐간 인연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은건 아니었다. 그냥 화가났다. 그녀는 내 목숨을 한번 구했으나 나는 구하지 못했다.
"군단은 뭐라는데. 지금 내 감정, 알거 아니야."
[마찬가지로 분노하고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네가 화가 났으니까]
"...그래?"
입맛이 썼다. 직접 싸워보니 알것 같아서 더 그랬다.
군단은 강하다. 군단 수준이 아니라 군단이 상대했던 파멸균들이 이 마계에 떨어져도 놀과 코볼트 그놈들 정도는 그대로 집어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아와 아는 사이였습니까?"
그 순간. 누군가 내 뒤에서 말을 걸었다.
낯선 목소리는 아니었다. 이 목소리, 분명 티비등에서 들어 본 적 있었다.
"지창현씨?"
"이야기...들었습니다. 강신우씨."
나는 꿈도 못구던 S급 헌터와 직접 대면하게 되었다.
"이야기를 듣다니요?"
"어떤 활약을 하셨는지. 물론 모든 헌터들이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근데 그들은 군인이죠. 자신이 할 일을 한겁니다. 하지만 강신우씨는 싸울 이유가 없는 신분으로 아는데."
그의 표정은 어딘가 묘해서 지금 무슨 의도로 내게 다가왔는지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저는..."
"수아는 제 사촌동생입니다."
"아."
"그리고 강신우씨, 혹시 더 강해지고 싶지 않습니까. 지금 시국은 당신 같이 의롭고 의지 있는 사람들이 나서야 할 때입니다."
"예?"
갑작스러운 연타공격에 순간 얼이 빠진 나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나는 슬그머니 주머니에 손을 넣어 광석을 만졌다.
이건 폭탄이 아닌, 플레이어와 유닛을 탐지하는 광석이다.
"에볼루션의 비밀, 그리고 이 세상의 비밀까지 낱낱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저는 제 안목을 믿습니다. 제 스승님 역시."
지창현의 눈이 반짝였다. 손으로 잡은 탐지기 역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대한민국 S급 헌터 지창현은, 이 게임과 관련된 인물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