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얽히고 설킨(1)
"이건...이건 말도.."
숨이 거칠고, 말도 덜덜 떨렸다.
이제 막 깨어난 그는 아직 제대로 돌아오지도 않은 현실감각을 가지고도 최대한 빠르게 달려 여기까지 오는데 성공했다.
'그래도 이제 한숨 돌릴 수 있다.'
가까스로 숨을 돌리고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을 벌었다.
자신을 쫒던 놈들도 따돌렸고, 주위에는 적막만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서둘러 온 이곳은 말라 비틀어진 것 같은 마계의 나무들이 무성한 한 숲.
'후, 그들을 깨운다면 호위병력 정도는 문제 없겠지.'
정신없이 도망치긴 했지만 아무 생각 없이 온 것은 아니었다.
이곳은 일종의 봉인지였다.
자신처럼, 과거의 존재들을 봉인시킨 봉인지.
이곳에 잠든 군세를 깨워내어 급변한 세태에 대항할 자신의 병력을 보충할 생각이었다.
"일어나라! 마왕군의 충성스러운 개들아!"
마력을 움직인 그가 봉인지에 걸려있던 주문을 이용했다.
주문은 정상대로 작동하며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곳에 묻힌 이들은 전투력만큼은 알아주던 정예들이었다.
분명 대체 이 땅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이리라.
"좋다. 이걸로 그 천한 배신자 놈들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칠흑의 갑주들을 보며 그는 히죽 웃었다.
소환되는 병사들은 당연하게도 과거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다.
"어?"
그러나 그 순간.
소리를 찢고 날아든 무언가 그의 뿔을 스치고, 아니 '부수고' 지나갔다.
"아아아악!"
그는 극심한 고통에 부서진 뿔을 움켜잡았다.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는 뒤늦게 들렸다.
얼굴을 일그러트린 그가 몸을 돌렸다.
"네...이놈들! 천한 개새끼들 따위가!"
고위 마족인 그의 뿔을 날려버린건 천하디 천한, 감히 상종도 못할 하급 마물.
어딘가의 인간들에게는 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이들이었다.
문제는 저들이 자신이 봉인에서 깨어난 직후 습격하려던 놈들이었다는 것.
"우리의 이름, 아슈크루드."
"무, 뭐라..."
그는 놀들이 눈치채지도 못하게 자신의 뒤를 밟았다는 사실에 1차 충격을, 그들이 말을 한다는 사실에 2차 충격을 받았다.
'대체 뭐지?'
그는 그제서야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분명 자신의 기억과 다름 없는 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달랐다. 그들이 착용한 장비라던가, 손에 든 신묘한 무기라던가.
"시간 끌 것 없다. 어서 죽여버려."
그때 놀들 사이에 있던 유독 키큰 누군가가 후드를 벗었다.
그는 후드를 벗은 상대를 보고 해괴하게 일그러졌다.
지구인들에게는 코볼트라고 불리던, 마찬가지로 하급의 마물이었기에.
"쏴!"
놀 우두머리가 명령을 내리자 발사된 총탄이 난사되기 시작했다.
이를 악문 그가 마력을 움직여 전방에 자주색 방어막을 띄워냈다.
지구인들의 중전차도 뻥뻥 뚫어낼 수 있는 큼직하고 강력한 총탄은 방어막에 금을 쩍쩍 가게 만들었지만, 뚫어내지는 못했다.
"나, 마왕군 군단장 카르카가 네놈들 따위에게!"
힘을 폭발시킨 그의 몸이 조금 떠오름과 동시에 마력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한때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한개 대륙을 정벌했던 위엄에 걸맞는 힘이었다.
[저런 종류의 힘은 일반적인 탄환으로는 뚫기 힘들다. 광선 병기를 써라]
"광선."
놀들은 머리에 울리는 명령을 수신했다.
미리 준비했던 새로운 병기가 타오르는 마력에 휘감긴 그의 몸을 조준했다.
"죽어라 미물들아!"
[...웃기는군. 누가 미물이란건지]
마족 카르카가 쏘아낸 거대한 화염탄을 향해, 겨누어진 총구에서 푸른 광선이 쏘아졌다.
마족 카르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광선은 화염탄을 그대로 조각조각 분해 해체시켜버리고, 방어막까지 부숴버린 뒤 경악한 그의 몸을 그대로 관통했다.
"쉽군."
그걸로 끝이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마왕군의 군단장 중 하나는 이렇게 무시하던 하급 마물들에게 허무하게 순살당했다.
"이제, 당신 차례."
"알고 있다고."
코볼트가 코웃음을 쳤다.
그들 모두 카르카의 시체에는 관심도 없었다.
과거에는 감히 쳐다도 못볼 고위 마족임에도.
"흐...이제 보이는군. 마왕군의 주문이라더니 이렇게 허접한게 전부였는가. 이 강력한 마의 진정한 이치도 모르는 미개하고 가벼운 주문 뿐이로다."
빛나는 힘이 복잡한 문양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앞으로 나선 코볼트는 봉인에서 풀린, 하지만 아직 명령권자를 정하지 못한 마왕군의 사냥개들 앞에 서서 단숨에 이 오랜 고대의 주문을 역산하고 해킹하는데 성공했다.
"자. 너희들의 새로운 주인은 마왕이 아닌 나다."
코볼트는 히죽 웃으며 이제 자신의 명령을 듣게 된 부대를 지휘했다.
마왕이란 이름은 한때 이 땅에 살아가던 이들에겐 절대적인 이름.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제 그들에겐 마왕보다 더 위대한 존재들이 있었으니까.
"흠. 그냥 버리기는 아까운가?"
코볼트는 바닥에 비참히 쓰러져 있는 카르카의 시체를 비웃더니, 손에 든 지팡이를 들어 쿡 찍었다.
동시에 시체의 손이 움찔하며 움직였다.
"썩어가는 시체가 되어서라도, 어디 그 잘난 마왕을 위해 싸워봐라. 지금 이계의 인간들이 군단을 이끌고 쳐들어 왔으니 마계를 어지럽히는 이들을 죽여라."
주술이 걸린 시체가 격하게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시체는 행군하기 시작한 과거의 군단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약속, 지켜라."
"알고 있다고. 플레이어님들끼리의 협정이다. 우리 따위가 배신할 수 있겠느냐."
헤어지기 직전 코볼트는 우두머리 놀의 말에 질린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제 합동으로 지구의 연합군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본디 뭉칠 수 없는 유닛과 유닛의 관계이지만, 더 큰 적을 물리치기 위한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
"이거 계약 위반 아닙니까? 저희는 분명 주둔지에 머무르면서 전투 이후 진행되는 연구원들 호위를..."
"따지고보면 그곳도 주둔지잖아."
본대가 장갑차와 전차로 짓누르고 닦아놓은 길위를 가로지르는 길 위에서, 로버트는 한숨을 쉬며 대원들의 불만을 잠재웠다.
사실 반발할 것도 없긴 했다. 우리 임무는 연구원들 호위인데, 연구원들도 함께 최전선인 그곳으로 가기 때문이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나름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본인의 목숨을 구해준 이후, 조금 가까워진덕에 스스로 안토니프라고 소개하고 친해진 이 연구원은 두려워도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놈들에 대해서 연구하고 분석한다면 알아낼 수 있는게 많습니다. 실제로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알아낸 파훼법도 많고."
"그렇죠."
부정할수는 없었다. 실제로 지금까지 철저한 연구와 분석이 이루어졌기에 더욱 효과적으로 놈들에게 대항할 수 있었으니까.
다만 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제 놈들은 더 이상 평범한 마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군단이 내 도움을 받고 상식을 뛰어넘는 진화를 거듭하며 까마득한 대선배인 파멸균을 고꾸라트렸다.
바로 그 상식을 벗어난 변화와 성장이 유닛과 플레이어의 특성이었다.
"최근들어 뭔가 이상한 점이 많긴 합니다만, 알아낼 수 있을겁니다."
애써 희망을 가지는 그 모습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내 주제를 파악하려 애썼다. 나는 아직 미약한 힘이나 가진 일개 민간인일 뿐.
설령 뭔가 하려고 한들 그건 차지연의 플레이어 같이 능력 있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저 옆에 군용 차량들도 달리고 있었다.
국가 소속 연구원들도 지금 함께 이동하는 중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딱히 걱정은..."
"반드시 승리할겁니다. 이동중 기습당했다지만, 저희의 화력은 충분합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한 지휘관이 호언장담을 하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화력이 충분하다는건 사실일 것이다.
다만 이 전쟁에는 화력이 전부가 아니라는게 문제지.
"원래 저렇게 설레발치면 문제가 생기는데 말이야. 당장 직전에 기습하려던 적들의 별동대를 우리 상관들이 먼저 발견하고 부숴버렸다면서."
"이상한 플래그 세우지 마시죠."
나는 콕스의 타박을 듣는 로버트를 두고 먼저 배정된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품 안에서 두가지 물건을 꺼냈다.
왼손에 든 것은, 이 주위에 유닛이나 플레이어가 있는지 알려주는 것.
다행히 광석은 빛나지 않았다.
오른손에 든 것은 군단이 나를 위해 준 또 하나의 제물.
이것은 순전히 내 안전을 위해 준 물건이었다.
"지금 군단은 뭐 하고 있지?"
[여전히 탐색활동에 열중하고 있다. 대군체의 소화가 끝나지 않았으니]
"...정찰활동은?"
[대군체를 완전히 소화시켜야 놈이 몸으로 막고 있는 통로가 나타난다]
군단은 효율을 계산해 굳이 에너지를 들여서 우회로를 파지도, 대군체를 물리적으로 절단내고 조각조각 해체하지도 않았다.
대신 이렇게 비는 시간동안 다른 곳들을 탐사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에 도움을 준 것이 바로 마계땅강아지들의 지형감지능력이었다.
[이제 그 감지능력을 이용해 땅 속의 미세한 흐름도 눈치챌 수 있는 군단은 벽 속에,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그곳을 파고들기로 결정했다]
군단은 그곳을 파헤치기로 결정하고, 채굴형 군단병들을 수십 이상 동원해 금세 길을 뚫어냈다.
"...설마 새로운 미궁인가."
그곳에 숨겨져 있던 것은 하나의 공동이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과 이어져 있는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은 또다른 공간.
"캬아악!"
이제는 익숙한 파멸균 감염체가 군단병을 향해 덤벼들었다.
[잘 되었다. 이번에 손에 넣은 파멸균 대군체의 동족을 대상으로한 정신감응능력을 우리도 사용할 수 있는지 시험할 기회다]
물론 이제 우리에게 평범한 파멸균은 별 위협도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