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군단VS군단(10)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고. 왜?"
[지금 그것을 알아보는 중이다]
멍하니 침대에 누운 내 시선에는, 천장에서 펼쳐지는 또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동생 강도연과 가면을 쓴 군단의 모습이 보였다.
화면을 가득채운 대저택보다도 커보이는 거대한 살덩이의 모습도.
군단은 지금 이순간에도 내가 보낸 인형을 꼭 안고 있었다.
"그렇군. 멍청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파멸균 대군체와 소통하는 것 같던 군단이 코웃음을 쳤다.
[파멸균대군체는 말그대로 수백 이상의 파멸균군체들이 모여 만들어진 존재다. 그덕에 놈은 본성을 뛰어넘어 사고하는게 가능해졌다]
"본성을 뛰어넘은 사고. 그래서 그 결과가 얌전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그 원인은 뭐지?"
"...우리는 이제 과거 이 세상을 지배했던 재앙의 잔재일 뿐, 이 윗층계는 이제 새로운 지배자들이 시련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발전할 가능성이 없다고."
내 물음에는 마치 듣기라도 한듯, 군단이 직접 자신의 입으로 대답해 주었다.
순간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과거의 잔재와 새로운 시대라.
[한때 전 세계를 지배했던 파멸균은 이제 없다. 이 지하 미궁에 갇힌 이들이 전부다. 한 시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대를 지배했던 지배자로서, 파멸균대군체는 이제 자신들의 시대가 저물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어차피 안될거 아니까 그냥 포기했다는거야? 그게 가능해? 대체 위에 뭐가 있는데?!"
물론 설명을 추가적으로 들어도 이해가 되는건 아니었다.
[인간도 그렇지 않느냐. 저항하고 패배하여 유린당하느니, 포기하고 얌전히 죽음을 받아들여 마지막 명예라도 지키려 하지 않는가]
"그건..."
"웃기지 마!"
날카로운 고성에 내 입이 합 다물어졌다.
동시에 느껴지는 격한 감정의 고동. 이것은 군단의 감정이었다.
지금 군단은 그 어느때보다 격노하고 있었다.
[군단에게는 절대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개념이었다. 세포 하나 남을때까지 싸우는 것이 당연하니까]
"으..."
격한 감정의 격류 사이에서, 일단 진정한 나는 화면에 집중했다.
휘말린건 동생도 마찬가지라 얼굴을 찡그리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패배자, 쓰레기!"
군단은 지금 최선의 방법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그 어떤 적이 와도 먹어치우고 끝까지 싸우는 것이 우리 같은 존재들의 길인데 감히."
대군체를 향해 삿대질하는 손이 떨렸다.
군단은 분명 자신을 위기로 몰았던 변종파멸균을 자신의 동류로 인정했다. 그리고 꽤 마음에 들어했다.
그러니 대군체씩이나 되는 변종파멸균이, 저항하거나 싸우기는커녕 이렇게 무기력하게 있으니 화를 내는 것이었다.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우리는 멈추지 않아. 도태되지 않아. 언제나 진화하고 강해져."
[군단이 결단을 내렸다. 이 무쓸모한 도태된 쓰레기를 치워버리고,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어느새 밑층계를 다 먹어치운 군단의 둥지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대군체를 통째로 먹어치울 작정이 분명했다.
[그 어떤 적이 있어도 스스로 물러설 일은 없다. 모든걸 부수고 모든걸 먹어치우겠다. 그것이 군단의 뜻이다]
"..."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마치 군단의 본질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 같았다.
이 우주 전체를 갉아먹을 끝없는 탐식을 가진 포식자. 오직 그것만을 위해 탄생한 존재.
[절대 멈추지 않는다. 무엇이든 먹어치운다]
"묘하게 자신이 있어보이네."
나는 떠오르는 글자를 보며 쓰게 웃었다.
내가 저 존재를 바꾸거나 통제할 수 있을까.
군단에 비하면 지금의 나는 일개 미물일 뿐. 심지어 군단은 더더욱 커질 것이다.
그래도 오직 파괴와 살육만을 반복하는 존재가 되는건 막고 싶었다.
"기껏 자아가 생겼어. 인간의 입장에서는 태어났다고 생각해도 무방하지. 너무 이른 걱정인가 싶지만 외로움이란 감정을 배우게 하고싶진 않거든. 너는 어떻지. 너는 정말로, 진심으로 군단의 성장 그것 하나만 바라는거냐고."
[...]
나를 위해서, 혹은 이 세상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군단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둥지에서 뻗은 촉수들이 대군체를 향해 쇄도했다]
둥지의 촉수도 진화했다.
형상력을 잔뜩 머금은 그 나뭇가지 같이 단단하고 거친 촉수들은, 대군체의 몸 깊숙히 파고든 뒤 군단의 감염균들을 뿜어냈다.
[변종파멸균과의 전쟁으로 그 능력을 극대화시킨 감염력이 순식간에 전체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번져가는 검은 핏줄들이 거대한 살덩이 여기저기서 보이기 시작했다.
"저항해."
그 모습을 보며 군단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나 대군체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군단의 공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시 한번 군단의 감정이 격동했다.
[[[저항하란 말이야!!!]]]
그리곤 끝내 그 감정이 폭발했다.
거대한 충격파가 몰아치더니, 대군체의 몸이 펑펑 터져나가고 공동의 벽과 바닥에 쩍쩍 금이가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분노를 기반으로한 정신파만으로 저리 강력한 물리력을 행사한 것이다.
저 거대한 존재에게 휩쓸리지 않는건 순전히 지금의 군단보다 내 자아가 더 단단하고 안정적이기 때문.
하지만 군단의 자아가 성장하고 안정되면 내 정신력으로 저걸 이겨낼 수 있을리가 없다.
"나도, 나도 성장해야돼."
숨을 몰아쉬었다. 손 놓고 여유롭게 있을 시간이 없었다.
적어도 군단을 통제하려면, 단 한구석만이라도 대등하거나 우위에 서 있는 구석이 있어야했다.
*
"자사 연구원들이 습격을?!"
"진정해. 다행히 인명피해는 거의 없다니까. 용병들이 좀 상했을 뿐 임무도 잘 끝났다던데."
"용병들이...그럼 그 사람은."
"나 참, 무사해."
소식을 가져 온 크리스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이든 말든 차지연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강신우였던가? 그 초짜의 활약이 꽤 컸다더군. 실질적인 전투는 함께있던 한국군 특수부대가 했다지만, 그가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초기에 구출한 사람들이 꽤 많아."
"그래?"
"이름도 알려지고, 평판도 좋아졌지. 그래도 큰일날뻔했어."
웃던 크리스의 입꼬리가 내려오더니 이내 표정이 심각해졌다.
대충 잘 넘겼다지만 어쨌든 습격은 습격이었다.
"애초에 이 세상이 정확이 어떤 세상인지도 모르고 넘어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피해일지도."
차지연이 씁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들은 직전에 본대와 떨어졌다.
꾸역꾸역 진군한 본대는 적들의 본거지로 추정되는 곳 인근까지 진군해 자리를 잡았다.
그 과정에서 여러번의 전투가 있었다.
그중 몇번은 적들의 게릴라였으나, 몇번은 적이 아닌 존재들의 습격이었다.
"처음엔 유닛인줄 알았어. 하지만 단순한 짐승마저도 그렇게 끔찍한 곳이었을 뿐이지. 사실은 어서 빨리 떠나고 싶다고."
"...그래."
그녀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발적으로 괴물들과 싸우는 일을 해왔지만 사실 싸움을 즐기는 성격은 절대 아니었다.
단지 괴물들에게서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 헌터일을 해왔을 뿐이다.
"저, 여러분?! 지금 전방에 움직임이 감지되었습니다!"
"아. 드디어."
그때 누군가가 그들이 있던 차량 앞으로 뛰어왔다. 경계임무를 하던 에볼루션 소속의 또다른 헌터. 다만 유닛은 아니고 평범히 고용된 사람이었다.
일이 시작되었음을 직감한 두 사람은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어떤 놈들이지?"
"역시 놀들인 것 같습니다."
움직임을 보고해온 헌터는 들고 있던 장비를 크리스에게 전해주었다.
차지연은 굳이 장비를 쓰지 않았다.
직접 사용한 주술로, 한쪽 눈앞에 반투명한 진법을 띄워냈다.
대상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힘으로 지금 은신 역장 안에 숨어 은밀히 움직이는 놈들을 볼 수 있었다.
"놈들은 우리를 보지 못한 것 같은데."
크리스가 슬쩍 하늘을 흘끔거렸다.
마치 적들이 쓰고 있는 역장과 비슷한 반투명한 막이 근처를 덮고 있었다.
"이제 어쩌지?"
[당연한 것 아니냐. 유닛이다. 놈들을 죽여라]
크리스의 중얼거림에, 목소리가 기다렸다는 듯 그들의 뇌리에 울렸다.
"요즘 좀 바쁘시더만 용케..."
"하지만 적들의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플레이어가 상점에서 새로운 힘을 구매해 주었다]
위험하지 않겠냐는 차지연의 말에 플레이어는 단숨에 한가지 도움을 더 주었다.
그녀는 전신이 따끔거리는 느낌에 눈을 부릅뜨고 부들거렸다.
[마력을 극대화하는 타 종족의 운용법 중 하나인 혈류순환법. 미개한 방법이긴 하지만 긴급히 써먹을만한 방법이다]
"크아...뒤지게 아픈데. 이것 봐, 핏줄 터져서 돋아나는거."
크리스가 상처가 생긴 손을 보여주며 낄낄거렸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삼켰다. 이런 고통 따위, 당연히 플레이어에겐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가자. 레크만씨, 다른 사람들이랑 포지션 대로 천천히 싸우세요."
"아,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린 그녀는 크리스와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저놈들 보니까 본대를 기습해서 치려는 것 같은데...진짜 연합군한테 뭐라도 받아야 한다니까? 우리 때문에 목숨 구하는 거잖아."
"지금은 싸우는데 집중해."
"진짜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이네."
피식 웃은 크리스도, 시종일관 진지하던 차지연도 각자의 힘을 끌어올렸다.
동시에 그들의 모습을 숨겨주던 장막에서 벗어났다.
놈들이 당황한 모습이 보이는 순간, 땅을 박차오른 차지연이 전신에서 거대한 전격을 뿜어내며 놈들의 한가운데로 짓쳐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