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군단VS군단(9)
"어..."
"죄송합니다. 엿들으려는건 아니었는데. 윤수아 중위입니다. 사실 가라군인이에요. 원정에 참가하려고 특무대에 지원한거라."
베레모를 벗은 그녀가 피식 웃었다. 망으로 묶은 단발이 흔들렸다.
정작 나는 당황해서 미처 혓바닥을 움직이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그녀가, 내가 플레이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식은땀이 흘렀다.
"혹시 음성기록 남기던 중이셨어요? 마지막 한마디밖에 못들었으니 걱정 마세요."
"아...음성기록이요?"
그러나 그녀는 다행히 '그쪽'은 아닌 것 같았다.
도리어 내가 간이 책상에 꺼내둔 휴대폰을 보더니 눈을 반짝이며 헛다리를 짚었다.
"예, 뭐 그런..비슷한..."
물론 내 입장에서 그렇게 오해해주면 고마운 일.
졸지에 나는 전장에서 음성일지를 남기는 감성 넘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정작 부끄러워 죽으려는 나와는 달리 그녀의 눈은 흥미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좀 부끄럽네요."
"아니요. 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그런거."
"그런데...중위님은 여기 왜 오셨는지?"
생각해보니까 이 여자, 노크도 안하고 들어왔다.
아니면 했는데 내가 못들었다던가.
"그냥 한번 보러 온거에요. 싸우는 와중이었지만, 꽤 인상이 깊게 남아서."
"그건 저도 마찬가지죠."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그녀가 그 괴물, 마계땅강아지와 싸우던 모습이.
"전 그냥 하던 일을 한 것 뿐이에요. 하지만 제가 사람보는 눈은 좋거든요. 겪어봐서 알아요. 원래 싸우는 일보다 구하는 일이 더 어렵다는거."
그런데 그녀는 나를 보며 눈을 빛냈다.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당황스럽고 뜻밖의 관심이었다.
"헌터셨죠? 어느 기업에 계셨어요? 아니면 프리?"
"...직전에 활동 시작했습니다."
"그럼 각성하자마자 여기 온거에요?"
내게 먼저 관심을 가지고 다가 온 그녀는 말이 많았다.
이 뜻밖의 인연에 나는 일단 침착하게 응대했다.
그녀가 정체를 숨긴 유닛이나 플레이어일 가능성도 배제하면 안된다.
"왜요? 아, 이렇게 말하면 너무 실례인가."
책상에 걸터앉은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를 해보니 다소 마이페이스라도 악의가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굳이 말하자면 기회를 잡은거죠."
나는 과거의 원수를 갚는다는 대외용 핑계를 댔다.
놀란 그녀가 크리스처럼 눈치를 보며 입을 달싹였다.
"죄송해요."
"아뇨 괜찮습니다. 다들 그렇지 않을까요. 일반 군인들 조차도, 자원한 사람들로 편성되었는데."
"...맞아요. 실은 저도 그렇죠."
그녀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보니 평범한 B급 헌터였다던 윤수아 그녀도 이번 원정에 자원한 것이었으니까.
"저도 마물놈들에게 가족을 잃었어요."
"명복을..."
"아뇨! 반드시 살아있어요. 끌려간지 일주일도 안되었단 말이에요."
그녀의 눈이 번득였다.
순간 뿜어지는 격렬한 기세는 내가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까...반드시 구하러 갈거에요."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희망적인 말도 부정적인 말도 할 수 없었으니까.
그녀는 그 이후 다시 웃으면서 분위기를 환기하곤, 이야기를 더 나누다 다음에 보자며 밖으로 나갔다.
"제가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셨을 때 기뻤어요."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에는 뼈가 있었다.
나는 멍하니 자리에 앉아있었다.
군단을 위해 행동하기로 결정하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로 새로운 인연이 끌려왔다.
과연 이게 괜찮은 것인지 심란한 마음을 품고, 그대로 다시 어플을 켰다.
[군단이 네게 제물을 바쳤다]
그러나 어플을 키기 전에 무언가가 내가 혼자 남길 기다렸다는 듯 먼저 내 앞에 도착했다.
"군단의 동력기관."
[정확히 말하면 달빛요정들이 사용하던 신석에 가깝다]
나는 내 앞에 나타냐 붉은 광석을 손으로 집었다.
어플로 보던것에 비하면 크기가 작다.
보통 주먹만하던 사이즈였는데, 지금건 그 반의반도 안된다.
하지만 평범한 동력기관과는 달리 복잡한 무늬가 각인되어 있었다.
"이걸 대체 왜? 용도가 뭐지?"
[기반은 천혼술이다. 이미 배우지 않았느냐]
"그렇지."
나는 이미 차지연에게 마나석을 다루는 방법을 배웠다.
힘을 움직여 광석에 주입했다.
동시에, 광석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실패한게 아니야. 단지 원래 이렇게 설정되어 있을뿐."
[그것은 플레이어와, 유닛을 감정할 수 있는 물건이다. 원리는 스트링. 힘을 주입하면 미세한 영혼의 끈을 감지하여 빛을낸다. 동시에 너를 스캔하려하는 힘 역시 막아줄 수 있다]
"...장한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내게 정말 필요한 물건이자 활용도 최상의 물건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보답을 해야지. 뭘 줄까."
[굳이 무엇을 줘야겠느냐]
"그래. 전이라면 망설였겠지만 이제는 아니거든."
의도는 뻔히 보인다. 녀석의 제 1목적은 군단의 성장.
지금껏 나를 잘 이용해 먹었으니, 이제는 군단이 나에 대한 집착은 버리고 그저 광기에 젖은 포식자가 되길 바라겠지.
하지만 그렇게 팽당할 순 없지. 이젠 내가 군단을 놔주지 않을 것이다.
설령 관조자가 또 수작을 부려도 상관 없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건 플레이어인 내 의지라는걸 이미 확인했으니까.
"그동안 너무 못챙겨준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니 의식하고 신경쓰이게 만든게 좀 미안해졌다.
그러니까 슬슬 당근 하나 정도 주는건 좋지 않을까.
*
"저기, 안 뺏어."
"...알아. 딱히 경계하는건 아니야."
"나 진짜 미치겠네."
군단의 둥지. 둘은 뭔가를 오독거리며 씹고 있었다.
대충 걸터 앉아 있던 강도연은 씹었던 과자를 뱉어냈다.
바닥에 떨어진 과자가 스르륵 녹아들며 소화되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 입만 내놓고 과자를 씹고 있는 군단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군단은 과자 말고도 다른 것도 꼭 껴안고 있었다.
'대체 오빠는 무슨 생각으로?!'
강도연은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하고 속으로 끙끙앓았다.
원인은 신우의 태도로, 그동안 군단의 집착에 부담을 느끼던 사람이 갑자기 그 태도를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이래서야...정말로 딸내미 키우는것 같잖아.'
그녀는 군단이 안고 있는 하사품이자 '선물'을 심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별거 아니었다. 대체 그곳에서 어떻게 구했는지 짐작을 할 수 없는 자그마한 인형이었다.
물론 무엇을 주었는지가 중요한게 아니었다.
'그가 자신에게 주라고 주었다'가 중요할 뿐.
강도연은 차마 이해하지 못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군단에게 주라고 인형을 주었다. 그리고 군단은 그 행위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역시 알고있는게 분명해.'
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직감으로 자신의 오빠가 군단이 몸을 만들었으며, 그것을 숨기고 있다는걸 알아차렸다고 눈치챘다.
그뜻은 중계자를 맡은 관조자 역시 이 일에서 군단이 아닌 신우의 편을 들었다는 뜻.
그렇기에 그 의도는 더더욱 미궁에 빠졌다.
지금 행해지는 이 행동은 아직 불안정한 군단의 심리를 흔들고 집착을 강화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그녀는 그래도 뭔가 뜻이 있겠지~하는 마음으로 궁금증을 눌러 참는 중이었다.
[정찰병들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아주 흥미로워."
바로 그때, 전투 이후 윗층계를 조사하던 군단의 정찰병들이 무언가를 발견하였다.
[논리적으로 생각했을때 모순점이 있기는 했다. 변종파멸균은 강력하다. 같은 파멸균을 잡아먹어 탄생한 존재이기에 당연하다. 그렇다면 에너지 부족을 겪어서는 안되었다. 파멸균 감염체들은 아직 많고, 이 미궁도 넓기 때문에. 하지만 놈들의 행동은 어딘가 이상했다]
"분명 같은 파멸균들이 모든 곳을 점령했을텐데, 놈들은 위가 막힌 것처럼 행동했지. 굳이 45층계에 몰려있던 것도 이상하고."
군단은 미리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변종파멸균을 절멸시키고 마침내 45층계 밑을 완전한 군단의 영역으로 삼았을 때.
46층계의 줄기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이럴수가..."
강도연은 놀라 입을 막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지만 강력한]
"놈은 분명 파멸균이다. 변종이지. 하지만 다른 놈들과는 다르고."
놈은 분명 살아있으나, 군단의 정찰병들을 딱히 건드리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살덩이 같았다.
수많은 감염체들이 한데 뭉쳐 만들어진 파멸균의 변종.
하지만 무리를 짓고 한층 더 강력하고 포악한 변종으로 진화한 밑층의 파멸균들과는 좀 다른 모양새였다.
"적대하지 않는다고?"
"소통이 가능할지도 모르지."
그 거대한 몸체에서 느껴지는 무언가를 군단도 느낄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전쟁과 탐식의 본능보다 호기심이 앞선 군단은 그 거대한 변종파멸균을 향해 자신의 감염세포를 투입해 감염시켰다.
그리고 놈은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감염증식변종파멸균대군체: 6N0987]
놈의 정보가 군단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었다.
있지 않을까 예상했었던 존재.변종파멸균대군체의 존재가 입증되었다.
'적대하지 않겠다고.'
일부분 동화된 상태에서, 군단은 상대의 의도를 해석할 수 있었다.
수백개 이상의 파멸균군체가 뭉쳐서 만들어진 거대한 존재. 하지만 이 거대한 존재는 지금 죽어가고 있었다.
결국 에너지 부족이라는 밑층의 변종들과 같은 이유였다.
실제로 거대한 몸체 주변에 말라 비틀어진 조직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대군체가 된 놈들은 근방의 파멸균군체들을 강제로 조작해 끌어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밑층계의 변종들이 경악하는게 당연했다. 어찌보면 동족포식의 끝판왕이라 불릴만한 존재다]
최초는 아니지만 곧 최강으로 성장한 존재.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또다른 변종들이 지배하던 밑층계를 제외한 모든 파멸균들을 끌여들여 하나로 만든 최강의 변종파멸균은 지금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중이었다.
'어째서?'
그들의 생각을 일부 읽어낸 군단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고 진화하는 것을 진리로 여기던 군단이기에 더욱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