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군단VS군단(7)
파멸균.
수백년 전 한 세상을, 그리고 이 지하세계마저 침투해 모든 생물을 절멸시킨 재앙.
그리고 그 파멸균들이 지하에 갇혀 스스로 진화한 것이 변종파멸균이었다.
놈들은 강력했다.
그 어떤 동물이라도 집어삼키는 강력한 감염력, 그리고 그 감염력을 이용한 모방과 복제는 오직 여럿의 소군체가 모여 만들어진 변종들만이 가진 능력이었다.
"크륵."
이 변종들 중에서도 유독 독특한 놈이 하나 있었다.
최초의 변종파멸균. 놈은 지금까지 강한 힘으로 동족들을 휘어잡고 그 위에 군림했다.
하지만 단언컨대 지금 맞이한 위기는 그 어느때보다 치명적이었다.
"그어어..."
괴성을 지른 거체의 변종 하나가 꽉 막힌 입구를 몸으로 들이받았다.
그러나 막힌 곳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놈들은 당황했다. 애초에 지금까지 거쳐 온 무수한 전투중 이런 상황은 겪어보지 못했다.
아니 지형을 붕괴시키거나 변형시킨다는 생각은 고려대상조차 아니었다.
달빛요정들이 그런식으로 저항하고 항전했었지만 그것은 형상력이라는 미지의 힘이 동원된 결과물.
감히 자신들과 감염전과 육탄전을 벌일정도의 생물체가 그정도의 능력까지 구비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도 안했다.
놈들에게는 스트링으로 이어진 누군가도, 그 누군가의 도움도 없었다.
그 개념에 도달하지 못한 변종파멸균은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
놈, 우두머리 군체는 직감했다.
놈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밑으로 내려가지 못한다면 답은 없다.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기에 위로 올라간다는 선택은 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휘하에 있던 변종파멸균들이 슬금슬금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지금 여기 있는 동족들을 다 먹어치우면, 극단적인 휴면을 거쳐 그래도 수백년은 더 버티지 않을까 하고.
우두머리가 육신의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그동안 유지되었던 군체들간의 동맹이 깨지기 직전이었다.
"크으..."
그러나 바로 그때.
파스스 하는 소리와 함께 근처 벽에서 무언가 떨어져내렸다.
'군단병들이 작업을 끝내 놓았지. 이제 가장 취약한 곳을 네가 부수면, 정확히 놈들의 주력이 있을 45층계 줄기층만을 온전히 무너뜨릴 수 있어.'
"알겠어."
명령받은 포인트에 도착한 강도연이 그 다음 지시를 수신했다.
군단은 땅굴을 파는 능력을 이용해 이 윗층계.
즉 변종파멸균들이 모여 있는 45층계의 지반을 연약한 상태로 조작해 두었다.
이미 탐지능력과 감지능력을 활용해 놈들의 다수가 해당 층계에 있음을 확인했다.
저것을 완전히 무너뜨리면, 단 한번에 무력화시킬 수 있다.
몸을 다 으깨놓으면 아무리 끈질겨도 물리적으로 저항하지 못할테니까.
"후."
숨을 내쉰 그녀가 검을 들었다.
새롭게 보충한 전신의 동력기관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뿜어내는 에너지가 응집하는 것은 검.
검에 타오르는 검붉은 에너지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군단이 가진 가장 강한 화력을 내는 방법은 사실 모든 에너지를 한점에 응집시켜 폭발시키는 것.
그녀가 검으로 포인트를 겨누었다.
거의 동시에, 검에 응집한 에너지가 광선의 형태로 뿜어졌다.
"으아앗!"
'대피해.'
광선은 닿자마자 대폭발을 일으키며 터졌고, 거대한 충격파가 일대를 뒤흔들었다.
분명 이 드넓은 대공동에 비하면 그녀의 힘은 그리 강한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단순한 충격파에서 끝나지 않았다.
군단의 절묘한 계산을 토대로 군단병들이 작업해놓은 방향을 따라서, 그 모든 충격이 연쇄작용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기둥역할을 하던 곳들이 차례차례 부숴지거나 터져나갔다.
천장에는 쩍쩍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쏟아져내리고 깨져나간 벽이 파편을 뿌렸다.
[달빛요정들 이후로는 처음일 것이다. 이 미궁의 지형지물을 바꾼 존재는]
"큭.."
진동에 뛰기도 힘든 상황에서 감각을 극대화한 강도연은 용케 넘어지지도 비틀거리지도 않고 달린 뒤 온 힘을 다해 몸을 날렸다.
얼핏 괴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부숴져 내리는 천장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괴성이었다.
'계획은 성공이다.'
그녀는 보지 않아도 볼 수 있었다.
지금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리는 저 파편들 속에, 얼마나 많은 변종파멸균들이 섞여 있는지.
"으..."
"일어나."
"지, 직접 온거야?"
웃긴 말이었다, 어차피 모든 군단병들이 곧 군단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손을 잡고 일어선 그녀는, 가면에서 번득이는 안광을 보고 움찔했다.
"첫 숙적이라 부를 수 있는 이들, 동시에 우리에게 큰 선물을 줄 수 있는 이들."
군단은 강도연을 지나쳐 폐허로 향했다.
2개 줄기층이 하나가 되어버린 이 폐허에, 아직 살아있는 변종파멸균들이 있었다.
"으으으아아아!"
무너진 잔해를 부수고 기어나온 놈도 그중 하나였다.
변종파멸균소군체를 이끌던 우두머리군체.
유독 거대한 몸체를 가진 그놈은, 특이하게도 인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여성과 비슷한 모습을. 물론 파멸균식 재해석이 들어간 육신은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은 아니었다.
"우리를 보고 가장 강한 모습이 너라고 생각한건가. 멍청하게도, 인간의 모습은 형상력이 없으면 너무나 나약한데."
군단은 놈을 비웃었다.
어쩌면 결국 군단과 동류라 할 수 있는 존재.
그 업적 역시 이제 미궁을 기어올라가는 군단과 비교하면 대단한 존재였다.
하지만 군단은 도약했고 놈은 수백년의 시간동안 발전하지 못하고 결국 추락했다.
동류이기에 잘 안다.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하지 못하는 이상 결국 패배자, 쓰레기, 도태종자일 뿐이라는 것을.
"직, 직접 나설 생각이야?!"
강도연은 군단의 의지를 알아차리고 경악했다.
물론 직접 나선다, 이것도 이상한 말이었다.
지금껏 군단병들을 하나하나 움직이던게 군단 자신이었으니까.
"그래."
그러나 이번에 군단은 직접 육신을 움직였다.
굳이 그 이유는 찾지 못했다.
그냥 감정이 이끄는 대로 하는 것이다.
"그럼 선배님...네놈들의 모든 것, 내가 가져야겠어."
미리 대기하던 군단병들이 돌격 준비를 함과 동시에 군단도 그 힘을 움직였다.
"크륵?!"
주변에서 살아남은 파멸균과 그 숨을 끊기 위한 군단이 마지막 전투를 벌일때.
순식간에 쇄도한 무언가가, 눈치챌 틈
도 없이 우두머리 군체의 몸에 깊숙히 박혔다.
비틀거린 놈은 그것을 잡아 뽑으려 했으나 이번엔 반대에서 날아와 다리에 박혔다.
그 다음은 등, 목, 팔, 허리 등등.
아차하는 순간에 전신에 박힌 그것은 검고 뾰족한 송곳 같은 무언가.
그 끝에 반짝이는 붉은 광석이 빛을 내며 박혀 있었다.
"저거..."
[군단은 나름의 연구를 통해, 자신의 육신을 이용한 전투방법을 개발해 내었다]
강도연이 놀라 눈이 커졌다.
그 검은 송곳들이 일제히 뿜어져나왔다.
어딘가 처절한 파멸균의 비명아래, 수십가지 송곳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군단병을 컨트롤하는 초월적인 연산력을 이용, 찰나의 순간 수십개의 공격을 동시에 진행한다. 지금은 가시의 형태지만 발전가능성은 많다]
군단의 육신은 실상 그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
검붉은 기운을 뿜으며 날아드는 송곳들이 또다시 우두머리의 몸에 깊숙한 구멍을 만들었다.
'나는 왜, 이런 감정을 품었지.'
육신을 움직이던 군단은 고개를 숙여, 휘둘러진 갈고리 손을 피했다.
동시에 날아든 송곳이 다시 한번 적의 가슴팍을 뚫고 관통했다.
억센 손이 날아들었지만 스치지도 않았다.
이미 결판이 났다.
파멸균이 발악할수록, 오히려 파멸균의 몸에 상처가 늘어갔다.
'새로운 감정.'
땅을 박찬 군단이 순간 손으로 적의 목을 붙잡고 넘어뜨려 그대로 땅에 쳐박았다.
발과 팔을 변형시켜, 적의 몸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두 괴물의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서로 맞닿은 부위에서 치열한 감염전쟁이 펼쳐졌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전과 다르다.
군단이 가진 감염력이 지치고 다친 파멸균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붙잡은 목에서 시작해 놈의 혈관을 타고 검은 핏줄이 번져갔다.
굳이 비효율을 감수하고 이런 방식을 선택한 것 역시, 파멸균을 그들이 자랑하던 감염과 침식으로 끝장내려는 욕심이 발현한 것이었다.
"그아아..."
"사라져. 도태된 무쓸모한 쓰레기."
점차 검은 핏줄로 덮여가는 적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가 저절로 휘었다.
군단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은 진득한 희열이었다.
싸우고, 먹어치우고, 진화하는 것은 군단에게는 당연한 본성. 그렇기에 희열을 느낄 이유가 없는데도.
'즐겁다.'
군단 전체가 동요했다.
그동안 군단이 발달시켜온 모든 감정이 오직 그에게서 파생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오늘 일이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이제 찾았느냐. 살아갈 또다른 이유]
전쟁이 끝났다. 군단이 승리했다.
지휘개체가 소멸한 이상 남은 변종파멸균은 더 이상 집단이 아니었다.
"모든걸 먹어치우고 더, 더 올라가야."
군단이 저 위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무너져 내린 45층계. 그리고 그 위로 갈 수 있는 46층계의 입구.
분명 무언가가 더 있다는건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변종들이 고작 이정도일리가 없으니까.
군단은 이 변종파멸균들과의 전쟁 같은 것을 더, 계속해서 겪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그 끝에는 자신이 승리하고 더욱 강해질 것이기 때문에.
*
[군단은 승리했다. 이제, 가장 큰 위협이 되었던 파멸균의 모든 힘도 우리 것이 되었다]
"자세히...봐야 하는데.."
[당분간 시간이 있으니 급할 필요 없다]
천만다행으로, 군단은 승리했다.
믿었다. 그러니까 이제 중요한건 나였다.
"로버트 씨."
"인사는 하려고 왔지. 네 덕분에 우리 애들 여럿이 목숨 건졌잖아."
"임, 임무는 계속하는 겁니까?"
"당연히."
로버트가 어둑한 얼굴로 들어왔다.
무거운 분위기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마계땅강아지들이 우리를 습격한 그때.
그때는 워낙 급박한 상황인지라 솔직히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