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군단VS군단(6)
"분노, 그리고 기쁨, 동시에...짜증?"
가면을 반쯤 벗은 강도연은 숨을 골랐다.
군단이 느끼는 감정, 당연히 그녀도 공유한다.
곧 근처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격렬한 전장을 보던 그녀는 씩 웃었다.
이 지긋지긋한 전장의 균형을 부숴버릴 군단의 비밀병기가 지금 들이닥치고 있었다.
변종파멸균들이 당황했는지 움직임이 굳었다.
그럴수밖에 없다. 놈들은 지금껏 이 단단한 미궁의 땅에서 적이 튀어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세계의 괴물을 잡아먹고 그 모든 능력을 분석하고 개량한 군단은 놈들의 허를 찔렀다.
'안일했지만, 이번이 끝.'
동시에 군단은 결단을 내렸다.
변종파멸균군단과의 전쟁은 군단에게 많은 상처와, 교훈을 주었다.
탄생아래 파죽지세로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짓밟아 온 군단이 처음으로 힘에서 밀렸다.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포식과 유전자조작 역시 발전을 게을리한 탓에 자칫하면 역으로 당할뻔했다.
덕분에 비축해둔 에너지를 대부분 상실했다.
이 모든것은 다시 겪어서는 안될 참사였다.
[하지만 군단은 유닛이었다. 플레이어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어디서든, 어떻게든 발전할 수 있는 존재. 파멸균이 갖지 못한 그 힘으로 군단은 다시 한번 우위를 잡았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그 우위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계속 뒤흔들리던 땅이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근방에 있던 파멸균들이 찢겨나감과 동시에 허공을 날았다.
땅에서 튀어나온 새로운 군단병이, 그 억센 팔을 감싼 단단한 갑주를 휘둘러 적들을 날려버렸다.
"후."
호흡을 정리한 강도연이 다른 군단병들과 함께 그대로 짓쳐들었다.
검과 이빨, 발톱에는 강한 분노와 차가운 이성이 모두 담겨있었다.
애초에 놈들이 강성해졌다고 하나 압도적인건 아니었다.
그런 균형에 균열이 생겼으니, 균형의 틈이 단번에 벌어지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뭐야. 도망을가?!"
[놈들에게도 나름의 연락책이 있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단지 문제가 되는 것은, 놈들을 지휘하는 지휘개체의 존재 가능성이다]
갑작스러운 변수의 등장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해서일까.
학살당하며 무력화되던 변종파멸균들이 몸을 돌려 몰려왔던 윗층계를 향해 후퇴했다.
군단은 지금 곧장 놈들을 추격하지는 않았다.
[놈들이 건드리지 않은 식물등 이곳의 남은 식생은 물론 놈들의 시체를 모두 먹어치워 에너지를 보충하고, 새롭게 개량한 군단병들을 재생산 해야 했다]
전쟁이 끊이지 않던 와중 아주 약간의 틈이 생겼다.
'너도 쉬어.'
"아, 알았어."
군단은 그녀에겐 휴식을 명령했다.
가면이 완전히 사라졌다.
강도연은 터덜터덜 걸어 둥지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양분 공급을 위한 촉수가 스멀스멀 다가와, 그녀의 요추에 꽂혔다.
"으.."
그녀는 묘한 느낌에 몸을 떨었다.
처음에 가졌던 혐오감은 이제 거의 사라지고, 오히려 묘한 쾌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흥미로워.'
"뭐가?"
'두뇌는 개조 받지 않고 인간의 것 그대로. 하지만 군단의 일부로 개조된 육신에 맞추어 스스로 진화하고 있어. 기존의 모든 체계가 뒤바뀌고 쾌감을 느낄 구석들이 사라지니, 양분공급에 쾌감을 느끼도록 변했지. 그렇지 않으면 버티지 못하니까.'
"내 뇌가?"
가슴이 철렁한 그녀가 움찔했다.
그러면서 무의식적으로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녀의 심장은 더 이상 박동하지 않는다.
심장을 동력기관으로 대체했기 때문이었다.
박동시키는데 쓰이는 에너지가 동력기관의 미세한 에너지 파장으로 혈액을 돌리는 것보다 더 많이 든다는 계산 끝에 개조당한 것이다.
"나는..."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동안은 자신의 몸이 개조 당하는 것에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목숨을 구명 받았고, 자신이 싸우는 일이 결국 자신의 오빠를 돕는 일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 이면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아무리 몸을 뜯어 고쳐도, 자신의 정신만큼은 변치 않고 그대로일 것이라고.
그러니 군단이 제대로 건드리지도 않은 자신의 뇌가 육신에 맞춰 스스로 변한다는 사실은 굉장한 충격이었다.
'그게, 무슨 문제?'
물론 이 문제를 항의할 수 없었다. 스스로가 잘 알았다.
군단에겐 강해지기 위해 뜯어고치고 진화하고 싸우는게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자 법칙이었으니까.
"그보다는 다른 이야기를."
어두운 얼굴로 양분을 공급받던 그녀에게 군단이 자신의 몸을 가지고 다가왔다.
"다른 이야기?"
"그가 또다시 호감의 감정을 품었어."
"저기, 누군가를 좋아한다는건 인간으로서 당연한 감정이야."
"인간의? 하지만 그가 준 인간의 지식에 의하면 인간의 감정선이란..."
"우리 오빠는 그렇게 복잡한 사람 아니야. 평범한 남자라고."
질색한 강도연은 고개를 저었다.
군단이 학습한 모든 정보는 당연히 강도연도 공유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녀가 그 지식들을 거부했다.
취향도 아닌 지식들이 억지로 뇌리에 새겨지는 것, 상당히 거북하고 정신적으로 피로한 일이었다.
"장발을 좋아하는건 맞아?"
"아, 아마 그럴걸. 차지연씨도 긴 생머리던데."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차지연 이야기가 나온건 정말 사소한 계기였다.
군단이 그녀에게 그가 좋아할만한 인간의 얼굴을 설명해 보라고 할때, 가장 최근 직접 만났었던 미인인 차지연을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그...내가 보기엔 충분히 예뻐. 화장도 안했잖아."
군단이 천천히 가면을 사라지게 만들자 드러난 맨얼굴에, 그녀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거짓은 아니지만 네 의견이 중요한게 아니야."
그러나 군단은 다시 가면을 썼다.
어차피 무슨 얼굴을 만들어내든, 정작 중요한 기준은 따로 있었으니까.
"아직 부족해. 역시 데이터가 필요해."
스스로 개량하는데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군단병들을 개량할 때부터 느껴온 깨달음 중 하나였다.
혼자서 파고들어봐야 진정한 도약을 이룰 수는 없다.
[놈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놈들도 알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아무리 강해져도, 자신들이 더 빠르게 변할 수 있다는걸. 그리고 더 많다는걸]
"이제 어쩌지?"
강도연이 정찰병의 시선을 공유하고 침음했다.
파멸균이 다시 몰려오기 시작했다.
잠깐의 변수로 전장에서 밀려났지만, 전쟁에서 끝까지 가면 본인들이 이긴다는걸 알고 있는 것이었다.
"찍어 누르고 싶지만, 효율이 나쁘다."
그러나 군단은 이미 놈들을 상대할 방법을 찾았다.
이번에 새롭게 얻은 마계땅강아지를 활용, 군단은 윗층계로 향하는 모든 통로를 붕괴시켜 막아버렸다.
[에너지 부족은 군단만 겪는게 아니다. 하물며 파멸균들은 군단과 맞서기 위해 그나마 있던 힘을 쥐어짜내 변형하고 진화했다. 그러나 결국 먹을게 없어 동족 포식이나 하던 놈들에게는 우리처럼 비축할 에너지도 없다는 뜻. 게다가 놈들은 땅을 파는 능력도 없다]
"아니, 이러면 우리도 굶어 죽잖아."
"길이야 다른 곳으로 다시 뚫으면 그만이야."
둥지의 알을 찢고 새로운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리지널 마계땅강아지를 군단식으로 개조해 훨씬 강화된 개체들.
그들은 원래 뚫려있던 곳이 아닌 전혀 다른 곳으로 이 단단한 동굴의 암반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변종파멸균군체는 강력했다. 한 세상을 끝장내고, 거기에 자기들끼리 경쟁하며 진화해 더더욱 고이고 고인 놈들이다]
그동안의 파죽지세로 잠짓 오만해진 군단에게 경각심을 심어준 놈들이었다.
애초에 군단은 절대적인 강자는 아니었다.
언제나 위로 올라가는 도전자의 입장이었다.
"...맞아. 결국 살아남는게 강한거겠지? 생태계잖아."
강도연도 의도를 이해하고 쓰게 웃었다.
마계땅강아지들이 갖고 있던 탐지기관과 군단이 가지고 있던 감지기관이 결합하여 미세한 진동과 소리로도 놈들의 위치를 피악하고 동굴의 구조를 알아낼 수 있었다.
군단은 그대로 그걸 피해서 우회로를 팠다.
죽여도 죽여도 끝없는 놈들을 왜 상대해줘야 한단 말인가.
놈들이 굶어 죽거나 자기들끼리 동족포식을 할때까지 기다렸다 마무리를 지어도 충분했다.
"아니면, 그냥 전부 무너뜨린다던가."
그때 강도연이 멍하니 한마디 중얼거렸다.
"지금의 우리에겐 충분히 가능한 일."
순간 눈을 반짝인 군단은 강도연이 제기한 제안을 검토했다.
공동을 무너뜨린다는 구상은 사실 군단이 지금보다 훨씬 미진하던 시절에도 할 수 있던 생각이었다.
단지 위로 올라오며 더더욱 규모가 커지는 공동덕에 사장시킨 구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지금은 이 동굴의 단단한 암반도 파고들 수 있는 병사가 있었다.
형상력이라는 논외의 힘도 쓸 수 있었다.
"그, 근데 까딱 잘못해서 전부 무너지면 어쩌지?"
"탐지, 측량, 설계, 계산 전부 가능."
그리고 정교한 설계를 논할 수 있는 지식 역시 있었다.
한 종족이 수천년간 발달시켜온 수학적, 과학적 공학적 지식들이.
육신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전체적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감정과 자아가 생긴 부작용, 바로 지식 활용의 비효율과 모순.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활용하려했던 서브마인드가 이번에 그 값을 톡톡히 하며 군단이 미처 생각치 못한 부분을 짚어주었다.
"내가 명령한 지점으로 가서 대기해."
군단은 땅을 팔 수 있는 수십마리의 군단병을 운용하고 동시에 모든 지점을 탐색 및 측량, 그자리에서 즉시 최적의 계산을 끝마쳤다.
모든걸 무너뜨릴 강력한 힘 역시 지금 출발시켰다.
[포식, 성장, 진화. 그것들은 수단일 뿐 그것만으로 만족할 순 없다.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면에서 절대적으로 강해지는 것]
"그리고 그 변종 놈들을 멸종시켜서, 아직 알아내지 못한 것들도 내가 전부 가져야겠어."
가령 아직 미지에 싸여있는 파멸균 군체의 지휘개체라던가.
포식하고 진화하는 자들끼리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번 전투의 승자가 패자가 가진 모든걸 잡아먹고 모든걸 가진 뒤 더욱 강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