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군단VS군단(5)
"움직이자! 명령떨어졌다!"
"아니 일 틀어졌다며. 그래도 가는겁니까?"
"지금 전투는 끝났어. 대신 신속히 움직여!"
주둔지가 뒤집어졌다.
계획과는 달리, 강하고 신비로운 힘을 쓰는 적들에게 본대가 먼저 습격당했다.
들리는 소리로는 일단 습격을 막아내고 격퇴하는데는 성공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돌발상황 속에서 계획된 작전이 감행되었다.
계속 군단의 전쟁을 지켜보던 나는 누구보다 빨리 출발 준비를 마쳤다.
"솔직히 다시 봤어. 헌터라지만 어린데다 신입이라 거치적거릴까 걱정했는데."
"저도 좀 급해서."
동료 단원, 콕스가 장비를 챙기며 피식 웃었다.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지금 다른 것 생각할 필요 없이 급한게 사실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군단에게 위기를 타파할 힘을 줘야했다.
"전부 타! 출발한다!"
검은 뱀 용병들은 차량에 나누어탔다.
호위 대상은 에볼루션에서 일하는 연구원들이 탑승한 차량 하나.
마지막으로 타려는 때 내 눈에 우리와 마찬가지로 출동을 준비하는 한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도 연구원들이고, 호위하는 이들은 군인들이었다.
"아마 정부 기관에 소속된 사람들일걸."
총을 챙겨 옆자리에 앉은 콕스가 중얼거렸다.
[상황은 백중세다. 놈들의 시체는 분명 우리의 양분이 되나, 그만큼 소모값이 크다. 병력을 더 생산해서 찍어누르는 것도 힘들다]
"..."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도 나는 계속 어플을 사용해 눈 앞에 화면을 띄우고 확인했다.
'고작 마물 표본 몇개 더 넣어준다고 해결할 수 있을까?'
그러나 보면 볼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변종파멸균의 기세가 그만큼 거셌다.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그러면 군단이, 그것에서 알아서 답을 찾을 것이다]
내 생각이라도 읽었는지 글자가 떠올랐다.
물론 나도 군단을 믿는다. 하지만...
[그리고 군단은 격노하면서도, 동시에 기뻐하고 있다. 너도 이제는 잘 알지 않느냐. 위기는 곧 성장의 기회, 군단은 성장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전이라면 잘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도 분명히 성장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직접 알고있는만큼 군단이 가진 성장에 대한 집착도 이해할 수 있었다.
"조금 있으면 포인트에 도착한다! 다들 준비해!"
그때쯤, 무전기에서 로버트의 외침이 흘러나왔다.
"콕스, 얀. 포인트에 가서 자리 잡아. 스니키, 너는 헨슨과 반대로."
차에서 신속히 내린 용병들은 순식간에 정해진 자리로 이동했다.
연구원들도 빠르게 내려서 자기들 할 일을 시작했다.
나는 로버트와 함께 중앙에 붙어서, 유사시 행동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엉망이군."
로버트가 한마디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일대는 엉망이었다.
사망한 아군의 시신만 급히 수습해 후속에 맡기고, 적들의 시체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여기 저기 남아있는 탄흔과 핏자국등 전투의 흔적들.
나는 슬쩍 눈치를 보았다.
일단 보이는건 하급 마물 놀의 시체 뿐이었지만 어쨌든 표본. 어서 사진을 찍어야했다.
"음?"
"대장! 여기 와보시죠!"
그때 몇몇 단원들이 로버트를 호출했다.
기회다. 나는 슬쩍 휴대폰을 빼들어, 사진을 찍을 준비를 마쳤다.
널린게 시체였다. 나는 눈치를 한번 슥 보고 부숴진 전차 곁에 쓰러져 있는 놀의 시체를 사진으로 찍었다.
"분명 해괴한 기술을 쓰며 강해졌다는 언급은 있었지. 플레이어에게 받은 기술일거야. 하지만 우리가 얻을 수 있는건 그런 강함이 아니라 놀의 유전정보 뿐인데, 암만 생각해도 놀은 고블린급인데 효과가 있을까."
[아직 모른다.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단순히 그것뿐이라 생각하느냐]
내 혼잣말에 반응한 의미심장한 글귀가 떠올랐다.
거의 동시에. 과거에 비해서 날카롭게 단련된 내 감각에 무언가가 걸렸다.
소름끼치는 살기. 포식자의 살기였다.
"이런 젠장..! 전부 피해!!!"
땅이 뒤흔들리고, 로버트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땅에서 점프했다.
"크악..."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쾅 소리를 낸 땅이 폭발하듯 그대로 터져나오며, 무언가 거대한 것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기습이다!!"
"쏴 버려!"
총성이 울려퍼지며 찢어지는 것 같은 끔찍한 울음소리도 함께 들렸다.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땅을 부수고 튀어나온 거대한 짐승들이, 총을 쏘며 저항하는 이들을 향해 단번에 덤벼들었다
*
[받아라. 너의 플레이어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구해오는 것들이다. 그는 분명 평균적으로도 무능하고 미약한 존재였으나, 그 행보는 아니었다]
"크아아악!"
어둑한 공동에, 살아서 날뛰는 거대한 생명체 하나가 그대로 전송되었다.
덤프와 맞먹는 길쭉한 뱀과 같은 몸에, 억세고 튼튼한 두 손이 달려있었다.
놈의 전신은 단단한 청록색 골편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특히 유독 튼튼한 머리는 근거리에서 전차가 쏜 철갑탄을 맞아도 멀쩡할 정도였다.
"크륵..."
놈은 갑작스런 장소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당황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보이는건 바닥에서 반쯤 녹아가고 있는 놀의 시체 뿐이었다.
놈의 감각기관이 움찔거렸다.
사실 놈들의 무리는 땅에 스며든 대량의 핏물을 감지하고 먹이를 먹기 위해 땅 위로 튀어오른것 뿐이었다.
[땅 속에 사는 생물이라 그런지, 다시 땅을 파고들어가려 하고 있다]
놈은 억센 앞발과 발톱으로 땅을 뒤덮은 육벽을 파헤치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쓸만한 놈."
그때, 누군가 내는 소리를 감지한 놈이 으르렁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크기는 자기 머리만한 자그마한 생명체.
다만 당황스러운 점은, 예민한 감각기관에도 전혀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
"그럴수밖에. 이 둥지 전체가, 바로 '나'."
군단이 둥지를 움직였다.
꿈틀거리는 사방의 육벽에서 쏘아진 촉수들이, 단숨에 놈의 몸을 휘감았다.
[힘이 너무 강하다. 동일부피에서 내는 근육의 효율이 군단의 압축근육보다 더 폭발적이다]
"점점 탐이나."
버둥거리는 놈의 몸부림에 촉수들이 끊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조금 다른 촉수가 뿜어졌다.
마치, 나뭇가지를 닯은 것 같은 단단하고 거친 촉수.
"키이이..."
특별한 힘인 검붉은 기운을 머금은 이 촉수는 단숨에 놈의 단단한 갑주를 부수고 내부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내부에, 개량된 균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파멸균만이 학습하고 진화할 수 있는건 아니었다.
더욱더 악랄해진 변종파멸균에 맞서기 위해 군단도 스스로의 감염력을 강화시킨지 오래였다.
[역시 놈에게는 변종파멸균의 감염력을 카피한 독소에 견딜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내부 장기가 전부 파괴되고 유린당한 이세계의 괴물은 움직임을 멈추고 천천히 쓰러지더니 이내 완전히 바닥에 누워버렸다.
둥지는 이 거체의 적에게 점액을 뿌려대며, 아예 덮어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병사들이 생산될 때까지 시간을 끄는게 더 비효율적.'
둥지 한쪽, 시체가 얊은 육벽에 덮인 모양새가 마치 커다란 종양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사이 군단은 단숨에 계산을 끝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싸움을 더 끄는 것이, 차라리 에너지를 들이부어 즉시개량을 끝내는 것보다 손해라고.
[마계땅강아지: 11A1087]
군단은 분석이 끝나자마자 새로운 병력들의 개조에 착수하는 한편 과속성장이 가능한 만능세포를 투입해 즉석에서 개조에 들어갔다.
곧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자신을 덮고 있던 육벽을 찢으며 몸을 일으켰다.
어떤 이들에게는 마계라 불리던, 이세계의 단단하고 척박한 땅에 굴을 파고 살아가던 이 거대한 땅강아지는 이제는 더욱 단단해진 검은 갑주를 입고 붉은 안광을 번득이는 더한 괴수가 되어 있었다.
"가서, 놈들을 죽여라."
군단의 정신에 연결된 이 새로운 형태의 병사는 단숨에 땅을 부수고 길을 뚫으며 윗층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강력한 데이터를 손에 넣었다. 확실히, 다양한 세상에서 살아가던 이들을 분석하고 결합하면 더욱더 완전해질 수 있는 것 같았다]
"..."
[그가 걱정되느냐]
"그의 감정, 지금 매우 격동적이야."
군단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감정만 느껴도 그가 어떤 상태인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마계땅강아지는 유닛이 아닌 그곳의 토착생물이었다.
그덕에 한번은 사진찍기로 전송하여 위기를 넘겼지만, 현재 마계땅강아지를 분석한 군단은 놈들이 무리생활을 한다는걸 알고 있었다.
표본은 1종당 1번이 전부.
톤 단위의 몸무게를 가진 놈들이라 먹이로 전송하는 편법도 쓸 수 없었다.
[그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
"상관없어."
군단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아직, 아직은. 그가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꽤 여러 서적들을 읽으며 지식을 쌓았지만 인간이 쌓아 온 철학적 정수는 스스로가 인간과 다른 존재임을 잘 알고 있는 군단에게는 유의미한 변화를 주지 못했다.
"...또 호감을 느끼고 있어. 어째서."
다만 또다시 변하기 시작하는 그의 감정에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그는 격정적인 감정 끝에, 다시 두근거림을 느끼고 있었다.
군단에게 호의나 호감이라는 감정이 이성을 향한 것인지, 동성이나 동물, 또다른 상황등을 향한 것인지 정확히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이 신경쓰일 뿐.
군단은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가면은 여전하나, 이제는 전과 달리 길게 늘어뜨린 흑발이 부드럽게 찰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