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살아남기 위한 투쟁(2)
'대체.'
비명과 고성이 계속해서 울려퍼졌다.
'언제까지.'
전장의 뜨거운 열기가 식을줄 모르고 계속해서 터져나왔다.
그러나 분명 두 집단이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싸우는 전쟁에서, 그 비명과 고성은 어느 한쪽만의 것이었다.
"대체 너희는 무엇이냐!"
진땀을 흘리던 필릭스는 끝내 참지 못하고 외쳤다.
그 흔한 울부짖음조차 없다.
목을 베어도, 몸을 찔러도 마찬가지였다.
이 침묵의 군단은 조금의 소리도 망설임도 없이 그저 공격만을 반복했고, 그 기계같은 모습에 공포심을 느끼기 시작한 필릭스와 동족들은 조금씩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절대 지지 않는다. 뒤는 없다. 이곳에서 밀리면 우리의 패배다.'
하지만 그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서 이렇게 밀려 죽으려고 지금까지 버티고 희망을 찾아온게 아니었다.
"나리안님...!"
그의 얼굴을 스친 화살 하나가 적의 몸을 뚫었다.
마찬가지로 몸에 새긴 문양을 빛내며 강궁을 겨누고 있는 그녀를 보며, 그는 이를 악물었다.
"우리는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그의 외침에 다른 동족들 역시 사력을 다해 흔들리던 마음을 붙잡았다.
공포와 불안함을 이겨낼 수 있는 투지와 결의가 그들을 뭉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들의 플레이어 역시 그들을 도와주웠다.
하사품이 되는대로 쏟아졌다.
아직 미숙한 이들도 그것들을 잡고 화살을 쏘며 저항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것을 건 투쟁이다.'
단칼에 적의 목을 베어버린 필릭스가 대뜸 웃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지만, 그는 지금 그들이 그 어느때보다 강하다고 확신했다.
신목이 그에 화답했다.
그들과 공명하는 신목의 힘이 더더욱 증폭되었다.
"..."
군단은 군단병들을 뒤로 물렸다.
가면 속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특히 그들이 승리를 확신하며 기쁨의 환성을 지를때는 더더욱.
[그들의 격렬한 저항에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 하지만 그대로 몰아붙였다면 언젠가는 이겼을 것이다]
"효율."
군단이 내린 판단은 심플했다.
짜증과 분노와는 별개로, 이대로 병력을 퍼붓는다면 승리의 의미가 없을 정도로 손해가 막심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 해답은]
"끝없는 절망, 그리고 고통."
물론 군단은 이미 계획을 세워두었다.
목적은 오직 하나. 상대의 절멸.
이번 후퇴는 그저 그것을 위한 작전 중 하나였다.
"소모전을 통해 주어지는 계속되는 희망, 그러나 그 끝에 진정한 절망이 주어졌을 때. 그들의 투지는 무너진다."
군단은 이미 경험이 있었다.
타 플레이어의 유닛이었던 동굴땅쥐들과의 전쟁.
그때 역시 승리할 수 있었던 조건 중 하나는 패배가 느껴지자 절망과 공포에 물든 쥐들의 자멸이었다.
군단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렸다.
군단이 스스로 탐구하고 사고해서 새롭게 정의 내린 '절망'이라는 감정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내지른 공격이 압도적으로 찍어눌렸을때 나오는 것이었다.
그 무력감과 허탈함이 곧 절망으로 바뀔테니까.
[...네 뜻에 따라, 물러섰던 군단병들이 다시 한번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군단은 이미 상대를 죽여 그들이 유닛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그걸 모르는 것 같았다.
이빨과 발톱에 불과한 군단병을 아무리 죽여봤자, 카운트는 올라가지 않으니까.
"이런..! 또 온다!"
"막을 수 있어. 막을 수 있다고!"
가까스로 임시 바리게이트를 만든 그들은 또 다시 몰려오는 군단병들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그래도 지치고 힘들지언정 절망하고 주저앉지는 않았다.
오히려 힘겨운 사투 끝에 격퇴에 성공할수록 그들의 저항정신은 더 상승했다.
"큭...흐으윽.."
군단이 가스를 살포했다.
가스에는 파멸균을 베이스로 한 미세한 감염세포들이 탑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감염도 별 힘을 못쓰고 있었다.
최대한 짜내는 신목의 힘으로 강화되고 있는 그들의 몸에는, 소량의 감염세포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아..하..또! 이겼다!"
"하지만 로디슨이!"
그들은 다시 한번 군단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기뻐할 시간은 없었다.
피해자는 조금씩이지만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었고, 그들을 추모할 시간은 부족했다.
"으, 으아...또다! 또 온다!"
"이럴수가."
"모두 검을 들어!"
눈을 질끈 감은 필릭스가 다시 한번 검을 들었다.
막아도 막아도 끝이 없다.
저항정신과는 별개로, 동시에 지쳐가는 심신은 달랠 방법이 없었다.
"마음 굳게 먹어라. 언제가 끝은 온다!"
필릭스는 텀을 두고 몰아치는 끝없는 공격에 질려버린 동료들을 격려했다.
그렇게 사력을 다해 싸우던 그들은, 그 잎과 가지의 끝부터 서서히 말라가는 신목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저들의 다루는 힘은 저 중앙의 나무와 관련되어 있다. 저것이 저들의 형상력. 확실히 그 위력이 뛰어나다. 도시의 망령들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심지어 그들은 전투를 반복하며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걸었을까."
군단의 관심사는 하나였다.
그들이 자신들의 기력과 목숨을 비롯한 모든 것을 거는 바로 그 순간.
그 순간에 그것을 부숴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효율적으로 그들을 무너뜨릴 수 있을 테니까.
"더 짜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군단의 시야에는 사투를 벌이는 이들의 모습이 선명히 보이고 있었다.
동료들이 하나씩 죽을 때마다 그들은 분노를 태우며 극한의 상황까지 힘을 짜냈다.
[명령대로 군단병들이 다시 한번 물러섰다. 그들이 처절한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이것으로 그들은 총 32차례의 침공을 모두 막아내었고, 1369개체의 군단병을 죽였으며, 43명의 사망자를 내었다]
교환비는 30대 1에 가깝다.
하지만 하나하나의 가치가 다르다.
이번 전투에서 죽은 군단병은 이미 둥지에서 복구가 끝났다.
반면 달빛요정들의 전사들은 수십년 이상 육성된 이들이다.
적어도 그들이 이번 전투로 멸망할 때까지 복구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때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군단은 미리 파둔 함정을 향해 그들을 유인했다.
*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알고 있을텐데."
달빛 요정들을 공격할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는 사이.
군단은 강도연을 강제로 통제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큭..."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군단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미 본인도 알고 있기에.
[...그는 지금 자는 중이다]
"그렇다면 충분."
군단은 미리미리 착실하게 신우의 행동을 파악했다.
지금부터 할 일은 그의 동생에게 손을 대는 짓이니까.
물론 죽이거나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잠에서 깨어나 이곳을 살필때.
그는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나는..."
"네 스스로 알거야."
군단의 말에 그녀의 입이 다물어졌다.
"연민, 동정, 슬픔. 모두 군단에게는 해악을 끼치는 감정이다. 알고 있잖아. 너는 먹잇감을 향해 그런 감정을 품었지."
"그, 그렇지 않아."
"아니, 맞아. 우리는 하나야. 너는 내 일부야, 전부 다...볼 수 있어."
군단이 손의 세포를 증식시키고 분열시켜 손 위에 순식간에 무언가를 만들어 내었다.
자신이 쓰고 있는 검은 가면이었다.
"싫어..."
"자아는 계속 유지할 수 있게 해줄게. 대신 진정한 군단의 검이 되는거야."
생각 이상으로 과감하고 과격했다.
이미 계산을 마친 뒤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자비도 없이 강도연의 얼굴에 천천히 가면을 씌웠다.
기겁한 그녀는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할지 알고 있는데도 그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으극.."
얼굴 피부와 가면이 동화되어, 하나가 되기 시작했다.
가면은 단순히 얼굴을 가리는 용도가 아니었다.
군단의 통제를 받는 강도연의 세포들이 특정 작용을 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 없이 강제로 조작할 수 있었으나, 굳이 그녀에게 가면을 씌운 이유는 그것이냐]
"그러면 의미가 없어."
군단은 진심으로 그녀를 자신의 수족으로 부리고자 하였다.
발달하며 성찰한 결과, 자신에게도 번득이는 계기를 가져다 줄 변수는 필요했으니까.
그 변수는 바로 군단내의 또 다른 자아였다.
대신 그 자아를 유지시키면서도 군단의 사상에 완전히 동화시키고 충성시킬 방법을 찾아야했다.
"가서, 놈들을 죽여 군단장. 살육과 포식은 네게 쾌락을 줄테니까. 그것이 우리의 본질이야."
"..."
가면이 덮은 얼굴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던 강도연이 천천히 일어섰다.
가면은 어느새 몸 안으로 전부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가 전투에 돌입하는 순간.
가면은 언제든지 밖으로 나와 그녀에게 자신의 진정한 의무를 새겨줄 것이다.
[요정들이 천천히 밖으로 탐색을 나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우리가 놈들을 포기했다고 오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리석게도]
"대체 당신은 왜, 그가 아니라 내게 협력하지?"
[...무슨 말이지?]
"당신은 양측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관조자, 플레이어와 유닛 사이에서 마음만 먹으면 어느 한쪽 편을 드는건 쉬울텐데."
새롭게 다듬어진 강도연을 비롯한 군단병들이 몰려간 사이.
군단은 갑작스럽게 본질적인 물음을 던졌다.
[그건 네 알 바가 아니다]
"...그래?"
선이 그어졌다.
그러나 군단은 이미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그 이후 들려오는 목소리는 없었지만 군단은 신경쓰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자신에게는 해가 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들의 모든 희망을 꺾어버려.'
그러는 사이 강도연과 군단병들이 적들과 마주쳤다.
사기를 충전하고 모든 힘을 짜내서 활로를 뚫으려는 그들에게, 군단은 계획한 절망을 보여주기 위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