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군단의 보은(5)
[35층계를 점령하고, 또다시 한걸음 내딛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챕터 3이다. 화면을 봐라, 추가로 생성되는 기능을 알려주겠다]
나는 어플을 확인했다.
이제 허전하던 화면에 다양한 인터페이스가 꽉꽉 눌러 담겼다.
"이건 뭐지?"
[그것을 눌러봐라. 그것은 상점이다. 모든 플레이어가 공통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 상점]
나는 새로 생긴 아이콘을 터치했다.
말대로 이것은 다양한 물건을 파는 상점이었다.
내 눈에 [척살권: 500G(2회제한)]이 보였다.
튜토리얼 보상으로 선택 가능했던게 1천 골드.
그걸 선택하고 꾹 참아왔으면 지금 시점에 척살권이 2개라.
물론 버티지도 못하고 죽어버릴 확률도 컸을 것이다.
"덕분에 지금 내 골드는 0이군. 골드를 어떻게 벌지?"
[골드를 얻는 방법은 단 한가지다. 상대 유닛을, 플레이어를 죽이는 것]
"...뭐?"
동시에 분명 0이었던 내 골드가 주르륵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올라가던 골드는, 정확히 100G에서 멈췄다.
[우리가 지난번에 승리했던 그 쥐들. 어플은 그 가치를 고작 100G라고 판단했다]
척살권의 1/5 수준의 가치.
내 눈이 가라앉았다.
지독히 냉정하고 칼같다.
한때 꿈과 희망을 가지고 번성하고 발전하던 하나의 종이 남김 없이 절멸했으나, 남은건 아무것도 없었다.
[현실이다. 어플이 없었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것도 맞는 말이네."
나는 피식 웃었다.
[비록 100G 뿐이지만, 도움 될만한 물건은 충분히 구할 수 있을거다]
나는 상점의 물건들을 살폈다.
아무래도 챕터 3에서 내게 도움이 될거라고 언급한건 상점의 물건들이 맞는 것 같았다.
"플레이어용이랑, 유닛용이 모두 있네."
[모두 게임에 변수를 만들 수 있는 것들이다]
나는 진지하게 물건들을 고민했다.
잘 선택해야 한다.
지금 가진 돈으로는 하나정도밖에 못산다.
차지연에게 내 능력을 증명하고 함께 하려면 지금의 내게 도움되는걸 사야했다.
"이건 어때."
딱 100G, 나는 조건에 부합해 보이는 물건을 하나 골랐다.
찰랑이는 투명한 액체가 병 안에 담겨있었다.
소모품이라는게 제일 거슬렸지만, 그래도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물건이었다.
[선택은 네 몫이다. 물건이 선택되었다. 골드를 써서, 너는 '달빛격노'를 손에 넣었다]
달빛 격노.
설명만 들으면, 짧은 시간 달빛 아래서 뛰어난 피지컬을 지닌 월하 늑대의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물건이었다.
"이거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지?"
[아마 그게 맞을 것이다. 지금 네가 구매한 달빛 격노, 그것은 분명 어딘가 언젠가 존재하는 종족의 종족특성이다]
순간 숨을 들이켰다.
이 상점, 정말 별걸 다 팔고 있었다.
*
"오빠. 거기 있지?"
"그렇다고 전해줘."
"후."
준비를 마친 강도연이 내 말을 전해들었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준비란 별게 아니었다.
우리가 35층계 이상. 천장에 뚫린 저 거대한 구멍을 기어 올라가는 것.
[당연하게도, 군단은 정찰병을 먼저 파견했다]
비행이 가능하고 기동력이 좋은 정찰병들이 허공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사이즈에는 놈들이 반응하지 않았다.
저 위에 만약 또 놈들이 있다면, 이번에도 괜찮을 것이다.
"화면 전환해봐. 어떻지?"
[이것도 흥미로운 결과로군]
의미심장한 글과 함께 화면이 바뀌었다.
지금 군단이 집중하고 있는 화면을 나도 볼 수 있었다.
[평범한 동굴. 하지만 넓다]
"...마을? 아니 도시인가?"
내가 보기에는 쭉 늘어져 있는 것들은 일종의 주거시설로 보였다.
광장으로 보이는 곳도 있었고, 요새로 보이는 곳도 있었다.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강도연도 너와 비슷한 결론을 내렸고, 군단은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곳은 특정 종족이 살아가던 그들의 둥지다. 그 양식과, 곳곳에 새겨진 문양과 글귀등이 35층계의 구조물과 일치하는게 그 증거 중 하나였다]
"지하속에서 살아가던 이들일 수 있겠지. 그럼 대체 35층의 구조물은, 그곳을 지키던 미라들은, 그곳으로 이어지는 이 구덩이는 뭔데?"
나는 머리를 긁었다.
아직 이곳이 뭐하는 곳인지 어디인지 제대로 알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이곳은 36층계...그리고 37층계로 가는 통로를 발견했다]
그때쯤 정찰병들이 다음 층계로 향하는 통로를 발견했다.
[그러나 이곳은 알 수 없는 힘으로 봉인되었다]
"되는게 없네."
정찰병은 그곳을 통과하지 못했다.
마치 지난날 작은 가지에서 처음으로 큰 가지, 대층계에 발디딜 때 막아서던 거미들의 거미줄 같았다.
"결국 다 때려 부수면 된다는거 아냐."
"그래도 뭔지를 알아야 대처가 가능해."
"지금은 방법이 없잖아."
강도연은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군단 역시 같은 생각이다]
군단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개가 달린 비행종들이 가장 먼저 허공을 가로질러 구멍을 통과했다.
[이번에도다. 그 원한을 알 수 없는 망령들이 다시 한번 우리의 앞길을 막아선다. 군단은 시간을 끌 생각이 없다. 전병력에 진군 명령이 내려졌다]
비행종들이 처음으로 36층계에 도달했을 때.
분명 쥐죽은 듯 조용했던 이 지하 도시가, 괴성과 함께 요동쳤다.
35층계에서 봤던 이성 잃은 시체들.
그들이 온 몸에 그려진 문양에서 빛을 뿜으며 집과 건물등에서 뛰쳐 나왔다.
[상당히 짜증나는 놈들이다. 먹어도 알 수 없고, 영양분도 적으며, 무엇보다 놈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정체불명의 힘은 아직 우리가 모르는 힘이었다]
"뭔가...있긴 해."
군단의 비행종들과 충돌하는 놈들을 보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밑층계에서 만난 놈들은 분명 무장한 신체 건장한 전사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분명 무기를 든 전사들이 중간중간 섞여 있었지만 대다수는 전사가 아니었다.
농기구로 추정되는 도구를 든 이들, 아예 맨손인 이들.
거기다 허리가 굽은 노인, 아직 작달막한 아이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던거지.'
구멍을 기어 올라온 강도연이 다른 군단병들과 함께 땅을 박차고 검과 주먹을 휘두르는걸 보는 내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숫자는 더 많아도, 별거 없는데."
그리고 단칼에 적의 몸을 반으로 갈라버린 녀석이 세상 환하게 웃는 것도 내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흐름. 분명 흐름이 있어."
격렬한 전장의 한복판.
강도연은 자신의 검에 꿰여 무력화된 상대를 걷어차고 중얼거렸다.
망령들은 구덩이에서 정말 끝도 없이 기어올라는 검은 물결을 상대로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 행위에 망설임은 없다.
마치 프로그래밍된 기계 같다.
"그럼 그 프로그래밍은 누가?"
강도연의 눈이 붉은 안광으로 번득였다.
군단은 이미 한번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힘을 경험한 적 있었다.
레이스, 그리고 수호정령의 우두머리인 나방을 통해 영혼의 존재를 깨닫고 일부나마 알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니 그와 비슷한 무언가를 느끼는건 불가능한게 아니었다.
"저기. 저곳이다. 도시의 끝."
강도연이 손으로 정 반대편. 공동의 끝이자 커다란 구조물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곳을 향해 커다란 말이나 황소만한 크기를 가진 돌격형 병사들이 이를 드러내고 내달렸다.
그들은 질량과 근육량을 바탕으로한 강력한 힘으로 저항하는 망령들을 말그대로 짓밟았다.
선두에 선것은 지룡과 동굴 멧돼지를 베이스로 한 단단한 머리갑주와 강한 턱힘을 가진 군단병.
놈은 크고 단단한 머리를 휘둘러 망령하나를 쳐버렸다.
[새로운 적의 등장이다]
그러나 그 순간.
커다란 군단병의 목이 말 그대로 반으로 갈렸다.
그것을 가능케한 것은 검을 든 하나의 사내.
다른 망령들 처럼 전신에 문양을 그리고 있는 그는, 은은하게 빛나는 푸른 검을 들고 건물 앞을 지키고 섰다.
그 뒤로 그와 같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두른 전사 수십이 나타나 건물을 지켰다.
[우리가 제대로 짚었다. 저놈들이 지키고 있는 곳에 단서가 있다]
군단의 시선도 그곳으로 향했다.
입을 굳게 담은 강도연이 앞으로 나섰다.
군단이 자신에게 투자한 대량의 에너지는 이럴때를 대비해서 준 것이다.
[군단에서 가장 튼튼히 만든 돌격형 병사의 갑주를 단번에 베어버렸다. 이는 만능형 병사의 방어력으로는 견디지 못한다는 뜻. 동시에 우리가 갑각으로 벼린 검 역시 부딪히는 순간 베인다는 뜻이었다]
"그럼 어떻게 싸워야 할까."
희미하게 웃은 강도연은 전신의 세포를 이용, 감각을 극대화했다.
시각, 청각 촉각 같은 오감뿐 아니라 균형감각이나 반사신경 같은 내부 신경도 자율적으로 조작했다.
"크힛..."
거기에 기존에는 없던 동굴 생물들 특유의 감각기관까지 추가로 몸에 생겨났다.
미세한 진동을 감지하는 기관, 미세한 전자파를 감지하는 기관 등등.
감각을 확장한 그녀의 눈이 풀리더니 몸이 덜덜 떨렸다.
순식간에 부풀어버린 감각들로 너무 많은 정보가 머리에 흘러들어 과부하가 생긴 것.
그러나 거기서 그녀와 하나의 정신을 공유하는 군단의 군체의식이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