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군단의 보은(4)
테세우스의 배. 변화와 지속성에 대한 난제.
기존에 나를 이루고 있는 몸이 세포단위로 하나씩 갈아치워지고 있다.
그 기능과 외형은 분명 전과 똑같다.
그렇다면 모든 세포들이 완전히 바뀌었을 때 그것은 나인가? 하는게, 지금 강도연이 느끼는 기묘하고 소름끼치는 이질감 중 하나였다.
[그 이질감을 견디지 못한다면, 네 정신은 이대로 무너질 것이다]
그녀의 귀에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그동안 군단이 지겹게 들어 온, 그러나 군단은 이해할 수 없었던 목소리.
그 목소리는 중후한 남성의 목소리였으나 어딘가 상처 입은 듯 긁히는 부분이 섞여 있었다.
[너는 누구냐]
'나...나는...'
태아처럼 몸을 말고 있던 그녀가 얼굴을 찌푸렸다.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에 너무나 많은 정보가 흘러들었다.
인간의 작은 뇌로는 버틸 수 없는 군단의 지식.
그래서 군단은 그녀에게 향하는 정보는 적절히 통제했다.
이 정보의 통제로, 그녀는 군단 내에서 가장 강한 자아를 가졌으나 서열은 2위로 밀리게 되었다.
'나는 강도연. 나는 그냥 나야.'
[그게 전부인가?]
'그리고, 군단의...일부.'
그녀는 정신력으로 이질감을 이겨내었다.
자아를 잃지 않는데 성공했다.
마지막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팔다리를 토막내고, 끝내 반죽음에 이르게 한 푸른 슈트의 붉은 십자눈을.
'개자식.'
분노가 끓었다.
그러나 그 분노는 그녀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 분노에, 군단 전체가 동조했다.
군단의 둥지로 뒤덮인 일대가 진동할 정도였다.
[최초의 존재가 탄생하였다. 이것이 군단의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동시에 그녀가 들어있던 둥지의 육벽에 쩍 하고 금이갔다.
갈라진 틈 사이로 빛이 들어오며, 점액이 밖으로 뿜어졌다.
"크흡.. 케헥..."
그녀는 그대로 휩쓸려 바깥으로 쏟아져내렸다.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쉬며, 폐로 공기를 받았다.
"으..."
흐릿한 시야, 바닥에 깔린 둥지의 육벽을 딛고 일어선 그녀가 비틀거렸다.
이질감은 극복하더라도 여전히 몸에 남아있었다.
자신의 몸이 아닌 것 같은 느낌.
하지만 이를 악문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마음이 안정되니 몸은 빠르게 적응을 마쳐갔다.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겠느냐]
"그래. 안다고 어...아저씨."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그녀가 피식 웃었다.
군단은 정보를 통제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발달한 뇌를 가진 유일한 개체인 강도연을 적극적으로 효율적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니 모를리가 없었다.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왜 이런 상태인지, 군단이 무엇이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개같은 놈들한테 분노하고 있어. 근데 나 때문에 분노하는건 아니야. 그렇지? 너에게 나는 그냥 개체 1일 뿐. 너는 그저 오빠가 슬퍼하니까, 화내니까 화내는거잖아."
그녀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평범한 소녀가 본다면 비명을 지를 기괴하고 징그러운 둥지와 군단병들의 모습에도, 지금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라는 것도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그녀에게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가자."
점점 위로 향하는 그녀의 뒤를 따라, 대기하던 군단병들이 움직였다.
그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35층계를 완벽히 점령하기 위한 행군이었다.
선두에 선 강도연의 얼굴에 두려움이나, 의문은 없었다.
[너도, 우리도, 군단이다]
그녀도 결국 군단의 일부.
목숨을 구명 받는 대가로 그녀는 군단과 하나가 되었다.
'그러니까 전쟁은, 싸움은 나의 의무야.'
이유 같은건 없었다.
전쟁과 포식은 군단의 존재의의였으니까.
"대체 뭘까? 내가 보기엔 어...마치 창작물에 나오는 엘프 같이 생겼어. 징그럽게 창백한 시체들이지만. 대체 무슨 구조물이지? 신전? 사원인가?"
강도연은 군단병들을 이끌고 35층계에 도달했다.
그녀를 통해서, 군단은 처음으로 35층계의 적들에 대해 구체적인 평가를 내렸다.
[놈들이 다시 한번 우리에게 덤벼들었다. 지난번처럼, 놈들의 몸에 걸린 문양이 빛나기 시작했다]
역시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수호병들에게 군단이 대응했다.
군단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리매치에서 진적이 없었다.
언제나 두번째 공격에는 더 강하고, 더 참신한 전력과 전술을 동원했다.
"으극..."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뛰쳐나가는 군단병들을 두고, 비틀거린 강도연이 눈을 부릅뜨고 파들거렸다.
[익숙해져라. 군단은 특별한 개체에게, 특별한 힘을 주었다. 군단의 또다른 종족특성인 과속성장. 그것을 응용한 것이다. 비효율의 극치지만 투자할 가치가 있는 개체였다]
"아윽...아아악!"
강도연이 몸이 뒤틀리고 재구성되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그녀의 몸 전체가 뒤바뀌기 시작했다.
골격이 급격히 바뀌고 변이를 일으키는 전신의 피부는 검은 가죽과 갑각으로 덮이기 시작했다.
근육이 재배치되고 신경이 뒤틀렸다.
결과적으로 목 위를 제외하곤 몸이 완전히 바뀌었다.
검은 슈트를 입은 듯한 그 모습은 다른 만능형 군단병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캬아악!"
고통을 삼키며 헐떡이던 그녀를 향해 적이 창을 들고 뛰어들었다.
그녀가 숙였던 고개를 쳐들었다.
어느새 붉게 번득이는 눈을 한 그녀가 이를 악물고 적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군단이 만든 압축 근육을 한계까지 눌러담은 초인적인 각력이 폭발했다.
"진짜 드럽게 아프네..."
충격파가 뿜어지며 창이 부러진 적의 상반신이 펑하고 터져나갔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서, 자신의 세포를 변형시킨 검을 뽑아들었다.
속에서 분노가 끓었다.
그녀와 공명하는 군단 전체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강렬한 분노는, 적들을 찍어 누르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단번에 땅을 도약해 군단병 하나와 힘겨루기를 하던 적의 몸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분명 군단의 병종 구성과 규모는 전과 똑같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달랐다.
군단은 삽시간에 적들을 몰아붙여 거의 전멸시키기 시작했다.
발달한 뇌와 강도연의 등장으로 군체의식은 더욱 빠르고 조밀해지고, 배우게된 뜨거운 분노는 광기가 되어 적을 베고 또 베었다.
주술로 움직이는 이성 없는 시체?
분명 죽음도 불사하는 훌륭한 경호원들이었으나,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적들이 쓰러졌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저 위로 향해야 한다]
"...대체 뭐하는데야 여기?"
검을 집어넣은 강도연이 천장에 뚫린 거대한 구멍을 보며 중얼거렸다.
*
"엄마는 괜찮아? 솔직하게 말했어?"
"...내가 반드시 살아온다고 말씀드렸어."
"정말이지? 근데 나 지구로 돌아갈 순 있는거야?"
녀석이 허공을 보며 말했다.
액정 너머에 있는 나를. 물론 시점은 전혀 안맞았지만.
"분명 방법이 있을거야."
"내 생각엔, 분명 금방 갈 수 있을거 같아."
내 마음과는 달리 강도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녀석의 몸은 여전히 그 상태였다.
비슷하긴 하지만 분명 인간이 아닌 상태였다.
여성형 군단병 같은 저 모습 자체가, 너무나 어색했다.
[이제 전할 말이 없느냐?]
"아니. 그건 아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내 말은 나레이션이, 동생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녀석이 전해주고 있었다.
"내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야. 오빠는 모르겠지만, 군단과 직접 연결된 나는 알아. 진짜...대단해. 우릴 공격한 그 이상한 깡통 따위, 지금이면 한주먹에 찢어 죽일 수 있어."
녀석은 자기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치 건틀릿을 낀 것 같은,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나 있는 손이었다.
"그래. 맞아. 하지만 우리는 일단 그 미궁부터 벗어나야해."
"내가 보기에 여긴 무슨 고대의 유적 같아. 우리에게 덤벼들던 놈들, 마치 여길 지키려는 것 처럼 행동하던데. 근데 크기만 컸지 진짜 별거 없네."
강도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35층계를 돌아다니며 조사했다.
다른 층계와는 달리 척박한 동굴 그 자체인 이곳.
현재 둥지의 씨앗이 심어져 영역을 넓히고 있지만 소화시킬게 별로 없을 정도였다.
[군단은 잠시 재정비 시간을 갖기로 했다. 손실된 병력을 보충하고 저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 우선 이곳을 완전히 둥지로 만들려는 것이다]
둥지는 군단병들을 생산하고 동시에 그들에게 영양분을 주입하는 필수적인 공간이었다.
효율을 추구한다면, 아무리 군단병이라도 소모품처럼 쏟아붓는건 어리석었다.
"으으...진짜 싫어."
동생에게도 둥지에서 촉수가 하나 흘러갔다.
촉수가 요추 부분에 꽂히자, 녀석은 몸을 부르르 떨며 연신 투덜거렸다.
"음식을 보낼 수 있어. 지금도 꾸준히 사서 보내거든."
"됐어. 어차피 지금 몸엔 소화기관도 없고, 무엇보다 내 소화기관으로 소화하는 것보다 이렇게 먹는게 더 효율적이야."
"...빵도 싫어?"
순간 녀석의 귀가 쫑긋거렸다.
피식 웃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라도...해주고 싶었다.
"저기! 지금 듣고 있지?! 싸우는건 여기서 다 할테니까 그냥 짱박혀 있어! 차지연씨 곁에 딱 붙어 있어!"
"...알겠다고 전해줘."
[좋다]
나는 쓰게 웃었다.
강도연은 군단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녀석의 생각이 항상 군단과 일치하는건 아니었다.
상위종은 당연히 군단이었다.
동생은 나를 걱정하고, 그렇기에 안전히 숨기를 바란다.
하지만 군단은 아니다.
군단은 나를 걱정하고, 그렇기에 내가 더욱 더 강해지길 원한다.
이젠 나도 알 수 있었다. 군단만 내 감정을 헤아리는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