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그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5)
어플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영혼의 끈은 플레이어게도, 유닛에게도 매우 중요했다.
차원의 벽 너머에 있는 그들을 이심동체로 만들어 주는건 물론이고 서로에게 강한 영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비록 유닛의 경우, 한가닥의 스트링을 다른 유닛들과 함께 나누어야 했기에 미약했지만 플레이어는 달랐다.
실제로 자신의 능력으로,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플레이어도 있었으니까.
"이건..."
[플레이어의 주술을 도와줄 매개다. 전투의 순간에 사용해라. 두려움을 잊고, 네 혼에 새겨진 잠재력을 폭발시킬 수 있는 물건이다]
차지연은 하사품을 받았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투명한 물약이었다.
"이젠 우리를 약쟁이로 만들 생각인가봐."
곁에 있던 건장한 백인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동료인 그 역시 그녀와 같은 유닛.
마찬가지로 물약을 받은 상태였다.
[짧은 시간 안에 놈들의 본거지를 궤멸시키는게 목적이다]
이미 날짜가 잡혔다.
그들은 최근 사태에 경각심을 느끼고 함께 협력하기로 결정한 여러 국가의 연합군과 함께 게이트를 너머, 지구로 자꾸만 약탈전을 벌이는 마물들의 본거지를 칠 생각이었다.
"말 그대로 전쟁이지. 후...설마하니 마물들과 전쟁을 벌이게 될 줄이야."
"익숙해져야해 크리스. 앞으로 몇번이나 반복될지 알 수 없어."
"전쟁에 익숙해지는게 쉽겠어? 단순한 방어전 따위가 아니잖아."
그는 코웃음을 쳤다.
틀린말은 아니었다.
차지연 본인도 억지로 마음을 다잡는 것 뿐이었으니까.
[혼이 연결되어 있다는건 굉장한 것이다. 그 두려움, 그 망설임. 물약을 통해 너희가 어떤 존재와 연결되어 있는지 알아차린다면 모두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목소리가 마치 그녀의 불안함을 눈치라도 챈듯 머리에 울려퍼졌다.
'연결.'
그녀는 오히려 그 워딩을 탐탁찮아했다.
비록 그녀는 그 스트링을 백명이 넘는 동료와 나누어 받고 있지만 마치 자신의 가장 은밀한 부분마저도 보이고 있는 것 같기에.
[느껴지는가]
그런 마당이니, 평범하게 갈라지지 않고 하나의 스트링으로 연결된 유이한 존재들이 서로에게 받는 느낌은 더욱더 강력했다.
[그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 이제는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이 무엇인지 이해한 군단은 쏟아지는 정보를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스트링, 즉 영혼의 연결을 통해 쏟아지는 가장 큰 정보는 바로 상대편의 감정이었다.
갈라지지 않은 하나의 끈이기에 더더욱.
[그는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소중한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아직도 약한 자신을 탓하고 있다. 그는 너무나 약하다...몸도, 마음도]
군단 전체가 움찔거렸다.
그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가 처한 처지를 유추해냈다.
[어쨌든 그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다. 그가 없으면 우리는 더 강해질 수 없다. 그는 우리의 부모다]
[그러니 우리가 도와야 한다]
[그 방법은, 우선 더 강해지는 것이다]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그가 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더 많은 의미를 찾아낼 수 있었다.
마침내 그가 자신들을 '위해서' 먹이와 표본을 제공했다는 것까지 생각이 닿자, 군단은 그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바꾸었다.
[그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었지. 반대로 우리가 그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지속된 사고 끝에 군단의 생각은 여기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기다렸다는 듯 기능 하나가 활성화 되었다.
[너의 의지를 확인했다. 제물 기능을 활성화 하겠다]
어둑한 둥지에 빛나는 문양이 하나 생성되었다.
무엇을 주어야 할까.
군단은 눈치를 보는듯 움찔거리더니 처음엔 슬금슬금 자신의 촉수를 내어주었다.
문양 위에 작은 촉수가 턱하니 올라갔다.
[더 알아보아라. 살아있는 것은 제물 기능으로 전송이 불가능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게 머쓱했는지 촉수가 슬그머니 치워졌다.
촉수가 실패하자 군단은 더 많은 것을 시도해 보았다.
각종 군단병, 둥지의 조각, 알 등등.
그리고 마침내 무언가를 전송시키는데 성공했다.
빛이 번쩍이더니, 물건이 올려져 있던 문양이 통째로 사라졌다.
*
"으으윽."
아침. 나는 몸을 마구 비틀며 기지개를 피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몽사몽인 채로 침대에 앉았다.
세수를 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요즘 피곤해서 그런가 몸이 무거웠지만 마침 침대 옆에 있던 손잡이를 잡고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손잡이?"
순간 움찔한 나는 손에 쥔 것을 더듬거렸다.
침대 옆에 자리한 반질반질한 돌 같은 무언가.
원래 이런거 없었는데.
"으아아아악!"
나는 그것을 확인하고 기겁해 엉덩방아를 찧었다.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야 당연히, 그동안 화면으로나 보던 것이 내 앞에 꽂혀 있었으니까.
"이게 뭐지 대체?!"
[군단이 네 은혜에 보답한 것이지]
나는 어플을 키고 소리쳤다.
나타나는 답장에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게, 보답이라고."
나는 이 전셋집 바닥에 박혀 있던 그것을 뽑아내었다.
검이었다.
군단이 가장 단단한 갑각을 가장 단단한 방식으로 만들고 벼려낸 물건.
[네게 바치는 제물이다]
흑요석 같이 번득이는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어떻게 된건데?"
[...그야 군단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것이다]
"정말 그게 전부야? 그 나방이 대체 뭐였는데?"
[나방은 일종의 단서였지. 놈을 분해흡수하면서 얻은 그 단서로, 군단은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더욱 성장했다. 가령 섬광의 형태로 뿜어진 놈의 공격은 우리의 지배체계를 흐트러트리는 힘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영혼에 간섭하는, 그와 관련된 힘이라고 결론내렸다]
"어떻게 성장했길래 내게 이걸 보내준거지?"
쓰게 웃은 나는 검을 들고 자세히 살폈다.
통짜로 된 일종의 갑각인 이것은 묵직하고, 그리고 날카로웠다.
"그래도 이렇게 받으니까, 뭘 더 주고 싶은데 지금은 딱히 건덕지가 없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미...군단은 많은 것을 받고 있다]
"받고 있다고?"
오늘따라 녀석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일단은 검을 구석에 숨겼다.
강도연은 모를까 어머니 눈에 띄어서 좋을게 없다.
"이 일상이 얼마나 갈지 모르겠네."
나는 방을 나왔다.
오늘도 일단 이렇게 일상을 시작하고 있지만, 이제는 직접 습격을 겪어 본 나는 아직도 불안했다.
[수호정령들의 표본을 분석한 결과, 군단은 특이점을 발견했다]
"특이점?"
[그동안 왜 놈들이 특이한 행동을 벌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놈들은, 인위적으로 각인된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수호정령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생명체라면.
대체 이 미궁은 뭐란 말인가.
"그, 그게 전부야?"
[현재 알 수 있는건 유전자에 조작이 가해졌다는 것 정도. 하지만 그 조작 내용은 그간 놈들이 보여준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유추할 수 있다]
"대체 어떤 이들이?"
[그 해답은 역시 위에 있겠지]
그래. 위에 있겠지.
화면이 위로 돌아갔다.
그 다음 줄기로 향하는 통로였다.
내 가슴이 갑자기 두근거렸다.
갑자기 왜 이러지? 물론 점점 미궁의 비밀에 가까워지는 것 같아서 두근거리는 것일 수도 있고.
[군단이 다시 집결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장점 중 하나는 휴식 따위 필요 없다는 것이다]
군단은 새롭게 점령한 층계의 많은 식생들을 고의로 남겨두었다.
뭐든지 먹어치우던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예비용 식량일 수도 있고, 소화시키는 시간조차 아까워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수호정령이 없군. 아무래도 지난번 전투에서 전부 죽은 모양이다]
긴장한 것 치고는 시시한 결말이었다.
그냥 평범한 식생이 펼쳐져 있었다.
군단의 정찰병들은 서둘러 퍼져나가며 각종 공동과 통로들을 뒤지고 다녔다.
[아아, 이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그때.
선두를 달리던 정찰병이 무언가를 발견한 것 같았다.
"절대 자연적인게 아니네? 그렇다면 뭘까. 이 미궁에서, 우리 말고 자연적이지 않은 놈들은."
[당연히 수호정령들의 짓이겠지. 시간이 꽤 지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가지'로 분류되는 대층계의 한쪽에 모아둔 일종의 유해와 같은 것들이었다.
대부분이 스캐빈저들에 의해 분해되고 썩어간지 오래였다.
크기는 사람 손바닥만한...일단 척추동물이었다.
[훼손된 정도가 유전자 표본을 알 수 없을 정도다. 군단은 이 정보를 토대로 합리적인 의심을 도출했다]
"...유닛이라고?"
이정도는 나도 알 수 있었다.
지난번 만난 쥐새끼들 이후 또 다른 흔적을 찾았다.
다만 재수가 없었던 것인지, 이들은 그리 발전하지 못하고 몰살 당한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지난번에 도망친 쥐들은 살아났는지 모르겠네."
[지금껏 우리가 점령해 온 구간에 없다는 건, 더 높은 곳에서 새출발을 했다는 뜻. 아마 높은 확률로 재도약에 실패했을 수도 있다]
"맞아."
수호정령들은 물론 점점 더 다양해지고 거대해지는 동식물들의 수준이 하층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우리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고도화되었는데, 그 쥐들이 그때 수준으로 이런 곳에 떨어졌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더 올라가야 한다]
의구심만 커져갔다.
그래서 대충 파악을 마친 군단은 정찰병을 곧바로 다음 층계로 올려보냈다.
무언가 희미한 변화가 관측되는게 그곳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