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휴대폰에서 군단이 자란다-26화 (26/254)

26화-그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2)

"...보안에 대해서는 각자 생각하시는게 좋을 것이고, 우선은 이번 의뢰에 대해 더 말씀드리죠."

"결국 죽여달라는 것 아닙니까?"

박준석이 피식거렸다.

하긴, 애초에 이 게임에서 한번 적이라 생각되면 취할 수 있는 스탠스는 하나뿐이다.

바로 죽이는 것.

몇명이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맞습니다. 한국엔 저 혼자뿐이라 더더욱 활동이 제한됩니다. 그래도 제 플레이어가 말하길, 이것은 거래라고 했습니다."

차지연이 가방에서 또 다른 무언가를 꺼내보였다.

은은히 빛나는 푸른 물약이 든 작은 플라스크였다.

"이건 하사품 중 하나입니다. 연금술로 만들어진 귀한 약이라고 들었죠. 그 효능은 치유입니다. 그 어떤 병도, 상처도 치료할 수 있는 사실상 또 하나의 목숨."

"즈, 증명 된겁니까?"

"적어도 저는 그 효능을 실제로 봤습니다."

박준석의 말에 차지연은 스스로의 손에 생채기를 내 피를 흘린 뒤, 그 약을 아주 조금 부었다.

그러자 상처는 씻은 듯이 나아버렸다.

마치 극히 희귀한 치유계 헌터들이 보여주는 기적과 같았다.

"좋아. 그 의뢰 받아들이죠. 먼저 하면 되는거 아닌가?"

"엑.."

오윤아가 쉽사리 결론 내리지 못한 사이, 박준석이 믿는 구석이 있는지 먼저 나섰다.

"맞습니다."

차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엄마...아아악!"

미팅이 끝난 이후 오윤아는 부모님한테 붙잡혀 끌려갔다.

하긴 아무리 당연하다 생각해 봐도, 살인이란건 절대 가볍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냥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

"맞아. 나도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어. 그렇다고 도망쳐서 숨어살 수도 없고."

울적함이 느껴지는 동생의 말을 부정하진 않았다.

우리만 움직이는게 아닐것이다.

어쩌면 다른 이들도 우리 목숨을 노리고 있을 수 있다.

차지연이 우리를 이용해 그 아줌마를 죽이자고 결정한 것 처럼.

보니까 무슨 신묘한 재주를 가진 존재들이 우리 정체를 간파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또 사고가 크게 났나."

휴대폰으로 뉴스속보를 확인한 나는 마음을 먹었다.

지난번엔 고블린이라더니 이번엔 오크다. 분명 북미에 나타났던 놈들과 같은 놈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난장판을 피우고 있는 그놈들을 찾아가 시체라도 건질 생각이었다.

"위험하잖아."

"감수해야지."

나는 걱정 가득한 얼굴인 강도연을 집으로 보냈다.

그리고 혼자서 택시에 몸을 실었다.

현장에선 아직도 전투중이다.

그 아수라장에 뒤늦게 도착하면 수습하는 곳에 끼어들어 뭐라도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군단도 네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확신하는 것 같네? 대체 뭘 믿고."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나]

행동으로 보여준다라.

나는 화면을 확인했다.

군단은 쉬지 않고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군단의 집단전술은 점점 발달하고 있다. 경험을 통한 학습은 계속해서 쌓여간다. 단순히 유전자에 각인된 전술은 한계가 있으니까. 하지만 학습을 통해 발달시키는 것에는 한계가 없다]

뇌를 키우는게 해답이었다.

스스로 사고하고 연구하기 시작한 군단의 성장세가 무섭다.

[군단이 전체적인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했다.지금처럼 주먹구구식으로 병사를 양산하는게 아닌 정해진 쓰임과 용도에 맞는 최적의 효율로 새로운 병력을 생산한다]

"..."

이제 더 이상 '짐승'을 베이스로 두고 약간의 개조와 결합을 거치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았다.

말그대로 새로운 생명체였다.

새로 만들어진 병사가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전체적인 형태는 지난번 흡수한 수호정령인 검치호를 닯았다.

하지만 튼튼하게 발달한 앞다리 끝은 거칠고 동시에 제대로 된 손이 달려 있고, 구부정한 자세로 몸을 세우는 것도 가능하다.

길게 뻗은 꼬리 끝에 독침이, 튼실한 근육으로만 이루어진 몸 전체에는 검은 갑각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었다.

[고블린을 베이스로 한 병력들이 만능이라면, 이들은 그 힘이 덩치와 기동성에 집중된 이들이다. 설계목표는 그 고양이들 정도의 적을 1대1로 상대하는걸 가정하고 만들어졌지]

그들이 통로를 내달려 학살의 현장에 가세했다.

택시가 목적지 근처에 도착한게 그때였다.

"다, 다들 진정하세요! 놈들이 모두 물러갔으니 이제 구조 활동을..."

현장은 예상대로 아수라장이었다.

경찰들, 구급대, 헌터들, 언론사까지.

하지만 가장 많은건 피해 소식을 듣고 몰려 온 피해자들의 가족과 지인들이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계속, 끊임 없이 반복될 것이다]

"게이트 너머에서 지들끼리 싸우지 대체 왜?"

[당연히 너머에서도 싸우겠지. 그들이 한낱 마물에서 게임에 참여한 유닛이 된 이후에도 왜 자꾸 지구를 침략할까]

"...약탈이겠지. 개자식들."

유닛이 된 마물들은 더 이상 단순무식한 짐승들이 아니었다.

놈들은 이제 지구에서 자기들이 필요한 것들을 약탈해가고 있었다. 가령, 사람이라던가.

"거기 통제 똑바로 해!"

"모두 진정해 주십시오. 지금 구조대가 들어가서..."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번화가 한복판이라 그런지 강도연의 학교에 고블린들이 나타났을 때 그 이상인 것 같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슬쩍 눈치를 본 나는 다른 사람들이 정신 없어 하는 사이 근처에 놓여져 있던 형광 조끼 하나를 주워 입었다.

경찰을 포함한 구조대가 우르르 들어가서 현장에서 사람과 시신을 운반해오고 있다.

나는 슬쩍 그 틈에 끼어들었다.

혹시나 싶었지만 극도의 혼란 때문인지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쪽으로!"

선두에서 달리던 구급대원 하나가 동료들을 인솔해 코너를 돌때.

나는 슬쩍 근처 빌딩 사이 골목길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우르르 대피하느라 난장판이 된 현장, 아직 마르지 않은 핏자국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크..."

코너를 돌아 참상을 목격했다.

널브러진 사람의 시신, 그리고 헌터에게 당했는지 반으로 갈라져서 죽은 오크의 시체.

[표본을 등록할테냐]

"사람은..지금 넣어도 효과 없잖아."

[그렇다고 본다]

"오크만 전송해. 필요가 없다면 고인능욕할 생각은 없어."

나는 최대한 빨리 사진을 찍어, 오크의 시신을 군단의 둥지에 전송했다.

의외로 쉽게 수확을 거두었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아무리 오크나 고블린 같은 마물들이 세지고 똑똑해져도 과연 사람만큼 발달할까.

머지않아, 나는 사람의 표본도 보내야 할 것 같았다.

[군단은 너의 의도를 파악하고, 표본으로 넣어진 오크를 흡수하고 분해했다]

이번엔 전철을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격변하는 세상에 다들 불안에 떨고 있을 때 나는 멍하니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가장 필요한건 오크의 두뇌 구조였지만 고블린으로 처음 겪은 이족 보행 생명체의 또다른 신체 구조 역시 큰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덩치를 키우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효과는 좋은건가?"

[보강하는 형식은 되지만 진일보하는 수준은 아니다]

군단은 오크의 유전 정보를 분석하여 알차게 사용하게 되었으나 눈에 띄는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고블린을 베이스로 하던 군단병보다 덩치가 더 커지게 되었다는 것 정도.

"불안하다. 솔직히 말하면 무섭다."

나는 조용히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딱히 위로나 답신을 바라고 말한건 아니다.

징징거린다고 욕먹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든 아니든 현실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더 이상 어플과 게임에 휘말린걸 억울하다 생각하진 않았다.

어쨌든 만약 어플이 없었다면 남들 처럼 갑작스레 변한 세상에 아무것도 모르고 그대로 휩쓸렸을 테니까.

단지 내가 계속 버티고 있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었다.

"뭐, 뭐야!"

"으아악!!"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전철을 강타한 원인을 알 수 없는 강한 충격에 좌석에서 튕겨나가 바닥에 강하게 부딪혔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전등이 깜빡거리고 유리창이 깨져 파편이 마구 튀었다.

분명 전철은 지상을 달리고 있었는데.

[정신 차려라]

내 눈앞에 떨어진 휴대폰에서, 다급한 글자가 떠올랐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부터 챙겼다.

침략과 약탈은 끊이질 않았다.

*

"또 다른 게이트?!"

"유닛으로 추정되는 놈들이다. 게임 시작 직후부터 지금껏 지구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레이스종."

"...위치는."

"방금 보냈다. 다만 아직 명령이 떨어지진 않았어. 뭐, 어차피 예상한 일이잖아? 난장판이 될거라는거."

혼자 조용히 집안에 남았던 차지연은 동료의 전화를 받으며 서둘러 뉴스 속보를 살폈다.

오크 사태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또다른 침략이 시작되었다.

너무하다 할수도 있지만, 애초에 플레이어와 합작하는 유닛의 결단이라면 지구인들의 사정 따위는 고려되지 않을 것이다.

[귀찮게 구는군. 플레이어는 지금 짜증을 내고 있다. 그의 능력으로도 지구 전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커버하는건 불가능하다]

"그럼 저는 어쩌죠?"

[대기해라. 건방진 놈들을 징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잔챙이라도 수십 이상의 세력들을 모두 신경썼다가는 우리의 대계가 흐트러진다]

대답을 들은 그녀는 작게 탄식했다.

예상은 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나설 수 없게되었다.

그들이 말하는 대계란 바로 이쪽에서 펼치는 총공세.

그녀의 플레이어는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자신의 유닛들을 한데 모아, 게이트 너머의 적들을 선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레이스는 신체 대부분이 영체로 이루어진 놈들, 평범한 무투계는 상대하기 힘들텐데.'

그녀는 자리를 서성이며 초조하게 뉴스만 시청했다.

계약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각오한 일이지만, 그녀는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게 늘 마음에 걸렸다.

더구나 그 일이 앞으로 계속해서 더 많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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